나는 원래 소설을 쓰고 싶었다. 기자로 활동하다가 소설가가 됐다는 김훈이나 장강명과 같은 이들을 본보기로 삼아 이곳에 적을 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의 나태함을 알고 반강제적으로라도 글을 계속 써야겠다는 생각이었을 뿐. 대학신문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일단 ‘기자’라니 글을 쓰겠구나 싶어 지원해 약 2년 반이 지났다. 원래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핑계를 대자면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글만 자주 쓰다 보니 문학적인 수사가 손끝에서 거의 나오지 않게 됐다. 논문 개요처럼 사건진행 순서만 그린 프롤로그만 몇 편 모은 지금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히 남아있다.소설 속에서 ‘언론’이라고 하는 조직은 항상 눈에 띄게 양면성을 보여준다. 정론직필을 통해 권력을 견제하고 정의사회를 구현하겠다며 펜을 든 언론이 부패권력과 유착해 탐욕스럽게 변한 모습은 어떤 정치인이나 기업가의 부패보다도 시민들에게 불안감을 주는 요소이기 때문이리라. 순수한 언론, 부패한 언론, 그도 아니면 이해타산을 따져 움직이는 언론의 서사들을 읽다가 관심이 조금 옮겨온 것인지도 몰랐다.사실 경북대신문에 처음으로 내 이름이 실린 것은 수습기자로 들어오기도 전인 2017년 3월의 1590호 특별기획
자율형사립고등학교, 의도치않게 재단 모회사 직원 자녀이기에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두 한 사립재단 소속 학교를 나왔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경시대회나 공모전에서 높은 성적을 받지 못했다. 성적순으로 자르면 30% 내외에 어중간하게 들어가서, 아예 못한다고 하기는 그렇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구나!”라고 칭찬을 듣지도 않았다.진학 당시 우열반이 사라진지 3년이 넘지 않았으니, ‘학업성적’으로 학생을 차별하는 풍토도 남아있었다. 우대를 받는 쪽도, 무시를 받는 쪽도 마음에 들지 않아 그들의 기준에서 중간을 유지하면서 하고 싶은 대로 도서관에 박혀 살며 책을 읽었다. 가끔 다독상을 받거나 독서토론대회에 나갔고, 도서관에 어질러진 책을 보고 참지 못해 정리를 하면 그만큼 봉사시간을 받았다.여러 소문을 들었다. 입학시험에서 전교 1등을 한 친구가 졸업할 때까지 계속 전교 1등을 유지해서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는. 그 친구가 수학 시험 서술형 문제를 조금 덜 풀었음에도 그 시험에서 서술형 문제가 만점으로 채점됐다는. 어쩌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친구 부모님이 교장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서 사실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소문이 시작이었다. 후배들에게 특정 교사가 입
지난 22일부터 24일까지 3일간 본교 대동제가 진행됐다. 대동(大同)이란 말은 크게 하나가 되라는 뜻으로 1980년대 대학가에 운동권 총학생회가 들어서 공동체를 강조하면서, 대동제(大同祭)라는 명칭이 대학 축제에 붙여졌다. 이후 대부분의 대학에서 축제명을 따로 붙이지 않고 ‘대동제’라고 불러왔고 본교 역시 마찬가지다. 본교에서는 단순한 대학축제가 아니라 본교의 개교기념일을 기념한다는 의미를 담아 대개 개교기념일과 가까운 시기에 대동제를 진행하게 됐다. 당시에는 대중문화와 구별되는 학문적인 이념을 가지고 공동체를 대변하는 대학문화를 반영한 대동제가 열렸다. 이때의 대동제는 학생문화와 대학문화를 투영하는 장으로 존재했다.군사정부가 지나가고 민주적인 사회분위기가 퍼진 2000년대부터는 대개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당선됐다. 사회의 변화는 총학생회의 색채만을 바꾼 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 만족한 학생들이 총학생회 주도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문제로 이어졌다. 학생사회는 더 이상 작은 사회로 활동하지도, 인정받지도 못하게 됐고, 학생들은 해마다 한 번씩 학교가 연예인과 술로 가득해지는 대동제에만 관심을 보이는 정도에 그쳤다. 또 최근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취업시장이 좁아지면
대학생이 되고 나서 친척들에게 들은 말의 상당수는 “남자친구 있니?”였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남자사람친구와 편의점에라도 함께 걸어가는 것을 보면 화들짝 놀라던 사람들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대학생인 나에게는 할 말이 그것밖에 없는 냥 “애인은 있니?”라니.대학에 들어와서 할 일은 연애 말고도 많다. 학과 수업을 듣거나 과제를 하면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새로 만난 친구들과 시내 이곳저곳을 놀러다니기도 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직접 여행계획을 짜서 떠나보기도 했다. 내가 혼자서 혹은 지인들과 즐겁게 보낸 시간이 ‘나에게 좋은 의도를 가진, 피가 조금 섞인 어른’의 한마디에 오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 들곤 했다.어딘가에 ‘한국에서 대학생이 된 사람에게는 연애를 하냐고 꼭 물어봐야 한다’는 규정이라도 있는 것 같다. 한 번은 소개라도 해주고 그런 말하라며 넘기고 한 번은 내가 현실에서는 눈에 차는 사람이 없다는 말로 넘겼다. 그러면 마치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라는 눈빛과 함께 사랑을 통해 무엇이든 치유할 수 있고, 혼자 지내는 네 외로움도 없어질 거라는 말들이 돌아왔다. 사실 나도 로맨스 소설을 읽거나…
나는 왜 자취를 시작했나. 직전학기 성적이 낮을 것 같아 기숙사를 신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모님께 ‘3학년부터는 기숙사를 신청해도 들어가기 어려울 것 같다’는 명목을 내세워 학교 주변에서 자취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괜한 걱정에 성적표가 나오기도 전부터 걱정만 하고 있던 나와 달리 부모님은 추진력이 있으셨다. 덕분에 나는 기숙사 퇴관일에 새 집으로 짐을 옮길 수 있었다.자취생활 준비는 어떻게 했나. 입학하면서부터 기숙사 생활을 약 2년간 했기에 일상생활 용품은 다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엌이라는 공간과 개인 세탁기가 생기는 것은 생각보다 큰 변화였다. 칼을 다루는 것이 아직 서툴러 대단한 요리를 하는 것도 아니건만 혼자 하루에 밥 한 끼라도 챙겨먹기 위해서는 많은 기구가 필요했다. 그릇, 접시, 수저 등은 나 혼자 지내는 곳임에도 두세 개씩 준비해야 했다. 1년간 정든 이불은 새 이불로 바꿨고, 종량제 봉투를 대량 구매해 서랍에 넣어뒀다.자취생활은 어떤가. 부모님은 1·2주에 한 번씩 나를 방문하시고, 두 분은 모두 깔끔한 것을 좋아하신다. 기숙사 생활을 할 때는 부모님이 기숙사 내부로 들어오시는 일이 없어, 룸메이트와 둘이 편하게 살았는데.…
지난 9월 25일, 영국 수학자 마이클 아티야는 세계 7대 수학 난제 중 하나인 ‘리만 가설’의 증명을 시도했다. 리만 가설은 독일의 수학자 베른하르트 리만이 1859년 발표한 것으로 ‘소수’의 개수가 얼마나 되는지 찾는 과정에서 파생된 ‘제타 함수’의 ‘자명하지 않은 해(답)’를 찾는 법을 정리한 것이다.방금 소개한 가설을 이해하겠는가? 안 되는 게 당연하다. 기자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증명이 발표된다는 소식을 들을 때부터 몇 번이고 읽어봤지만, 좀처럼 ‘소수의 개수를 찾는 일과 관련된 것’에서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난제는 이처럼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사건이나 문제를 뜻한다.지난 22일 본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총학생회 선거 관련 입장문을 발표했다. 입장문에 따르면, 총학생회 선거운동 기간 동안 한 선본이 후보등록 당시 제출한 공약과는 달리 추가수정된 공약을 홍보했다. 이 일이 발생하기 이전에 ‘등록 이후 공약의 추가수정이 가능한가’라는 해당 선본의 질문에, 중선관위 측이 착오로 ‘그렇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선거 마지막날 알려졌다. 학생사회에는 이처럼 늘 난제와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지난 2014년 11월 총학생회
지난 9일 나는 학과 학술제에 학내 학술 동아리 부원 자격으로 참가했다. 그날 우리 동아리가 발제한 주제는 ‘연대성을 통해 알아보는 학생사회의 붕괴’였다. 발제의 주제가 나온 배경은‘ 왜 학술제와 학술 동아리가 망해가고 있나’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지난해 학술제는 복합적인 상황으로 인해 열리지 못했다. 학술 동아리의 경우 부원들끼리의 친밀감으로 어렵게 유지돼 왔다. 이런 상황이기에 학술제에서 '학술제가 왜 망해가고 있냐'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본지는 2014년 ‘학술 소모임, 죽었니? 살았니?’라는 제목으로 학술 동아리의 위기를 다뤘다. 그 기사에서 유지되고 있는 학술 동아리의 상황은 다음 중 하나로 귀결되는 듯 보였다. 특정한 대회나 프로젝트 등의 확실한 목표성을 가지거나, 개인적인 끈끈한 친분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학술 모임 자체가 가진 의의와, 조직의 힘은 약해졌다. 더는 ‘학술 모임’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 사람들은 모이지는 않는다.그러다 문득, 우리 신문의 상황을 돌아봤다. 경북대신문은 그런 몰락을 겪지 않을까. 경종은 울릴 대로 울렸다. 기자 충원 문제는 한두 해의 문제가 아니고, 배부대에 쌓인 신문 더미를 보면 신문이 과연…
기대. ‘어떤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기다림’을 뜻하는 말이다. 자신이 못하는 일이나 남이 해줘야만 하는 일에는 기대를 하게 된다. 마치 리모콘을 쥔 사람을 향해 “오늘 하는 수목드라마에 채널을 멈춰줬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는 소소한 것처럼 말이다.기자는 언젠가부터 이런 기대가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진심을 다했으니 그냥 날 저버리고 가진 않겠지”, “내가 이 정도 했으면 저 사람이 나에게 상처주지 않겠지”라고 기대해도, 상대가 기대와 반대로 행동해 버리면 그만이다. 오히려 기대하지 않으면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뭔지 찾게 되고, 결과가 좋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을 수 있다. 이는 좋지 않았던 일을 훌훌 털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데에도 유용하다.그러나 좀 더 사회적인 활동을 할수록, 최소한의 기대가 필요한 행동들이 생긴다. 정치인은 유권자에게 더 많은 ‘표’를 기대하게 된다. 유권자는 “내가 원하는 정책을 펴주겠지”라는 기대로 투표한다. 대학에 등록할 때에도 “내가 뭔가 얻어갈 수 있는 수업을 제공하겠지”라는 기대가 없다면 등록금을 납부하기 망설여진다.참 처절한 건, 실망을 안겨준 대상일지라도 필요한 일을 진행하려면 다시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