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부장 이동윤’이라는 이름으로 작성하는 마지막 칼럼인 만큼 기획부장으로서 1년간 경북대신문 속에서 경험했던 느낌을 공유해보고 싶다. 예전부터 조직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자주 상상하곤 했는데, 항상 내가 리더로서 조직을 잘 이끌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운이 좋게도 기획부장이라는 이름으로 경북대신문이라는 조직을 이끌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호기롭게 시작한 기획부장은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니었다. 교내외 유력 인사들과 접촉했고, 경북대신문이 나아갈 방향성에 대해 계속 고민했으며, 작성되지 못한 기사를 대체할 새로운 기사들을 찾아내곤 했다. 정기자 시절 그렇게 힘들었던 기사 작성이 사실은 가장 쉬운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획부장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바로 중간 리더로서의 자세라는 점을 깨달았다.중간 리더라는 말이 참으로 애매모호하다. 일반 구성원들보다는 경험과 지식이 풍부하지만, 그렇다고 리더라고 부르기에는 살짝 부족한 점이 있으니 말이다. 중간 리더도 기본적으로 부여되는 역할은 많지만, 스포트라이트는 대체로 리더에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이로 인해 누군가는 중간 리더의 존재를 평가절하하고 오히려 더 높은 곳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코로나19는 스포츠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열려야 했던 2020 도쿄올림픽이 연기된 것도 그 중 하나인데, 과거 세계대전으로 인해 올림픽이 연기(취소)됐던 경우를 제외하고 전염병으로 인한 연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에 더해 전 세계 프로스포츠 리그들도 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 무관중으로 진행됐으며, 기존에 운영되던 리그들은 단축되거나 조기 종료되기도 했다.이렇듯 코로나 시국 속에서 스포츠 분야 역시 그야말로 대위기이다. 스포츠의 꽃은 관중이라고 하는데, 정작 경기는 대부분 고요하게 진행된다. 오죽 고요했으면 선수들과 심판이 대화하는 소리조차 전부 들릴 지경이다. 또한 관중의 감소는 구단들의 수입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코로나19로 인해 무관중으로 수많은 경기들을 치렀던 구단들은 하나같이 파산을 선언하거나 은행에 대출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며칠 전 세계적인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는 20년간 몸담았던 구단을 떠나기도 했는데, 사유는 코로나19로 인한 심각한 재정위기 때문이라고 한다.하지만 지난 6월에는 이와 정반대되는 대회가 열렸는데, 바로 ‘유로 2020’이다. 이 대회는 이전과 달리 대부분 유관중으로 진행됐으며, 경기를 거듭할수록…
처음 디지털카메라를 접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생긴 후 나에게는 항상 예쁘고 매력적인 모습을 잊지 않고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휴대폰 카메라로 여자친구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 행동, 촬영 당시의 풍경을 디지털카메라의 좋은 화질과 기술적인 표현 방식을 더해 풍부한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사진과 카메라에 대해 알아갈수록 내가 원하는 사진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부분과 사진을 촬영하는 사람의 의도와 풍경, 모델의 교감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의 기본적인 조작법이나 이론도 모르면서 촬영을 하기에는 카메라에 숨은 기능이 너무 많다. 이후 사진을 배우기 위해 대구 남구의 사진학원에 다니기도 하고 사진 기능사라는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카메라의 기본 조작법인 셔터 스피드, 조리개값, ISO 감도만 조절해도 의도한 사진을 어느 정도 표현할 수 있었다.나는 사진을 찍더라도 매일 보는 친구나 풍경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기보다는 자신만의 남다른 시각으로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 사진을 찍을 때는 SNS에 올라오는 예쁜 모델들의 사진들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모
엊그제 스무 살이 된 것 같은데 벌써 세 번째 스무 살을 보내고 있다. 삼년 동안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느꼈으며, 매일의 실수와 아픔을 통해 배움을 얻었다. 20대에 마주한 다양한 사람들과 새로운 환경이, 그리고 그로 인한 갈등과 고민이 나를 더 나답게, 넓고 깊게 만들어 주고 있다.20대에 얻은 첫 번째 배움은 책임과 태도이다. 맡은 역할이 늘어갈수록 나는 책임과 태도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경북대신문 기자로, 경북대기독센터의 부장단으로, 그리고 아르바이트생으로 살아가다 보니 매일 크고 작은 갈등에 부딪혔고, 내 안의 두려움과 직면해야 했다. 인터뷰 요청은 떨렸고, 꺼내기 어려운 말도 해야만 했다. 피할 수 없는 상황들은 스트레스가 되기도 했고, 그로 인해 일을 미루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내게 주어진 일을 해내야만 했고 마침내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됐다. 그 속에 수많은 망설임과 마음 졸이며 보낸 시간이 있었지만 말이다. 두려움과 망설임을 온몸으로 느끼고 감당하다 보니 역할을 감당할 자세와 태도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고, 내 안의 두려움에 맞설 용기와 여유 그리고 책임감을 배우게 됐다.두 번째로 감정의 표현과 절제를 배웠다. 20살, 그리고 그 전
경북대신문 기자가 된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사람과 만났고, 학교를 구석구석 뛰어다녔으며, 갓 들어와 수습을 거쳐 어느새 부장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신문사의 가장 큰 매력은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인데, ‘이동윤’이라는 개인이 아닌, ‘경북대신문 이동윤 기자’라는 말은 이를 더 용이하게 만들어준다. 물론 취재원과 인터뷰이 등이 전부 다 처음 뵙는 분들이기에 어색할 때도 있지만,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들의 내면세계에 공감하기도 하고, 학교에 헌신하는 그들 모습에 감동을 받기도 한다.기자로서 처음으로 인터뷰를 했던 분은 지난해 도서관 분관장님이셨던 채동욱 교수님이다. 당시 상주캠퍼스 도서관 리모델링에 관해 취재하고 있었는데, 교수님께서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셨다. 사실 기자 생활이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처음으로 누군가와 만나 인터뷰를 하는 것이었기에 상당히 긴장했는데 교수님께서 상세히 설명해주시고 기사 작성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교내 기관 중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국제교류처다. 특히 국제교류처 주무관님들과, 코로나 국제교류 동향과 향후 전망에 관해 얘기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학생들도 만났었는데, 코로나 속에서 국
나는 원래 소설을 쓰고 싶었다. 기자로 활동하다가 소설가가 됐다는 김훈이나 장강명과 같은 이들을 본보기로 삼아 이곳에 적을 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의 나태함을 알고 반강제적으로라도 글을 계속 써야겠다는 생각이었을 뿐. 대학신문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일단 ‘기자’라니 글을 쓰겠구나 싶어 지원해 약 2년 반이 지났다. 원래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핑계를 대자면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글만 자주 쓰다 보니 문학적인 수사가 손끝에서 거의 나오지 않게 됐다. 논문 개요처럼 사건진행 순서만 그린 프롤로그만 몇 편 모은 지금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히 남아있다.소설 속에서 ‘언론’이라고 하는 조직은 항상 눈에 띄게 양면성을 보여준다. 정론직필을 통해 권력을 견제하고 정의사회를 구현하겠다며 펜을 든 언론이 부패권력과 유착해 탐욕스럽게 변한 모습은 어떤 정치인이나 기업가의 부패보다도 시민들에게 불안감을 주는 요소이기 때문이리라. 순수한 언론, 부패한 언론, 그도 아니면 이해타산을 따져 움직이는 언론의 서사들을 읽다가 관심이 조금 옮겨온 것인지도 몰랐다.사실 경북대신문에 처음으로 내 이름이 실린 것은 수습기자로 들어오기도 전인 2017년 3월의 1590호 특별기획
자율형사립고등학교, 의도치않게 재단 모회사 직원 자녀이기에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두 한 사립재단 소속 학교를 나왔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경시대회나 공모전에서 높은 성적을 받지 못했다. 성적순으로 자르면 30% 내외에 어중간하게 들어가서, 아예 못한다고 하기는 그렇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구나!”라고 칭찬을 듣지도 않았다.진학 당시 우열반이 사라진지 3년이 넘지 않았으니, ‘학업성적’으로 학생을 차별하는 풍토도 남아있었다. 우대를 받는 쪽도, 무시를 받는 쪽도 마음에 들지 않아 그들의 기준에서 중간을 유지하면서 하고 싶은 대로 도서관에 박혀 살며 책을 읽었다. 가끔 다독상을 받거나 독서토론대회에 나갔고, 도서관에 어질러진 책을 보고 참지 못해 정리를 하면 그만큼 봉사시간을 받았다.여러 소문을 들었다. 입학시험에서 전교 1등을 한 친구가 졸업할 때까지 계속 전교 1등을 유지해서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는. 그 친구가 수학 시험 서술형 문제를 조금 덜 풀었음에도 그 시험에서 서술형 문제가 만점으로 채점됐다는. 어쩌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친구 부모님이 교장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서 사실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소문이 시작이었다. 후배들에게 특정 교사가 입
지난 22일부터 24일까지 3일간 본교 대동제가 진행됐다. 대동(大同)이란 말은 크게 하나가 되라는 뜻으로 1980년대 대학가에 운동권 총학생회가 들어서 공동체를 강조하면서, 대동제(大同祭)라는 명칭이 대학 축제에 붙여졌다. 이후 대부분의 대학에서 축제명을 따로 붙이지 않고 ‘대동제’라고 불러왔고 본교 역시 마찬가지다. 본교에서는 단순한 대학축제가 아니라 본교의 개교기념일을 기념한다는 의미를 담아 대개 개교기념일과 가까운 시기에 대동제를 진행하게 됐다. 당시에는 대중문화와 구별되는 학문적인 이념을 가지고 공동체를 대변하는 대학문화를 반영한 대동제가 열렸다. 이때의 대동제는 학생문화와 대학문화를 투영하는 장으로 존재했다.군사정부가 지나가고 민주적인 사회분위기가 퍼진 2000년대부터는 대개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당선됐다. 사회의 변화는 총학생회의 색채만을 바꾼 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 만족한 학생들이 총학생회 주도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문제로 이어졌다. 학생사회는 더 이상 작은 사회로 활동하지도, 인정받지도 못하게 됐고, 학생들은 해마다 한 번씩 학교가 연예인과 술로 가득해지는 대동제에만 관심을 보이는 정도에 그쳤다. 또 최근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취업시장이 좁아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