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속에 ‘잠’조차 잘 수 없는 사회모든 것이 열려 있는데 능력이 안 된다는 자각이 드는 순간 개인에게는 우울증이 찾아온다지난 6일, 미국 ‘애틀란타저널’에서 “한국은 주말에도 일하는 나라”라며 “목표 달성을 중시하는 성과주의적인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1면 탑 기사를 냈다. 이처럼 현재 한국 사회는 성과주의 속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 대학생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다. 그들 또한 이런 성과주의 사회 속에서 성과주의의 주체로서 강의실 속 학생들을 오직 경쟁자로만 받아들이고 있다. 경쟁을 위해 스스로를 경주트랙 속 경주마로 만든다. 이처럼 자발적 착취가 미덕이 된 사회. 이에 본지에서는 성과주의 사회가 무엇이고 그것이 초래하는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은 없는지, 본교 몇몇 강사 및 교수들과 함께 고민해 봤다●#1. “저기 지난주 수업에 못 나와서 그러는데 필기노트 좀 볼 수 있을까요?” 순간 강의실 내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필기노트를 가진 학생은 자신의 노트를 빌려달라는 학생에게 싸늘한 눈초리를 보낸다. “성적은 상대평가인데 제가 그쪽한테 노트 빌려드려서 제 성적 안 나오시면 책임지실 건가요?” 노트를 빌려달라던 학생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2. 본교
흔히 평생교육을 설명할 때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사람의 평생에 걸친 교육이라는 의미이다. 본지에서는 본교에서 평생교육학을 가르치는 현영섭 교수(사범대 교육)와의 인터뷰를 통해 평생교육의 의의와 현황. 그리고 평생교육이 지향하고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1967년 만들어진 평생교육의 시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67년 유네스코 성인교육회의에서는 평생교육론을 제창했다. 그리고 1972년 일본 동경에서 열린 성인교육 국제회의에서 33개의 항목으로 구성된 평생교육과 관련된 건의서가 받아들여졌다. 이것이 평생교육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73년 8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주최한 회의에서 평생교육에 관련된 건의서가 채택됨에 따라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평생교육이라는 단어가 쓰인지는 불과 20년도 안 된다.현 교수는 “1990년대 말까지만해도 평생교육이라는 단어보다는 사회교육이라는 표현을 썼다”며 “이후 학교 이외에 사이버공간 등으로 교육이 시·공간적으로 확장되면서 비로소 평생교육의 의미가 정립되었다”고 말했다. 평생교육이 본격적으로 실시된 것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현 교수는 “1981년 전두환 정권이
우리 사회는 고령화 사회로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변화와 함께 교육 체제도 변화하고 있다. 노인 및 성인의 평생학습 참여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평생학습 참여율은 2000년 17.2%에서 2004년에는 21.6%, 현재는 약 36%의 참여율을 보인다. 이런 때에 대학이야 말로 지역주민의 평생 학습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사회 변화와 요구에 따라 변신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본교에도 이를 실현하기 위한 평생교육원이 DGB문화센터 3층에 위치하고 있다. 본교의 평생교육원은 1995년에 대구 최초로 설립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현재 본교 평생교육원의 학년이 계속해서 없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이에 본지는 본교의 평생교육원을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지난 2일과 4일 오전 9시 45분. 기자가 수업 듣는 강의실에서 보던 것과 같은 책걸상에 앉아 수업을 분주하게 준비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할아버지는 오늘 안 오셨데?”. “아휴. 많이 아픈가벼”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하며 수업을 준비한다. 오전 10시. 교수님이 들어오시며 모두가 집중한다. 다른 분위기이다. 그렇게 ‘생
글자는 건조하다. 윤전기를 통해 나오는 글자는 사실 잉크를 적당한 모양으로 뿌려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 때문일까? 활자로 나오는 인쇄매체 속 우리사회의 20대 청년들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무미건조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활자 속의 숨겨진 청년들의 노동현장을 직접 찾아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들과 생살로 부딪히며 그들의 현실을 기록했다. 이 기사는 지난 16일부터 18일까지 3일 간 기자가 ‘막노동’을 하면서 만난 20대들의 이야기다. 또한 기사에 나온 20대 청년들의 이름은 전부 가명임을 먼저 밝힌다●첫째 날10분 만에 구한 일자리“지금 당장 나올 수 있어요? 안 그래도 추석연휴라 그런지 사람이 많이 필요한데… 얼른 추리닝만 대충 껴입고 빨리나오세요. 장소는 문자로 보내드릴 테니까요”‘10분이나 걸렸을까?’ 인터넷 구인구직 사이트를 통해 연락한 H인테리어공장에서의 과장은 이름과 나이만 물어보고 재빨리 나오라고 재촉했다. 20대들이 막노동 현장에 접하는 것은 생각보다 아주 쉬웠다.일급 주는 사람 따로, 일 시키는 사람 따로?경기도 시흥에 위치한 H인테리어공장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8명의 20대 청년들이 보였다. 그리고 전화로 나를 고용한 H
토지이용과 교통체계는 체인(chain)과 같다수성구 만촌동 만촌네거리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수성대학교 옆 편에 작은 마을이 보인다. 두봉 마을이다. 마을은 가느다란 오이모양으로 생겼다. 또한 마을 주변은 전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산속에라도 와 있는 듯하다. 도심 속 산골마을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작은 마을에 개발이 우후죽순 시작되면서 구청과 주민간의 갈등이 시작됐다. 바로 마을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의 유일한 진입로 때문이다. 이에 본지에서는 두봉 마을의 갈등을 통해 도시개발의 올바른 방향성에 대해 다뤄봤다● 오전 7시 반, 마을 입구로 들어오는 유일한 입구가 마비됐다. 폭이 불과 5m정도 밖에 안 되는 입구를 트레일러와 덤프트럭이 지나가느라 끙끙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통학을 하는 학생들과 마을 주민들이 30분 째 지나가질 못하고 있다. 트레일러가 지나가자마자 학생들과 차량들이 혼잡하게 지나다니기 시작한다. 학생들과 주민들이 혼잡한 차량 사이로 지나다니는 것이 위험천만하기만 하다. 두봉 마을에서 42년 째 살고 있는 이판옥(65) 할머니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공사인력으로 인해 마을주민들이 도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서명 좀 해주고 가세요. 대구도시철도 3호선 안전성 확보를 위한 서명운동입니다” 지난 4일 서문시장 앞에서 대구도시철도 3호선(이하 대구 3호선) 안전 확보를 위한 시민대책위원회(이하 시민대책위)에서 활동하고 있는 참여연대 장지혁 활동가가 열변을 토했다. 장 활동가는 “대구 3호선의 안전은 시민들의 생명과도 직결되는 사안이기에 반드시 대구시에서는 안전성을 확보해야한다”고 말했다. 이에 본지에서는 대구 3호선 안전성에 대해 여러 시민단체 측의 의견과 대구도시철도건설본부, 그리고 대구시의 의견을 들어봤다●대구 3호선, 무인운전, 무인역사? 현재 국내 무인으로 운행되는 전철 노선은 부산 4호선과 의정부경전철을 포함해 총 6곳이다. 또한 기관사가 탑승하고 있더라도 많은 도시철도차량은 운전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구도시철도건설본부(이하 건설본부) 유경수 과장은 “현재 기관사의 역할은 전방주시, 출입문 개폐, 출발버튼 조작 정도이며 이정도 역할은 무인 시스템으로 충분히 대체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에 참여연대 박인규 사무처장은 “기계 시스템의 오류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기관사가 탑승해 관리하는 것 아니냐”며 “사소한 오류가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
가려진 진실, 위안부역사관을 통해 밝히다“여러분들이 염려해주고 저희를 위해 마음을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현재 대구에서 위안부 역사관을 건립하기 위해 추진 중인데 여러분들의 힘을 모아주세요” 마이크를 잡은 한 노인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84) 할머니이다. 그녀는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을 건립하고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야한다”며 천 여 명의 시민들 앞에서 소리쳤다. 비록 얼굴과 손은 주름으로 가득 찼지만 결의의 찬 그녀의 눈빛은 청춘이었다. 몇 분간의 짧은 연설이 끝나자 천 여 명의 시민들의 박수세례가 이어졌다. 그녀의 눈가는 빛났다●지난달 14일 오후 5시. 천 여 명의 시민들이 신천둔치 동신교 생활체육광장에 모였다. 바로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이 주최한 제 4회 ‘평화와 인권을 위한 대구시민걷기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서이다. 이날 걷기대회에서는 대구에 거주하는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84), 김분이(87), 이선옥(89) 할머니도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이번 걷기대회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는 것과 대구 중부경찰서 맞은편에 들어설 예정 중인 위안부역사관 건립을 위해 개
시민모임 이권희 조직국장 인터뷰“나쁜 역사는 잊지 않되,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지난달 21일 대구 중구에 위치한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 사무실에서 이권희 조직국장을 만나 시민모임의 발족계기와 현재 활동,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들어봤다●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시민모임의 가장 큰 힘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 힘을 모으다.1995년 일본에서는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배상을 하기 위해 일본정부의 후원을 받아 민간에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 기금(이하 국민기금) 사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국민기금의 대부분은 민간기금으로 이루어졌으며 일본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배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1997년 1월 11일 일본의 국민기금 관계자들은 서울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5명과 만나 위로금 2백만 엔과 함께 당시 일본 하시모토 수상의 편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조직국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당시 국민기금의 보상이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이 아니었기에 대부분의 위안부피해자들은 배상을 거절했다”며 “이러한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대구여성회의 한 분과로 있었던 시민모임이 독립해 1997년 12월 29일 정식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