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학교 인문대학이 70년이 되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일곱 번을 지나는 시간이다. 나이 일흔을 ‘예로부터 이렇게 오래 산 사람은 드물다’는 뜻으로 고희(古稀)라고 부른다. 평균 수명이 길어진 오늘날에도 일흔은 상당한 고령이듯,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장구한 역사를 지닌 인문대학은 많지 않다. 국립대학으로 한정하면 더욱 드물다.인문대의 역사는 1952년부터 시작되는데, 이는 경북대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1945년 광복 직후 대구에 종합대학 설치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1946년부터 그 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단과대학과 건물 등 구비조건 미비로 종합대학은 허가되지 않고 대구사범대학, 대구의과대학, 대구농과대학이 국립대학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문과 계열 학과로 구성된 사립 대구대학이 인가 설립되었다.하지만 대구지역의 교육열은 더욱 뜨거워져 1951년 봄부터 국립종합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경북도지사가 위원장을 맡고 대구지역 대학의 학장과 기관장이 추진위원으로 활동하였고, 특히 대구대학 이사장 등이 위원회에 참가하여 민관 합동으로 노력한 결과 마침내 10월 6일에 국립경북대학교가 정식 인가를 받아 1952년 봄 4
얼마 전에 경북대신문사에서 ‘우리가 몰랐던 경북대 이야기’라는 기획 기사 원고를 청탁했다. 경북대와 상주대가 통합된 지도 벌써 14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의 이야기를 드릴까 한다. 경북대 대구캠퍼스에서 근무하는 교직원들에게는 상주가 낯선 곳인지도 모른다. 옛 읍성국가시절에 상주에는 ‘사벌국’과 ‘고령가야국’이 있었고, 신라와 조선 때에는 전국 8목(牧)의 하나였으며, 「경상도」라는 지명이 경주와 상주에서 유래했을 정도로 큰 고을이었다. 특히 조선 초기인 태종 7년부터 186년간 경상도를 관할하는 「경상감영」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있었던 대구의 경상감영만을 기억하고 있다. 상주는 두 가지 정신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하나는 임진왜란 이후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는 주민들을 구휼하기 위하여 상주의 13개 문중이 뜻을 모아서 조선 최초의 사설의료기관인 「존애원」을 설립하였다. 서양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정신이 조선시대에 처음 꽃을 피운 곳이 상주이며, 지금도 상주 정신은 존애원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또 하나는, 고려시대부터 성리학이 꽃피었던 곳이 상주이며, 조선시대에 와서 영남지방 유림은 퇴계의 성리학 일색이었지만, 상주
올해 2022년은 경북대학교 법과대학 개교 71주년, 법학전문대학원은 개원 14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많은 학생은 법과대학은 이미 사라지고 없고 법학전문대학원은 소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소수의 학생만 다니는 곳으로 경북대학교 학부 재학생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기관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경북대학교 법과대학·법학전문대학원은 경북대학교 학부 학생들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경북대학교 법과대학은 오늘날 법학전문대학원, 경상대학, 행정학부,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 등의 모체라고 할 수 있다. 경북대학교 법과대학의 태동기는 1950년대라고 할 것이다. 6.25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1951년 10월 6일에 법학과, 경제학과, 정치학과 중심의 법정대학으로 설립 인가받고 다음 해인 1952년 4월 법학과 학생정원은 240명, 교수정원 4명으로 개교하였다. 당시 법정대학 건물은 본관 남쪽에 있는 대학원 건물 부근에 있던 목조단층의 가교사였다고 알려져 있다. 법정대학은 신설 단과대학이었지만 1학년 입학생만 있는 단과대학은 아니었고 1952년 4월 25일 자 문고 제473호 문교부 장관의 훈령에 의하여…
“나, 콩 죽으면, 졸업 못 해. 연구실 지켜야 해. 잠도 못 자.”농업생명과학대학의 약사를 정리해서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언뜻 떠오른 말이다. 1990년대 말 어느 해 추석 연휴의 전날, 농생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던 고등학교 동기를 인문대 근처에서 우연히 만나 언제 고향에 갈 거냐고 물었더니, 그이는 이렇게 대답했다.까마득한 기억 속에서 아, 그 콩은 무사했을까, 그이는 논문을 썼을까, 어저께 먹은 순두부찌개는 그이가 애써 가꾼 그 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념이 떠돈다. 농업, 생명, 과학이라는 본질적이고도 존재론적인 거대 담론은 이렇게 살포시 지근한 삶의 한 자락으로 내려앉았다.먹방과 다이어트가 공존하면서 한 끼의 소중함과 덧없음이 치열하게 얽히고설킨 사이에 우리는 본질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삶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길을 잃었을 때는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법이다. 거기에 ‘농위국본(農爲國本)’, 이 한마디가 있다. 농업이, 농사가, 농부가 그리고 이를 연구하는 일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이다. 농대 2호관 앞 우뚝한 돌에 새겨진 묵직한 한마디, 농업생명과학대학을 지탱하고 경북대를 받치는 그 한마디의 무게는 1943년 12월 1일
1952년 5월 28일 경북대학교가 산격동에서 개교하였다. 6.25 전쟁 중에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수백만 명의 피난민이 대구와 부산 그리고 그 주변으로 밀려왔다, 낙동강 방어선을 겨우 지키게 되었다. 대구는 다행히 폐허는 면했다. 산격동 일대는 판잣집이 즐비한 피난민촌으로 탈바꿈하였다. 대학 캠퍼스도 미국의 원조물자로 지어진 판잣집 강의실에서 겨우 강의가 진행되는 실정이었다. (사진 1. 1950년대 본관 가건물)생물학과의 양인석 교수는 식물분류학자로서 제자들과 함께 전국의 산과 들로 자연을 찾아 식물 종의 분포를 조사하고 표본을 채집하여 문헌 자료를 분석하고 신종을 찾는 등 활동을 하였다. 분류학 분야는 값비싼 분석 측정장치 등 설비가 없어도 최소한 연구수행이 가능하여 다행이었다.생물학은 전공과목을 크게 식물학, 동물학, 미생물학의 세 분야로 나누고 있다. 세 분야의 세분된 전공은 분류학, 형태학, 생리학, 유전학, 생태학, 생화학 등이 있다. 최근에는 특히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 등이 활발한 연구발전을 성취하여 인류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자연과학 분야는 필수적으로 실험실 시설과 측정기기의 설비 등이 필요하지만 재정적 한계로 인해 갖추지 못하여 애로가 많
1954년의 대구 풍경을 담은 사진이 있다. ‘아담’이라는 이름의 미국인 선교사가 1954년부터 1955년까지 대구에 머물면서 찍은 이 사진에는 그 시절 대구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1954년은 한국전쟁이 끝난 바로 다음 해였다. 대구는 전쟁의 포화를 직접 겪지 않아서 전국 곳곳에서 몰려든 피난민들로 북적댔고 다른 도시보다 빨리 재건을 향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사진에는 이 움직임이 그대로 담겨 있다. 문을 연 서문시장의 포목점들, 교모를 쓰고 줄지어 서 있는 학생들, 물을 받으러 나온 중년 여인들. 미군이 주는 배급을 얻기 위해 올망졸망 미군들 앞에 모여선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전쟁의 상흔을 보여주는 듯해서 안타깝기도 하지만 잃어버렸던 일상이 활기차게 시작되고 있었다.『경대학보』가 발행된 것은 국가 재건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던 1954년 12월이다. ‘학보’라고 해서 지금과 같은 신문이 아니라 291쪽이나 되는 분량으로 이루어진 종합학술지였다. 당시 경북대학교는 농과대학, 문리과대학, 사범대학, 법정대학, 의과대학 등 모두 5개 단과대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 단과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이 쓴 학술적 글이 『경대학보』의 주를 이루고 있다. 독자들에게 틈
대구의학전문학교는 1923년 설립된 대구자혜의원 부속 사립의학강습소(1년 후 도립으로 개편)를 모체로 1933년 설립된 공립전문학교이다. 해방 후 대구의과대학으로 그 역사가 이어졌으며 오늘날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이 된다. 대구자혜의원 부속 사립의학강습소는 1923년 7월 대구자혜의원 의관 요시다 준이치로(吉田準一郞)의 설립 청원에 대하여 경상북도지사 사와다 토오죠(澤田豊丈)가 응하여 설립된 것으로 공식 기록되어 있다. 일본인이 의학교육기관 설립을 주도하고 운영에 대거 참여하였지만, 한국인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우선 대구의학전문학교 설치를 위한 운동에 대구상업회의소를 중심으로 장직상(張稷相), 한익동(韓翼東), 서병조(徐丙朝), 이장우(李章雨) 등 한국인들을 포함한 지역 유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총독부의원 의학강습소 및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생들 중심으로 대구자혜의원, 이후 대구도립의원에 근무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더 높은 직급의 의관(醫官)보다 의원(醫員) 또는 조수(助手)의 자격으로 출발하였고 대체로 근무 기간도 짧았으나, 1913년부터 설치한 간호부조산부양성소, 이후 의학강습소 교육에도 관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최초로 대구자혜의
여기까지는 우리가 잘 아는 사범대학 이야기사범대학은 1923년 4월 「경상북도공립사범학교」로 출범했다. 1910년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일본은 조선에 사범학교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더 많은 일본인들을 교사로 초빙하기 시작했다. 삼일운동 후 높아지는 근대식 학교교육에 대한 열망은 이내 교사부족 현상을 불러왔다. 그 결과 1922년에 관립 경성사범학교를 필두로 1923년부터 각 지역마다 공립사범학교 설립이 허가되었고, 대구에도 1923년 4월 경상북도공립사범학교가 개교했다. 그리고 1929년, 조선총독부는 다시 사범학교 정책을 바꾸어 지역의 공립사범학교를 모두 없애기로 했다. 대신 관립학교였던 경성사범학교와 함께 평양과 대구에만 관립사범학교를 남겨두었다. 경상북도공립사범학교는 5년제 중등학교인 관립 대구사범학교로 개편되었다. 하지만 각 지역에 있던 사범학교들을 폐교시켰으니, 닥쳐올 교사부족 현상은 명약관화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다시 지역마다 관립사범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고, 해방 직전에 경성(1943년), 평양, 대구(1944년)의 사범학교는 다른 사범학교와 달리 오늘날 고등교육기관에 해당하는 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대구가 교육도시라는 이미지가 생긴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