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10월에 취임한 제18대 김상동 총장은 오는 20일 임기를 마친다. 이에 본지에서는 퇴임 2주일을 남겨둔 김 총장과 인터뷰를 통해 지난 4년을 되돌아봤다● Q. 아무래도 코로나19 사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총장 임기 동안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 분은 없을 정도로 특별한 시기를 거친 것 같다. 이와 관련해서 말씀 부탁드린다. 2월 중순인가부터 코로나19가 유행해 갑작스럽게 졸업식도 취소하고 입학식을 못 했었는데, 그때만해도 솔직히 2주가 지나면 끝날 줄 알았다. 개강연기를 2주 단위로 하다가 결국 1학기를 모두 비대면 수업으로 했는데 가장 혼란스러웠던 점은 교수 및 학생 모두 아무런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는 거다. 학생들은 수업을 당장 받아야 하는데 교수님들도 그렇고 학교 시스템 조차 준비가 미흡했다. 더군다나 20학번 신입생들은 학교를 더욱 오고 싶었을 텐데 그렇게 해주지 못해서 답답했다. 학생들과의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가능한 대면수업처럼 비대면 수업을 운영하기 위해 강의 모델도 구축했지만 비대면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교수님들이 노력해준 것, 그리고 학생들이 이해해준 것에 대해 감사의 표현을 하고 싶다. Q
흔히 고고학이라고 하면 생소하고 어렵게만 느낀다. 그래서 ‘고고학’이라 하면 막연히 ‘인디아나 존스’를 떠올리곤 한다. 가령 황금이나 보석을 도굴하거나, 숨겨진 유적지를 찾거나, 어드벤쳐 등을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틀에 박힌 사고를 깨고 진짜 고고학을 전하고 싶다는 본교 곽승기 교수(인문대 고고인류)를 만나봤다● Q. 먼저 교수님의 전공 분야에 대해 소개해달라 A. 고고학은 크게 선사고고학과 역사고고학으로 나뉘는데 그중 선사고고학을 전공하고 있다. 선사고고학은 구석기-신석기-철기 등 흔히 알고 있는 시대 구분의 한 범위를 이야기한 것이며, 그중에서도 신석기와 청동기 고고학에 관심이 많다.고고학 같은 경우에는 넓게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 발굴된 자료를 꾸준히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학문에 비해 전공이 세분화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먹었고, 먹는 음식이 어떻게 변했으며, 그 원인은 뭔지 등을 당시의 사회적 현상과 연결해 연구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Q. 지금의 전공을 선택한 계기는? A. 처음부터 먹는 것에만 집중해 연구하려던 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시대 구분을 하는 데 있어 옛날
사회적 기업이란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며 영업활동을 수행하는 기업이다. 최근 들어 사회적 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사회적 기업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인식도 아울러 제고되고 있다. 이제 농업, IT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우리 삶 속에 녹아 들기 시작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은 우리사회에 보이지 않는 튼튼한 기반을 이루고 있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며 사업체를 운영하는 본교 동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코딩교육권기동 동문(IT대 전자 10) 4차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소프트웨어가 중요시 되고 있다. 마냥 어렵게만 느껴지는 코딩을 쉽게 알려주는 기업이 있다. 권기동(동문, IT대 전자 10) 대표는 코딩교육연구소 ‘비피랩’을 운영하고 있다. 교육으로 사회적기업의 문턱을 넘어선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Q. 회사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주실 수 있나? A. SW, 코딩, 메이커교육 등 IT 교육이 미래 일자리를 만드는 핵심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비피랩은 SW교육 기회 확대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 연구를 진행하고 저렴하면서도 효과적인 교육 교구를 만들어 제공함으로써 청소년과 일반인들이 미래사회를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있다. Q. 사
2016년 2월 10일 개성공업지구(이하 개성공단) 가동이 갑작스레 중단됐다. 당시 개성공단에 입주했던 기업들은 막대한 물적 자원을 공단에 두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은 이러한 기업들을 돕고, 개성공단 재개를 위해 힘쓰고 있다.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김진향 이사장(정치외교 88)은 북한을 연구하는 북한학자로, 2008년부터 2011년까지 개성공단에서 일했던 경력도 있다. 그는 현재까지도 개성공단의 경제적 가치와 남북평화를 강조하며 각종 강연에 참석하고 있다. 그의 북한 연구 일대기와 개성공단의 가치를 들어봤다● Q. 북한 및 통일 문제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계기는 무엇인가?A. 학부 때 정치에 대해 굉장히 많이 공부했고, 이 과정에서 ‘분단’을 만났다. 왜 우리는 이런 불합리한 삶을 살아야 할까? 분단의 원흉을 공부하자 일제를 만났다. 전쟁이 끝나고 일제는 패망했지만, 한반도의 분단으로 일제 식민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일제를 위해 일했던 사람들은 분단의 주체가 됐다. 군대도, 경찰도, 사법도, 행정도, 그리고 언론도.한반도는 스스로 분단된 것이 아니다. 외세의 힘으로 인해, 그들의 이익을 위해 갈라진 것이다. 일제는 청산됐어야 할 대상이
다이앤 리(한국명 이봉주, 인문대 독어독문 93) 작가는 세계일보에서 주최한 제15회 세계문학상에서 소설 <로야>로 대상을 수상한 신예 작가다. 이번 수상은 15년 만의 재외 한인 수상으로, 20년 동안 한국을 방문하지 않은 신인 작가가 수상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독자들의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자신에 대한 냉철한 이해를 바탕으로 내면의 회복을 시도한 작가 다이앤 리. 그녀와 함께 우리 자신의 삶에 귀 기울여봤다.● Q. 오랜간만에 모교를 방문했다. 어떤 기분인가? 내 지도교수님이자 은사이신 이덕형 교수님을 만나기 위해 학교를 찾은 지 꼭 10년 만이다. 오랜 세월동안 학교가 너무 많이 바뀌어서 어디가 어딘지 전혀 못 알아보겠다.(웃음) 캠퍼스가 과거에 비해 더 커지고, 발전한 것 같다. 과거에 비해 많이 변화했지만, 모교에 돌아오니 왠지 모르게 편안했다. Q.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학부생 시절 추억이나 활동이 있는가? 학부생 시절에는 학교에 있었던 시간보다 공부를 위해 독일, 캐나다 등 해외에 나가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저학년 시절 학과 소리패 활동에 짧게 참가한 적도 있지만, 캠퍼스 생활이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쉬운 부분이다. 내가 학
▲비어 소믈리에 서종화 씨는 자신의 커리어를 맥주 제작의 영역까지 넓히는 중이다.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자신이 만들고 있는 맥주를 들어 보이고 있다. ‘비어 소믈리에’ 서종화 씨, 그의 비어 바틀 샵(주로 생맥주보다는 병 및 캔 맥주를 파는 맥주 판매점), ‘대니쉬 옐로우’는 대구에서 유일하게 비어 소믈리에가 운영하는 곳이다. 즐비하게 늘어선 맥주들 사이에서 어떤 맥주를 마실지 고민된다면, 망설이지 말고 물어보자. “오늘 날씨에는 어떤 맥주가 어울릴까요?” 절대로 후회 없는 추천을 받을 것이다● “요즘 같이 미세먼지가 많은 날은 목 안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의 라거가 좋아요” Q. 비어 소믈리에란 어떤 직업인가? A. 맥주는 재료의 특성과 넣는 양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데 그 종류가 아주 다양하다. 비어 소믈리에는 그렇게 특징별로 분류된 여러 맥주를 마셔보고 손님들의 취향에 맞게 맥주를 추천해주는 직업이다. Q. 비어 소믈리에라는 직업을 어떻게 알게 됐나? A. 비어 소믈리에가 되기 전에는 커피를 좋아해 커피 업계에 종사했다. 일을 마치고 맥주를 먹을 때면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때 내 취향이 커피보다 맥주와 더 맞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으며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한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은 초판 인쇄 3천 부가 3일 만에 매진됐고, 40만 부가 팔렸다. 독자들은 책 속의 당혹스러운 상황에 공감하고 해결할 용기를 얻었다. 정문정 작가(동문, 사회대 사회 05)는 자신이 찾아낸 트렌드와 자신에 대한 관찰을 이 책에 담았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정문정 작가(동문, 사회대 사회 05) Q. 작가를 꿈꿨음에도 국어국문학과가 아닌 사회학과에 진학한 이유는 무엇인가?A. 어릴 때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당시에는 리모컨의 주도권이 아빠에게 있어 TV를 볼 수 없었다. 반면에 책은 돈이 들지도 않으니 취미로 많이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레 책을 좋아하게 되고 작가를 꿈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무시할 수 없었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수상경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고등학교 때 항상 상을 받으면서도 대상은 받지 못 했다. 그래서 내 재능이 애매하다고 생각했다.내가 사회학과에 진학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 내가 글을 특출나게 쓰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일종의 일탈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나중에라도 이룰 수 있
“성적위주의 장학금제도, 과연 옳은가?” 이는 한국장학재단 이정우 이사장이 지난 1989년 3월 6일 본지 1027호에 투고했던 기사의 표제다. 당시 그는 경제학과(현 경제통상학부) 부교수 및 경상대 학생과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이 이사장은 성적 기준에서 0.2점이 부족해 장학금을 받지 못하고 공부할 기회를 놓친 학생을 다룬 기사를 통해, 장학금 기준은 성적이 아닌 학생의 경제적 여건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29년이 지난 지금 그는 한국장학재단의 수장이 되어 고등교육의 장학금 운영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를 만나 장학금과 한국장학재단, 그리고 ‘약자’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Q.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이 되기 전까지 어떤 일을 했나?A. 1950년에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대구에서 살았다. 대학에 진학하며 서울로 가서 공부를 했고, 27세가 되던 1977년에 본교 경제학과 전임강사로 세 학기 동안 재직했다. 그 후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5년 동안 공부해 박사학위를 따고 본교로 돌아왔다. 본교에서는 전공이었던 ‘불평등의 경제학’을 학생들에게 주로 가르쳤고 ▲비교 경제론 ▲경제 민주주의 ▲경제발전론 등 여러 과목을 강의했다.참여정부 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