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4월에 발생한 사상 최악의 재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를 소재로 한 HBO의 미니시리즈 <체르노빌>이 세계를 강타했다. 미국 텔레비전 방송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에미상의 작품상을 받은 것은 물론, 실망으로 가득했던 <왕좌의 게임 시즌 8>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을 시원하게 날려주며 드라마 명가 HBO의 자존심을 다시 한 번 세워주었다.‘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What is the cost of the lies?)’라는 질문과 함께 시작하는 드라마는 진실이 거짓에 의해 가려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과실을 거짓으로 덮으려는 시도는 사태를 걷잡을 수 없이 키운다. 시설 책임자는 새파란 신입 직원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소련 당국은 피해를 최소한으로 보고하며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하다.피해는 일반 시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사건의 심각성을 모르는 이들은 원전 폭발 사고를 단순한 화재로 착각하고, 불타는 모습이 잘 보이는 철교에 옹기종기 모여 상황을 구경한다. 이윽고 자신들의 목숨을 빼앗는 방사능 낙진을 첫눈처럼 천진난만하게 맞는데,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포장된 가장 비극적인 이
비싸지만 맛없는 음식을 억지로 먹은 경험이 있다. “비싼 거니 다 먹어”란 삼촌의 말들이 의아했다. 이와 같은 행동을 경제학에서는 ‘매몰비용의 오류’라고 부른다. 이는 일을 진행한다고 해도 얻는 이득이 크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까지 사용한 비용이 아까워 포기하지 못하는 걸 말한다.우리의 주변에는 수능 점수에 맞춰서, 내신 등급에 맞춰서 원하지 않은 학과에 진학한 친구들이 있다. 꿈은 고난의 연속처럼 보였고 현실은 우리를 더욱 현실적이게 만들었다. 도서관에서 전공서적을 펼쳐서 공부할 때면 옆자리 다른 과 학우가 부러워질 때도 있다. 하지만 12년 동안 사용한 시간과 비용을 생각해보면 미웠던 전공서적이 어쩔 수 없는 동반자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 지금은 학교에 없는,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나간 친구들을 생각해본다. ‘매몰비용의 오류’에 사로잡히지 않고 현실 앞에 당당히 섰던 그들을 응원해본다.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심리학과의 닐 로스 교수는 후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명한다. ‘한 일에 대한 후회’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오래가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새내기 배움터에서 발칙하게도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 역을 맡
수능이 끝나고 그때까지 모아뒀던 돈으로 유럽에 한 번 다녀온 후 지금까지 크고 작은 여행을 꾸준히 해왔다. 부모님 손에 이끌려 다닐 때는 멀미나는 고속도로와 낯선 장소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성인이 된 후 스스로 계획하고 다닌 여행의 자유로운 매력에 빠졌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참 여러 곳을 다닌다며 재밌겠다고 말해준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솔직히 해외여행을 왜 가는지 모르겠어. 차라리 그 시간이랑 돈으로 내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는 게 나아”물론 사람마다 두는 가치가 다르니 반박할 마음은 없다. 한데 여행하는 사람에게 굳이 그런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싶은 생각은 든다. 왜 여행, 특히 해외여행은 뭔가 정형화된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듯이 질문을 할까? “많이 배우게 되지? 견문이 넓어지잖아. 나중에 그쪽으로 취업하려고? 큰물에서 놀아봐야지…” 따위의 말들처럼 말이다.솔직히 며칠 집중해서 외국어를 배우고 거리를 돌아다닌다고 해서 그다지 회화 실력이 늘거나 생각이 깊어지지는 않는다. 느낀 것이라고 해봐야 우리나라, 우리 동네가 나름 살기 좋은 곳이었다는 것 정도? 나에게 여행은 그저 ‘취미’ 정도라고 해야겠다. 떠나기 전에 여행을 준비
“봉준호는 마침내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현대 사회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담아낸 걸작” 이는 칸영화제에서의 영화 ‘기생충’에 대한 평가이다. 사실, 영화 보는 것을 즐기기는 하지만 평론가와 같은 날카로움도 없고, 풍성한 해석도 할 줄 모른다. 그런 나에게는 이 표현이 그저 흔히 있는 코멘트로 보였다. 영화를 ‘잘 알지는 못하는(영화를 읽어내기보다는 느끼고 즐기는)’ 일반 대중 관객으로서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는 영화는 난해하거나, 지루하거나, 복잡하거나, 대단한 의미를 품고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걱정의 뿌리였다. 특히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를 가장 좋아하는 팬으로서 화려한 축제에서 번쩍이는 상을 받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기대감을 낮췄다.기우였다. 역시 봉준호는 실망시키지 않았다. ‘봉준호가 하나의 장르’라는 표현은 화려한 미사여구로 포장한 오글거리는 극찬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영화와 감독을 가장 적확하게 묘사한 것이었다. 드라마와 코미디로 시작한 영화는 어느 순간 공포와 스릴러물로 변신하는 듯하더니, 또다시 범죄와 성인물을 아슬아슬하게 건드리다가 시대극 혹은 다큐멘터리로 끝이 난다
‘산업혁명’과 같은 용어는 과거의 역사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다. 우리는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까지 서서히 발전한 사회를 사실과는 다르게 급진적인 의미의 ‘혁명’으로 이름 붙였다. 이처럼 용어라는 틀이 역사적 사실조차 오도하는 경향이 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프레임을 만든 현재에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알지만, 어떻게 나아갈지에 대해서는 쉽게 예측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공지능 시대와 초연결 사회로 나아갈 때 발생하는 걸림돌을 잘 제거한 후 명확한 ‘방향성’을 설정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16세기 종교 개혁과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직업과 일의 가치는 지속해서 높아져 왔다. 일은 과거의 생계를 위한 도구적 가치를 넘어 자아실현을 이루는 디딤돌로 의미가 확장됐다. 이는 흔히 “꿈이 무엇이니?”라는 질문과 “되고 싶은 직업이 무엇이니?”라는 질문이 상통한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하지만 이제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함에 따라 기계가 인간의 여러 직업과 일을 대체하게 됐고 앞으로도 더 많이 인간의 일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1인당 노동생산성은 증가했고, 작은 투입량으로 높은 산출량을 얻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에 인간은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개·돼지로 보고 먹고살게만 해주면 된다.” 이는 2016년 7월 7일 당시 교육부 관료였던 나향욱 전 정책기획관이 신문기자들과의 식사자리에서 했던 말이다. 이 발언이 공개되자 국민들은 분노했고 나향욱 전 기획관은 파면 처분 당했다. 이후 나 전 기획관은 파면에 불복해 낸 소송에서 승소했다.나는 당시 국민들의 들끓는 분노 표출에 의문을 가졌다. 고위관료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우리 국민들이 어떤 식으로 통제돼 왔는지 궁금증을 가진 사람은 극히 일부이고 대다수는 그저 분노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분 나쁜 말을 들어서 분노한 것이라면 지나치게 단순한 게 아닌가. 적어도 그 말을 왜 듣게 되었는지, 우리가 정말 개돼지처럼 다뤄지지는 않았는지 정도는 생각해봐야 했다. 우리는 나 전 기획관에게만 분노해서는 안됐다. 저런 소리를 듣고도 분노밖에 하지 않는 우리자신도 돌이켜봐야 한다. 영화 대사나 고위관료의 말처럼 우리는 이제껏 개돼지로 취급되어 왔다. 우리의 반응이 개돼지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우리가 알아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그 것을 원치 않는 세력들은 방송과 신문, 기자들로 하여금 다른 자극적인 먹이들을 우리
‘레알이다’, ‘리얼하다’는 우리가 평소 흔히 접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리얼리티(reality)’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리얼리티라는 단어를 흔히 ‘외관이 닮은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이나 트롱프뢰유(trompe-l’oeil)한 작품을 접할 때 ‘진짜 같다’고 여기지만, 반면 큐비즘(cubism)이나 인상주의 작품을 접할 때 그렇지 않음을 느끼는 것이 있다. 이처럼 우리가 ‘외관이 닮은 것’을 기준으로 ‘리얼리티’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인류가 자연에 대한 광학적 투사에 매력을 느끼며, 그러한 그림 또는 세계가 자연과 같다는 것에 동의하거나 거의 그렇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오직 외관이 닮은 것만이 진정한 리얼리티를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다, 사전에서도 리얼리티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 ‘겉보기만 그런 것이 아닌 진짜’라는 의미를 명시한다. 영국의 표현주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미지는 가능한 정확하게 창조자의 ‘신경계’에서 나와야 하며, 이미지는 관람자의 ‘신경계’에 호소해야 한다”고 말한다. 베이컨은 ‘이미지는 눈과 연관되어 있으며, 리얼리티도 그곳에서 나온다’는 통
나는 대학생이다. 꿈이 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럼 대체 무엇을 위해서 사냐고 묻는다면 아주 숨이 턱턱 막힌다. 요즘 누군가가 나를 향해 나의 미래에 대한 질문을 하면 화가 먼저 치밀어 오른다. 묻는 사람이 미워서도 아니고, 그가 내 미래에 참견해서도 아니다. 내 미래에 답이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답이 있긴 있다. 바로 회사원, 공무원이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답으로 여기는 것들, 그게 왜 내 꿈일까. 초등학생일 때만 해도 서로의 꿈은 다양했다. 누구든 자신의 꿈을 자신 있게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있었으며, 뭐든지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소 비현실적이지만 미래를 꿈꾸는 모든 순간은 행복할 수 있었다. 나의 초등학생 시절을 돌아보기만 해도 꿈이 많아 뭘 적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많았지 꿈이 없어서 지어내 본 적은 없었다. 축구를 못했지만 축구 선수도 해 보고 싶었고, 법이 뭔지도 몰랐지만 변호사가 되어 약한 사람을 도와주고 싶었다. 친구들이 나의 유쾌한 모습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개그맨이 되고 싶기도 했다. 지금과 달리 예전엔 하고 싶은 게 많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미래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