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명, 지난달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엔(UN)이 집계한 민간인 사상자 수다. 대부분 로켓, 미사일 등의 폭발 공격을 당했다고 한다. 곧 벚꽃 필 날씨의 따사로운 한국에서는 실감이 안 되는 이야기다. 막연하게, 1922년도 아닌 2022년에 기어이 무력 전쟁을 벌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비난하고, 서방의 우크라이나 원조를 칭찬하지만 그뿐이다. 어쩌면 물리적인 거리가 있어서, 우리나라 국내 정치만으로도 충분히 소란해서, 또 어쩌면 지구상 전쟁 중인 국가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만은 아니라서, 이래저래 댈 수 있는 그럴싸한 핑계는 많다. ‘1,400’이라는 숫자만으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폭탄에 맞아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어려울 법하다.그렇다면 다른 숫자를 제시해 보자. 2억 2천만 원, 저렴한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값이다. 이 큰돈이 제주의 한 수출업체에서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러시아로 수출한 감귤 대금이다. 침공 이후 러시아 은행이 국제은행 간 결제 망에서 배제되었고, 러시아 측에서는 우리나라 회사에 돈을 보낼 방도가 없다고 한다. 회사 한 곳의 문제가 아니다. 전쟁 상황이 길어져서 이러한 러시아 금융제재, 물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거리마다 출마 후보자들의 얼굴과 기호를 알리는 현수막이 빽빽하게 걸려 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은 연일 고점을 찍는 코로나 환자 수와 오로지 승부에만 집착하는 대선 후보자들의 광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몇 달 전부터 주요 정당의 후보자들은 전국을 동분서주하며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한 다양한 공약을 내놓았다.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다른 어느 선거보다 여·야 및 기타 후보자들이 모두 청년층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쏟아내는 청년을 위한 공약에 대해 청년들은 “대선 후보자들의 청년 공약은 구체적인 확인과 검증이 어렵고, 대선 후보들의 정책이 현실 가능성이 아주 낮다”라고 평가하였다. 대선 후보자들의 청년을 위한 공약 발표가 나올수록 청년들에게는 희망보다는 오히려 절망감과 좌절감을 안겨주고 있다.여야를 막론한 대선후보들은 청년 정책에 공통으로 ‘공정’을 외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외친 공정에 반하는 말로는 ‘반칙과 특권’ ‘심한 경제적 격차와 사회 양극화’ ‘기득권 세력의 공정성 방치로 기회 부족의 사회’ ‘취업과 주거의 불평등과 불공정’ ‘부모의 지위 세습’ 등이 있다. 이는 세계 경
바야흐로 종이의 위기 시대다. “학생들이 학교 신문을 안 읽어요”, 이 문제는 2000년대 초반 이후부터 약 20년간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인터넷, 모바일의 등장 이후로 종이신문은 힘을 잃었다. 기성 언론도 종이신문의 부수를 점점 더 줄여가며 포털 사이트의 CP, 뉴스스탠드 선정에 매달리는 형국에, 대학 언론이라고 종이신문을 살릴 뾰족한 묘수는 없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구 절벽 현상이 심각해지며 종이의 위기뿐만 아니라 대학의 위기까지 찾아왔다. 게다가 끝없는 코로나19 변이 바이러스로 인해 사회의 움직임 또한 3년째 둔화하였고, 이러한 배경에서 종이의 자리는 더욱 줄어들어 비대면 영상, 가상공간의 시장이 그 자리를 새롭게 차지했다. 전례 없던 사중고를 껴안은 대학 언론, 이 시대에 대학 언론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근본적으로는 대학 언론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부분으로 돌아가야 한다. 대학 언론, 말 그대로 대학에 관한 글이나 생각을 발표하는 활동이다. ‘대학에 관한’이라는 부분의 해석은 판이한 듯하다. 누군가는 학교의 긍정적인 측면, 새로운 시도를 알려서 홍보할 수 있는 소식들을 뉴스에 가깝다 여길 것이고, 누군가는 보도자료에 의존하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미래를 점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청년들의 미래를 말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청년들의 힘겨운 삶이 최대의 사회적 관심사로 떠 오른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현 정부가 청년들과의 소통을 중심으로 그들의 고용과 생활안정 등을 위한 정책을 다방면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한 점도 있지만, 청년들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더 많은 좌절과 절망을 안겨다주었다. 청년들은 현 정부의 청년정책 비판과 더불어 정권이양에 더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 여론조사에서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 정부는 우리 경제를 이끌고 나갈 핵심 인력양성을 위한 ‘인재양성 정책 혁신방안’을 발표하였다. 이도 과학기술발전에 따른 인재 수급 정책으로 전락하여 정책선언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현재 청년들의 불안한 삶의 요인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심화, 청년들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 부족, 세계적인 인플레 현상과 성장둔화에 따른 일자리 부족, 부동산 폭등, 기후재앙 등의 자본주의의 구조적 요인들에 기인하고 있다. 정부는 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청년들을 위한 노동시장을 개편해야 할 것이고, 노동시장으로의 진입하는 장벽을
연말까지 도서관에서 이어질 “75+100” 특별사진전은 경북대와 옛 상주대의 기억뿐 아니라 오늘날 대학의 가치와 역할 변화도 함께 되새길 기회이다. 팬데믹 시대, 대학의 외양과 역할이 10년 후, 20년 후면 급변해 있을 것이라는 인식은 누구나 공유한다.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고 그러면서도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판단도 마찬가지이다. 정치언어를 넘어 우리의 일상을 규정하는 혁신과 균형, 2021년을 넘기는 우리 대학에서도 중요한 화두이다. 외부의 관점에서 올해 경북대의 변화가 눈에 띈다. 국내외 다양한 대학평가에서 순위가 대체로 상승했다. 2022 QS 아시아 대학평가에서 처음으로 아시아 93위(국내 13위, 국립대 1위)로 올라섰고, THE 세계대학 평가는 601-800위권(국내 12위, 국립대 1위) 등으로 선전했다. 특히 공공성과 지속가능발전에 중점을 두는 THE 대학 영향력 평가에서 세계 54위, 연세대에 이어 국내 2위를 기록함으로써 우리 대학의 강점과 역할이 어디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랭킹 평가 외에, 여러 재정지원사업, 집단연구사업 등에서 예년 수준을 훨씬 넘는 돈을 “만들어” 학교로 들여왔다. 그럼에도 많은 학생들이 서울 쪽의 중상
코로나19 사태가 발발한 지 어느덧 1년 이상이 지났다. 팬데믹 속에서 시작된 비대면 문화는 이제 SF 소설에나 등장하는 특별한 일이 아닌, 우리의 일상적이고 익숙한 일이 됐다. 기업은 비대면 회의, 재택근무 등을 활발하게 시행하며, 정부는 비대면 서비스를 적극 지원하고 관련 분야의 기술을 중점 개발할 것을 공언했다. 대학 역시 비대면 수업 중심의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단계적 일상회복이 언급되지만, 한 번 자리 잡은 비대면 문화를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들어내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이런 가운데 이화여자대학교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비대면 수업이 등장했다. 바로 메타버스 플랫폼을 이용한 것이다. 교수자는 가상공간을 학과 강의실과 비슷한 환경으로 꾸며놓고, 여기에 접속한 학생들은 가상공간을 돌아다니며 영상회의로 수업을 들으며 다른 학생들과 소그룹 활동을 하기도 한다. 이 수업만의 일이 아니다. 전남대학교는 2021년 2학기부터 ‘메타버스 캠퍼스 기획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메타버스 기반의 가상캠퍼스를 구축해서 수업, 축제, 학교 행사를 비대면으로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순천향대학교는 이미 2021년 신입생 입학식을 메타버스에서 진행했으며, 건국대학교는 메타버스 공간에서
한글날은 한글이 창제된 것을 기념하는 날로,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널리 알리고 기리는 날이다. 문자인 ‘한글’과 ‘한국어’는 별개이지만, 한글날이면 한국어 사용에 대한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한국어를 제대로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지 ‘Republic of Korea’에 살고 있는지 의심이 간다. 방송 매체에 나오는 말들과 행정 용어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말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지 않아 민망하기 짝이 없다. 물론 방송 매체의 경우, 다양한 시각 효과와 시청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소재로 자막을 사용하여 흥미를 돋우기도 한다. 다만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이 문제다. ‘Aㅏ(아)’, ‘노우 The 뼈(아니 뼈야)’, ‘Pa스Ta(파스타)’, ‘RGRG(알지 알지)’, ‘so 당황(적잖이 당황)’ 등 괄호 안의 내용처럼 한글이나 한국어로 적어도 이해 가능한 내용을 굳이 영어나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방송 매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치단체의 정책 방향을 드러내는 데에도 ‘I SEOUL U’(서울), ‘Colorful Daegu’(대구), ‘Dynamic Busan’(부산) 등과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신체 능력이 떨어져 생존경쟁에 매우 불리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다른 동물을 가축으로 길들이고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하고 있다. 신체 능력이 열등한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생존경쟁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하이젠베르크는 그 답을 “언어”에서 찾았다. 하이젠베르크에 의하면 언어는 개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 발달한 능력이자 그 사이의 관계망이다. 즉 개체로서는 무력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세계를 더 잘 파악하고 그에 더 기민하게 적응할 수 있는 힘은 언어를 통해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서로 주고받는 앎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우리가 대학에서 배우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나와 다른 다양한 존재들을 마주하고 그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이를 통해 자신의 경험 세계를 확장시켜 나간다. 중고등학교까지는 비교적 한정적인 지역에 사는 또래들을 만나는 데 반해, 대학은 우리의 인간관계를 크게 뒤섞는다. 이렇게 대학에서 경험하는 이질적인 존재와의 상호관계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대학은 단순히 전문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