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의 대구 풍경을 담은 사진이 있다. ‘아담’이라는 이름의 미국인 선교사가 1954년부터 1955년까지 대구에 머물면서 찍은 이 사진에는 그 시절 대구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1954년은 한국전쟁이 끝난 바로 다음 해였다. 대구는 전쟁의 포화를 직접 겪지 않아서 전국 곳곳에서 몰려든 피난민들로 북적댔고 다른 도시보다 빨리 재건을 향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사진에는 이 움직임이 그대로 담겨 있다. 문을 연 서문시장의 포목점들, 교모를 쓰고 줄지어 서 있는 학생들, 물을 받으러 나온 중년 여인들. 미군이 주는 배급을 얻기 위해 올망졸망 미군들 앞에 모여선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전쟁의 상흔을 보여주는 듯해서 안타깝기도 하지만 잃어버렸던 일상이 활기차게 시작되고 있었다.『경대학보』가 발행된 것은 국가 재건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던 1954년 12월이다. ‘학보’라고 해서 지금과 같은 신문이 아니라 291쪽이나 되는 분량으로 이루어진 종합학술지였다. 당시 경북대학교는 농과대학, 문리과대학, 사범대학, 법정대학, 의과대학 등 모두 5개 단과대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 단과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이 쓴 학술적 글이 『경대학보』의 주를 이루고 있다. 독자들에게 틈
1952년 5월 28일 경북대학교가 산격동에서 개교하였다. 6.25 전쟁 중에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수백만 명의 피난민이 대구와 부산 그리고 그 주변으로 밀려왔다, 낙동강 방어선을 겨우 지키게 되었다. 대구는 다행히 폐허는 면했다. 산격동 일대는 판잣집이 즐비한 피난민촌으로 탈바꿈하였다. 대학 캠퍼스도 미국의 원조물자로 지어진 판잣집 강의실에서 겨우 강의가 진행되는 실정이었다. (사진 1. 1950년대 본관 가건물)생물학과의 양인석 교수는 식물분류학자로서 제자들과 함께 전국의 산과 들로 자연을 찾아 식물 종의 분포를 조사하고 표본을 채집하여 문헌 자료를 분석하고 신종을 찾는 등 활동을 하였다. 분류학 분야는 값비싼 분석 측정장치 등 설비가 없어도 최소한 연구수행이 가능하여 다행이었다.생물학은 전공과목을 크게 식물학, 동물학, 미생물학의 세 분야로 나누고 있다. 세 분야의 세분된 전공은 분류학, 형태학, 생리학, 유전학, 생태학, 생화학 등이 있다. 최근에는 특히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 등이 활발한 연구발전을 성취하여 인류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자연과학 분야는 필수적으로 실험실 시설과 측정기기의 설비 등이 필요하지만 재정적 한계로 인해 갖추지 못하여 애로가 많
대구의학전문학교는 1923년 설립된 대구자혜의원 부속 사립의학강습소(1년 후 도립으로 개편)를 모체로 1933년 설립된 공립전문학교이다. 해방 후 대구의과대학으로 그 역사가 이어졌으며 오늘날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이 된다. 대구자혜의원 부속 사립의학강습소는 1923년 7월 대구자혜의원 의관 요시다 준이치로(吉田準一郞)의 설립 청원에 대하여 경상북도지사 사와다 토오죠(澤田豊丈)가 응하여 설립된 것으로 공식 기록되어 있다. 일본인이 의학교육기관 설립을 주도하고 운영에 대거 참여하였지만, 한국인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우선 대구의학전문학교 설치를 위한 운동에 대구상업회의소를 중심으로 장직상(張稷相), 한익동(韓翼東), 서병조(徐丙朝), 이장우(李章雨) 등 한국인들을 포함한 지역 유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총독부의원 의학강습소 및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생들 중심으로 대구자혜의원, 이후 대구도립의원에 근무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더 높은 직급의 의관(醫官)보다 의원(醫員) 또는 조수(助手)의 자격으로 출발하였고 대체로 근무 기간도 짧았으나, 1913년부터 설치한 간호부조산부양성소, 이후 의학강습소 교육에도 관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최초로 대구자혜의
여기까지는 우리가 잘 아는 사범대학 이야기사범대학은 1923년 4월 「경상북도공립사범학교」로 출범했다. 1910년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일본은 조선에 사범학교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더 많은 일본인들을 교사로 초빙하기 시작했다. 삼일운동 후 높아지는 근대식 학교교육에 대한 열망은 이내 교사부족 현상을 불러왔다. 그 결과 1922년에 관립 경성사범학교를 필두로 1923년부터 각 지역마다 공립사범학교 설립이 허가되었고, 대구에도 1923년 4월 경상북도공립사범학교가 개교했다. 그리고 1929년, 조선총독부는 다시 사범학교 정책을 바꾸어 지역의 공립사범학교를 모두 없애기로 했다. 대신 관립학교였던 경성사범학교와 함께 평양과 대구에만 관립사범학교를 남겨두었다. 경상북도공립사범학교는 5년제 중등학교인 관립 대구사범학교로 개편되었다. 하지만 각 지역에 있던 사범학교들을 폐교시켰으니, 닥쳐올 교사부족 현상은 명약관화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다시 지역마다 관립사범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고, 해방 직전에 경성(1943년), 평양, 대구(1944년)의 사범학교는 다른 사범학교와 달리 오늘날 고등교육기관에 해당하는 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대구가 교육도시라는 이미지가 생긴 것도
본관 앞에는 우리 대학의 자랑거리인 야외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를 조성한 제4대 계철순 총장의 호를 따서 월파원(月坡園)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승탑 2기를 비롯하여 대구·경북 각지에서 수집한 불상, 석탑, 비석, 문인석, 주춧돌 등 백 수십 점의 석조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외 박물관의 하나인 이곳에는 크고 잘 생긴 삼층석탑 1기가 서 있다. 달성군 화원면 천내동 4구에서 옮겨온 전 인흥사지 삼층석탑이 그것이다. 인흥사의 창건 시기는 잘 알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관련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층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대략 신라말·고려초 무렵 창건된 사찰로 생각된다. 이곳을 인흥사지로 확정할 수 있다면, 우리 민족 최고의 고전인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1206-1289)이 머문 현장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명은 일연 입적 후 그의 문도들이 고려 충렬왕 21년(1295)에 세운 비석이다. 이에 따르면, 일연은 1264년 가을 서울에서 내려와 포항 오어사에 잠시 머물다가, 인홍사 주지 만회가 자리를 양보함에 따라 이곳에 주석하게 되었다. 이때 그를 따르는 학승들이 구름처럼 모여들
저수지(貯水池)의 분수탑기록관에서 현재의 “일청담” 모습과 전혀 다른 사진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1963년 3월 21일 발행 “경북대학보”(현재의 “경북대신문” 이하 “학보”로 표기) 1면에 물보라를 분출하고 있는 분수탑 사진과 “자유·정의·진리의 표상=분수탑”! 이라는 사진 설명도 찾아볼 수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사진 1) 재학시절 가끔 쳐다보던 “분수탑” 모습이었다. 지금의 일청담의 분수대는 5개 단과대학이 쏟아지는 물벼락을 맞고 있는 모습이다. 일청담은 경북대의 상징적 수경시설이다. 일청담 표지석에 일청 하영수(河泳洙) 씨의 찬조로 준공하였다고 음각되어 있다. 당시 “학보”에는 “일청담”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기사가 없다. 장기간에 걸친 공사 후, 하영수 씨의 찬조로 일청담을 만들었다는 표지석을 세운 것 같 같다. “학보” 기사(1962.6.14.)는, 지금의 일청담 위치에 이미 있던 웅덩이의 지하수(地下水)가 부족하여 실습용 논(테니스장 농구장 지역) 관리에 어려움이 있어서, 웅덩이를 더 깊이 파서, 경북대 모표(감꽃 첨성대) 형태의 저수지(貯水池)를 만들고 분수탑도 세운다고 하였다. 서울대는 분수탑을 설치한 적이 없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면학 분위
지금으로부터 49년 전인 1973년 10월 17일에 본교 국제교류의 시작인 뉴욕주립 버팔로대학교와의 자매결연식이 있었다.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학의 규모와 연구 인력이 늘어남에 따라 학술활동의 국제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이 시기 본교를 국제적인 대학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첫걸음이 뉴욕주립 버팔로대학교(Th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Buffalo)와의 자매결연(1973)이다. 그 시작과 과정, 성과는 이랬다. 당시 본교 김영희 총장은 1972년 8월 미국무성의 초청으로 미국 교육 문화 시찰차 방미, 그 기간 중에 뉴욕주립 버팔로대학을 방문하여 경북대학교와 버팔로대학교 간의 자매결연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귀국 후에도 이 일을 계속 추진하여 1973년 1월에 버팔로대학으로 공식적인 편지를 보내어 양교 간의 자매관계 수립의 가능성에 대한 의견을 타진하였다. 이에 대하여 버팔로대학은 1973년 2월 본교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본교는 그 실현을 위한 준비로, 양교(兩校) 자매결연 추진위원회를 대학원 내에 설치하여 그해 3월에 『교수의 교환, 연구자료의 교환, 협동연구, 연구기자재의 기증, 대학원생의 교환, 학생 간의
경북대학교는 2001년 9월에 ‘국제교류담당관’이라는 직제를 설립하여 재학생과 교직원의 국제교류에 관한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 후 국제교류원이라는 대학본부의 한 조직으로 운영되었으며, 국제교류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국제교류처로 변경돼 현재의 형태를 띠고 있다. 국제교류원이나 국제교류본부에서 국제처 혹은 국제교류처로 바꾸는 추세는 경북대학교뿐 아니라 상당수 국내 대학교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한국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한국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해외 학생들의 수요가 증가함을 나타내며, 예전에 국내 학생을 해외로 보내는 업무와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은 경북대학교 재학생이 국제화 역량을 왜 배양해야 하는가이다. 학생들은 4년이라는 길다면 길지만 짧은 시간 동안 본인이 희망하는 진로를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므로 효율적인 시간 배분이 필요하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국제화 역량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가장 먼저 드러나는 부분은 토익(TOEIC) 점수로 대변되는 어학능력일 것이다. 10년, 20년 전과 비교하면 토익의 중요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겠지만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어학능력과 같은 국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