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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기록관-우리가 몰랐던 경북대 이야기

39. 농위국본(農爲國本), 먹방과 다이어트라는 일상의 바탕

“나, 콩 죽으면, 졸업 못 해. 연구실 지켜야 해. 잠도 못 자.”
농업생명과학대학의 약사를 정리해서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언뜻 떠오른 말이다. 1990년대 말 어느 해 추석 연휴의 전날, 농생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던 고등학교 동기를 인문대 근처에서 우연히 만나 언제 고향에 갈 거냐고 물었더니, 그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까마득한 기억 속에서 아, 그 콩은 무사했을까, 그이는 논문을 썼을까, 어저께 먹은 순두부찌개는 그이가 애써 가꾼 그 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념이 떠돈다. 농업, 생명, 과학이라는 본질적이고도 존재론적인 거대 담론은 이렇게 살포시 지근한 삶의 한 자락으로 내려앉았다.
먹방과 다이어트가 공존하면서 한 끼의 소중함과 덧없음이 치열하게 얽히고설킨 사이에 우리는 본질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삶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길을 잃었을 때는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법이다. 거기에 ‘농위국본(農爲國本)’, 이 한마디가 있다. 농업이, 농사가, 농부가 그리고 이를 연구하는 일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이다. 농대 2호관 앞 우뚝한 돌에 새겨진 묵직한 한마디, 농업생명과학대학을 지탱하고 경북대를 받치는 그 한마디의 무게는 1943년 12월 1일 대구 농림학교가 설립 인가받은 데서 시작한다. 
설립 인가받은 뒤 대구 농림학교는 1944년 4월 1일 전문학교령에 따라 대구농업전문학교(3년제)로 개칭되어 1944년 4월 30일 농학과 50명, 농예화학과 50명을 모집하여 개교하였다. 시작은 순조로웠으나,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경북대학교 농과대학으로 자리 잡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인 교수진과 학생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대구농업전문학교는 경제적 어려움마저 겪는다. 이에 미군정청이 그나마 형편이 나았던 수원 농림전문학교로 옮겨 수강하게 하여 수원에 ‘대구농업전문학교’ 현판을 걸었다. 강의동 하나에 두 학교가 있는 꼴이었다.
지역 유수의 고등교육기관을 수원으로 보낸 것이 지역의 수치라 하여 대구에서는 대구농업전문학교 재건 운동을 전개하였고, 1946년 3월 대구농업전문학교는 다시 대구로 이전하였다. 그해 6월 인재의 양성이 절실하다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4년제 국립 대구 농과대학으로 개편하였다가 1947년 9월 2년제로 개편하였다.
체제가 정비되었으나 인재 양성의 열매를 맺기까지 또 다른 난관이 있었다. 바로 교사(校舍)였다. 교수진도 갖추고 학생도 뽑았으나, 그들을 가르칠 공간이 문제였다.
1946년 3월 대구로 돌아온 대구 농과대학은 구 대구중학교 교사(현 남구 봉덕동 미8군 주둔지)에서 재출발하였다. 그것도 잠시 그 교사를 미군이 접수하자 1948년 2월 일제강점기 일본인 전용 국민학교로 사용하였던 현 종로초등학교로 이전한다. 본 교사가 없어 떠돌던 대구 농과대학은 1949년 5월 대구시 하동(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수성동)에 있었던 학교 실습농장의 일부(현 대구광역시 교육위원회 위치)에 본관과 부속건물을 착공하였고, 1950년 봄에 완공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1949년 8월 대구고등법원과 지방법원 건물이 화재로 소실하여 갑자기 종로초등학교 이전하자, 건축 중인 본 교사의 일부를 긴급 완공하고 잠사시험장의 창고(현 대구은행본점 북편의 화성쌍용타운)를 빌려 교사로 사용하였다. 그러다 1950년 4월 마침내 신축 교사를 완공하여 대구 농과대학은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였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교사가 육군 제1 교육대에 징발되면서 대구 농과대학은 1950년 7월 대구시 대봉동 소재 편창제사주식회사 건물의 일부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1개월도 채 되지 않아 또다시 군에 징발되어 강의를 중단하였다. 그런 속에서도 학문의 열정은 뜨거웠기에 1951년 2월 삼덕동에 있던 대학 학장님의 공관과 거기에 인접한 교수님 숙소의 방을 빌려 밥상을 책상 삼아 강의를 재개하였다.
그런 노력 덕분에 1951년 7월 대구 농과대학은 다시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하였고, 그해 10월 6일 기존의 대구 농과대학, 대구사범대학, 대구 의과대학에 문리과대학, 법과대학을 새로 설립하여 국립경북대학교가 설립 인가받으면서 대구 농과대학은 1952년 4월 1일 국립경북대학교 농과대학으로 새 출발 하였다. 
기존의 농학과와 농예화학과에 원예학과를 신설하여 3개 학과로 출발한 국립경북대학교 농과대학은 이후 학과의 신설과 통폐합, 학과 개칭 등의 과정을 거쳐 현재 4개의 학부와 5개 학과로 이루어진 명문대학으로 성장하였으니, 여명기의 고난이 이제 열매를 맺었다 할 수 있다. 
이런 성장의 바탕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학문을 이어가고자 했던 열정과 ‘농위국본’의 마음이 깔려있다. 이 마음이 그이에게 명절 연휴도 반납하고 연구실에서 밤을 새우게 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2020년 사료를 포함한 곡물자급률 20.2%, 2021년 식량안보지수는 113개국 중 29위 수준임에도 일상을 일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바탕에는 이런 수많은 불면의 밤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먹방과 다이어트의 무심하고 안락한(?)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것은 농생명대 수많은 그이에게 진 빚이다.
된장찌개 한 술에 그이의 말이 맴돈다.
“나, 콩 죽으면, 졸업 못 해. 연구실 지켜야 해. 잠도 못 자.”


▲농과대학전신 - 대구농업전문대학(1944)


▲농업생명과학대학전경(1996년 4월)

백운용 강사
(인문대 국어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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