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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기록관-우리가 몰랐던 경북대 이야기

36. 대구의학전문학교의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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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학전문학교는 1923년 설립된 대구자혜의원 부속 사립의학강습소(1년 후 도립으로 개편)를 모체로 1933년 설립된 공립전문학교이다. 해방 후 대구의과대학으로 그 역사가 이어졌으며 오늘날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이 된다. 대구자혜의원 부속 사립의학강습소는 1923년 7월 대구자혜의원 의관 요시다 준이치로(吉田準一郞)의 설립 청원에 대하여 경상북도지사 사와다 토오죠(澤田豊丈)가 응하여 설립된 것으로 공식 기록되어 있다.  일본인이 의학교육기관 설립을 주도하고 운영에 대거 참여하였지만, 한국인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우선 대구의학전문학교 설치를 위한 운동에 대구상업회의소를 중심으로 장직상(張稷相), 한익동(韓翼東), 서병조(徐丙朝), 이장우(李章雨) 등 한국인들을 포함한 지역 유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총독부의원 의학강습소 및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생들 중심으로 대구자혜의원, 이후 대구도립의원에 근무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더 높은 직급의 의관(醫官)보다 의원(醫員) 또는 조수(助手)의 자격으로 출발하였고 대체로 근무 기간도 짧았으나, 1913년부터 설치한 간호부조산부양성소, 이후 의학강습소 교육에도 관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최초로 대구자혜의원에 근무한 황윤(黃潤), 1917년 조수로 근무한 박영우(朴永祐)는 각각 1912년, 1913년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를 졸업하였다. 한국인으로서 대구자혜의원 초기에 가장 장기간 근무한 사례는 최일문(崔日文)으로서, 1916년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를 졸업하고 1918년부터 근무하여 한국인 최초로 1926년 대구자혜의원 의관까지 역임하였으나, 의관이 된 지 1개월 후 3월에 사임하였다. 한국인으로서 당시 자혜의원 의관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보여주는 예이다. 최일문은 외과 전공으로 대구의학전문학교에서도 강사 일을 하였는데, 도쿄제국대학에서 세균학, 일반외과학 연구를 수행하고 1927년 6월 『水癌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받는 등 남다른 학구적 성취를 일군 입지전적 인물이었으며, 대구의 유명인사였다. 대구자혜의원과 대구의전 일을 그만둔 후 부산 백제병원을 거쳐 대구에서 낙산병원(樂山病院)의 원장을 역임하였다. 
1923년 대구자혜의원 부속의학강습소가 개소한 후 대구자혜의원의 의관, 의원들이 강습소 교육에 관여하였는데, 오용천(吳龍天, 외과), 박원섭(朴元涉, 이비인후과), 강일영(姜日永, 이비인후과), 이귀흥(李貴興, 이비인후과), 서승해(徐昇海, 외과), 이희철(李熙徹, 내과) 등이 그들이다. 이 중 서승해(1926년 도쿄의학전문학교 졸업)를 제외하고는 모두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생이었다. 박원섭, 이귀흥, 이희철, 이중현 등은 모두 경북 출신이었으며, 도립의원을 그만둔 후에도 경북 지역에서 개업하는 등 지역 의료에 봉사하였다. 생리학에는 아이찌(愛知)의학전문학교 출신 박태환(朴泰煥)이 1929년 도립의학강습소 때부터 강사로 참여하였다. 그는 경상북도 김천 출신으로, 아이찌의학전문학교 후신 나고야(名古屋)의과대학에서 『血液循環時間測定에 관한 연구』 로 1932년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었다. 
의학강습소가 1933년 대구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면서 대구도립의원 의관을 중심으로 교수, 조교수들이 발령되었다. 박태환은 생리학 교수로, 서승해는 외과학 조교수로 각각 발령받았으며 그 외 한국어 강사로 대구사범학교 교사인 김영기(金永驥)가 부임하였다. 이듬해 4월 10일에는 이비인후과 겸임강사로 이명훈(李明薰)이 부임하였는데, 1년 후 5월 14일 조교수로 승진하였다. 그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출신으로, 이후 사리원도립의원 이비인후과 과장을 역임하게 된다. 그 외에도 내과학에 정하택(鄭夏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1932년 졸업), 최덕생(崔德生,대구의학전문학교 1933년 졸업), 배종호(裵鍾鎬, 대구의학전문학교 1938년 졸업), 이비인후과학에는 권길채(權吉采,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1935년 졸업), 산부인과학에는 이칠희(李七熙, 대구의학전문학교 1937년 졸업)이 조교수로 발령받았다.
정하택은 경성제국대학 재학시절 조선공산당 재건그룹과 함께 조직된 경성제국대학 반제동맹에 참여한 일원으로서 만주사변 발발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중 박태환을 제외하고는 근무기간이 길지는 못하였다. 서승해와 정하택은 3년, 이명훈과 권길태는 각각 1, 2년 남짓이었다. 최덕생은 대구의학전문학교 출신으로 최초로 1938년 조교수에 임명되었고, 1941년까지 근무하면서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다. 배종호, 이칠희는 해방 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제3대 학장과 제4대 학장을 역임하였다. 배종호와 이칠희는 모두 해방 전 각각 나고야제국대학, 나가사기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해방 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모교 교육의 길에 헌신하였다. 
대구의학전문학교는 부속의학강습소 시절부터 1945년까지 총 84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 중 한국인은 274명이었고 전체 비율은 32%에 해당하였다. 대체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포함한 의학전문학교의 졸업생 중 일본인 대 한국인이 2대 1의 비율이었던 것과 비슷하였다. 심한 한국인 차별 속에서 교수나 의관으로 남기 어려웠던 점도 당시 의학전문학교 조선인이라면 모두 겪는 공통적인 설움이었다. 이 중 김진동(金振東), 최성태(崔聖泰), 이종주(李鍾周), 김해수(金海守), 정덕용(鄭悳鎔) 등 도립대구의원 의원으로, 또 대구의학전문학교 각 교실의 조수로 근무하며 학업과 수련의 길을 계속 이어간 이들도 많았다. 이주걸(李柱傑)처럼 나고야제국대학 의학부 외과에서 외과학을 전공하고 대구의전 졸업생 중 최초로 1943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은 인물도 있었다. 그는 제4대 학장을 역임하였다.
이렇듯 갖은 고난 속에도 대구의학전문학교에서 조수로, 또 의원으로 근무하며 다양하게 학업과 수련의 길을 쌓은 이들은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아직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이들의 이후 행로가 온전히 밝혀지지 않는 아쉬움이 아직 있으며, 추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일이다.


▲이희철 강사(1930년 대구의학강습소 졸업앨범)


▲서승해 강사(1930년 대구의학강습소 졸업앨범)


▲박태환 교수(1936년 대구의학전문학교 졸업앨범)

최은경 교수
(의과대학 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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