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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기록관-우리가 몰랐던 경북대 이야기

33. 월파원의 인흥사지 삼층석탑 -삼국유사를 찬술한 일연의 정기가 서린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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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앞에는 우리 대학의 자랑거리인 야외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를 조성한 제4대 계철순 총장의 호를 따서 월파원(月坡園)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승탑 2기를 비롯하여 대구·경북 각지에서 수집한 불상, 석탑, 비석, 문인석, 주춧돌 등 백 수십 점의 석조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외 박물관의 하나인 이곳에는 크고 잘 생긴 삼층석탑 1기가 서 있다. 달성군 화원면 천내동 4구에서 옮겨온 전 인흥사지 삼층석탑이 그것이다.

인흥사의 창건 시기는 잘 알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관련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층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대략 신라말·고려초 무렵 창건된 사찰로 생각된다. 이곳을 인흥사지로 확정할 수 있다면, 우리 민족 최고의 고전인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1206-1289)이 머문 현장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명은 일연 입적 후 그의 문도들이 고려 충렬왕 21년(1295)에 세운 비석이다. 이에 따르면, 일연은 1264년 가을 서울에서 내려와 포항 오어사에 잠시 머물다가, 인홍사 주지 만회가 자리를 양보함에 따라 이곳에 주석하게 되었다. 이때 그를 따르는 학승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1268년 여름에는 조정의 명으로 운해사에서 명망이 높은 교종·선종 승려 100명을 모아 대장(大藏) 낙성회를 개최하자 일연이 초청되어 행사를 주관하였다. 또한 인흥사에 머문 지 11년째 되던 해인 1275년경에는 낡은 법당을 고쳐 절을 새로 중창하니 충렬왕이 인흥(仁興)이라 이름을 고치고 몸소 제액을 써서 내려주었다. 그 뒤 일연은 청도 용천사를 거쳐 1277년에는 운문사에 주석하였다. 따라서 일연은 10년이 넘는 오랜 기간 인흥사에 머물렀다고 하겠다. 

이 석탑은 높이 4.31미터로 3층이며, 처음 경상북도 달성군 달서면 인흥동 신기(新基) 부락 부근 평야에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오늘날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에 해당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부유한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고미술품을 수집하게 되자 일부 몰지각한 모리배들이 야음을 틈타 전국 도처에서 옛 탑을 넘어뜨리고 그 속에 안치되어 있던 금동불 등을 훔쳐가는 일이 성행하였다. 이 무렵 이 석탑도 원형을 상실하고 무너졌고 처참한 폐탑으로 변해 논 가운데에 방치되었다. 

그러면 이 탑은 언제 어떻게 해서 우리 대학 박물관으로 오게 되었을까? 이는 당시 교학처장이자 법정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던 이종항 교수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는 신라문화의 발상지인 경주에 접한 대구에 살면서 경주를 답사하는 취미를 가졌으며, 대구 주변의 유적 유물의 조사에도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먼저 석탑을 주목하게 되었고, 이로써 인흥사 삼층석탑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조사 일지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제1회 답사는 1958년 6월 중순이었다. 모내기를 한 뒤라 충분한 조사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제2차 답사는 1959년 3월 18일(수) 오후였다. 현풍의 유물과 석빙고 등을 조사하기 위해 동국대 황수영 교수가 대구에 온 기회를 이용하였다. 이때의 조사단은 우리 대학 고병간 총장과 교학처장 이종항 교수, 경상북도 문화재계장, 달성교육장,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위원인 황수영 교수와 그를 환영하러 현풍에서 온 2명 등 모두 7명이었다. 2시에 대구를 떠나 2시 40분경 현장에 도착하였다. 

우선 석탑 부재의 망실 여부를 조사한바 제3 탑신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현장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논둑 축대의 일부로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하여 탑신과 옥개석이 완전함을 확인하였다. 석재가 논물 속에 방치되어 있어 석질이 급속도로 훼손되고 있었으므로 참석자 모두 경북대 박물관으로 옮길 것을 결의하였다.

그래서 문교부(오늘날의 교육부)에 석탑 이전에 대한 허락을 받기 위해 절차를 밟는 한편, 지방 유지의 양해를 구하기로 하였다. 3월 19일(목)에 우리 대학에서는 사무국장 나지강 씨를 파견하여 화원면장, 지서 주임, 기타 지방 유지들의 협조를 구하였다. 다음 날인 20일(금)에는 전 화원면장 박모 씨가 학교를 찾아와 동민들과 협의한 결과라면서 세 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석탑에 이르는 도중에 작은 돌다리가 있는데 여기에 놓인 석재가 석탑의 부재인 것 같으니 이를 철거할 경우에는 철근 콘크리트 다리를 건설해줄 것, 둘째는 탑재 운반에 따르는 농로 파괴와 보리 작물의 피해를 완전히 보상해줄 것, 셋째는 천내 동민에게 학교 당국에서 응분의 사례 ―현금 또는 기념사업― 를 해줄 것 등이었다. 이 가운데 첫째는 석탑 부재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고, 둘째는 이의 운반 시 피해가 있을 경우에는 당연히 원상복구 및 보상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요구조건에 대해서는 응할 수 없는 사정을 밝히고 거절하였다. 

이후 4월 2일(목)부터 14일(화)까지 순차적으로 석탑 부재 운반을 완료하고, 원래의 자리에는 “전 인흥사 석탑 유지(傳仁興寺石塔遺址)”라고 쓴 표석을 세웠다. 그러나 석재 운반 과정에서 인부 2명이 부상을 당하거나 골절상을 입어 우리 대학 부속병원에서 치료하였고, 인부들의 요청으로 사고방지를 위한 기제(祈祭)를 지내기도 했다. 석탑의 부재는 모두 30개로 되어 있었으나 2개가 없어져서 모두 28개를 운반하였다. 월파원 내 현재의 자리에 콘크리트 등으로 기초를 든든히 만들고, 그 위에 지대석을 얹고 석탑을 복원하였다. 이렇게 하여 4월 말경에 모든 공사가 완료되었다. 

아쉬운 점은 석탑 부재가 발견된 장소에서 사찰과 관련된 아무런 유물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탑을 중심으로 한 가람배치 등도 알 수 없었다. 부근에서는 사찰과 관련된 단 한 개의 초석도 보이지 않았으며 발견된 기와편도 극히 희소하였다. 인흥사는 조선 초기나 중기에 폐사되고 수백 년간 논으로 사용되면서 사찰의 흔적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월파원의 삼층석탑은 유래를 알 수 없는 무명 석탑이 아니라 역사를 간직한 석탑이었다. 처음 석탑이 서 있던 곳이 한때 일연이 머문 인흥사로 추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일연은 이 석탑을 보면서 삼국유사의 찬술을 준비하고 자료를 정리했던 것이 아닐까? 1959년 5월28일, 우리 대학 박물관은 막 이건한 이 석탑과 그간 모아 온 여러 유물들을 전시하며 개관하였다. 이 석탑을 찾아 유래를 밝히고, 이를 우리 대학에 옮겨 복원한 이종항 교수의 노력과 안목은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아름다운 추억이다.



▲석탑이 있던 자리에 설치한 표석



▲월파원의 인흥사지 삼층석탑



이영호 교수(인문대학 사학과, 영남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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