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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기록관-우리가 몰랐던 경북대 이야기

26. 국립대학교 교수의 봉급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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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 대학기록관 
교수들의 “봉급봉투”는 약 20년 전에 사라져, 지금은 역사적 유물이 되어버렸다. 젊은 교수님 중에는 봉급봉투의 용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수일 전 정우락 기록관 관장님으로부터 「경북대 기록관」이 보유하고 있는 교수님들의 급여 봉투를 일람(一覽)하고, 소회(所懷)를 적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처음에는 주저하였다. “교수”란 직업은 돈과 권력보다 백면서생의 이상을 추구하는 직업인지라, 검박(儉薄)한 생활도 마다하지 않는 교수님들에게 누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초대 기록관 관장 보직을 지낸 필자인지라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용기를 내었다.
필자가 1996년 4월 초, 도서관장 보직을 받고, 우리 대학과 관련된 기록 및 자료의 보관 상태를 확인해 보니, 도서관은 물론 우리 대학 내의 어느 기관에서도 본교 설립 관련 자료, 각종 간행물, 각종 보고서 및 행사 사진 등을 온전하게 보관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상위법(上位法)도 없었으나, 「대학사 자료관」 설치 준비 작업을 시작하였고, 국내·외 대학사 자료실(University Archives) 운영 실태도 확인해 보았다. 총장의 결재서류까지도 모두 중성지(中性紙) 상자에 보관하고 있던 하와이 주립대학의 대학 기록관(사진①)을 방문하여 실무자로부터 많은 조언도 받았다. 


사진① 1998년 하와이대학 기록관


1997년 12월 5일 독서광인 김대중 후보가 도서관을 방문하여 둘러본 후 방문록에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휘호를 남겼고, 당시 신관 지하층에 있었던, 식당에서 재학생들과 약 1시간 동안 대담(사진②)하면서, 지방대생의 취업난 해결책으로, 박찬석 총장이 주창한, 지역인재 할당제 그리고 공공문서 보존 대책 및 정보화(IT) 관련 벤처기업 육성 등을 공약하였다. 우리 대학 도서관 방문 1년 후, 1999년 1월, 김대중 정부가 「정부 기록물 관리법」을 공표하였고, 이 법에 근거하여 2000년 8월 「경북대 기록관」이 설치되었다. 


사진② 1997년 김대중 대통령 후보 도서관 방문


「경북대 기록관」은 다른 대학의 기록관과 달리, 우리 대학 독자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대학사 자료관」 기능을 겸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초대 기록관 관장 임기 동안, 대학의 모든 공문서와 교수님들이 보관하고 있던 각종 연구·교육 자료, 개인 기록과 각종 박물(博物)도 기증받아 보관하였다. 그러나 최근 기록관의 공간이 부족하여, 학교의 공식 문건들을 모두 인수하지 못한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박봉(薄俸)인 국립대 교수 월급
교수의 월급은 해당 교수의 학문적 능력과 가치를 금전적으로 평가한 비공개 개인 정보이다. 당연히 교수들은 자신의 정확한 월급 액수의 공개를 꺼린다. 또한, 국립대학교 교수들은 매월 받는 자신의 급여 액수를, 아마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필자는 1970년 후반, 영어교육과 출신 총장 덕에, 교수채용 영어 시험을 통과(?)하여 전임 교수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처음으로 받은 월급봉투에 표시된 실수령 액수가 “15만 원 이하”였다. 아뿔싸! 교수란 직업이 먹고 살기도 어려운 “빛 좋은 개살구”였던가? 필자와 비슷한 연배의 선임 교수가 빙그레 웃으면서 일갈! “월급이 15만 원도 안 될 줄 몰랐지요?”
1970년대 중엽 경북대 강사료가 시간당 600원, 영남대는 1,200원이어서, 필자는 생존을 위하여 영남대 대명동 야간부의 대형 강의와 효성여대 및 대구보건전문대학 등에 출강하여 한때 월 “15만 원 이상”의 강사료 수입이 있기도 하였다. “15만 원”은 당시 유명 사립대학교의 월급 액수의 절반도 안 되는 몸값이었다. 그래서인지, 유명 대학에서 석·박사 과정까지 모두 이수하고 수년간의 강사 생활을 거쳐, 40세 전·후에 본교 교수가 되었으나, 열악한 여건 탓에 유명 사립대학으로 떠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는 곧 국립대학교 교수의 급여가 매월 “15만 원 이하”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과급, 각종 수당 등이 비-정기적으로 지급되어 급여 액수가 다달이 다르고 직급마다 다르고, 간혹 누런 편지 봉투에 현금을 넣어 주는 이름 모를 특별 수당도 있어서, 신임교수의 평균 월수입 총액이 “15만 원 이하”는 아니었기는 하였으나, 박봉이었다. 그런데 국립대학 교수들에게, 간혹. 적지 않은(월급 대비) 국고 연구비가 지급되었고, 연구 및 자료 수집 목적으로 가족과 같이 외국 대학에서 장기간 연구할 수 있는 특혜도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 시대와 수당 3만 원 횡령(?) 사건
필자의 재학 당시(1960년대 초)에 진행된 한·일 회담은, 미국이 날조한 통킹만 사건(NSA의 특수 정보 악용)을 이용하여, 월남전 참전을 감행한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의 압력과 정치자금이 필요하였던 박정희 군사정권의 합작품이었다. 일본이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 “독도 밀약”을 포함한, 굴욕적인 한·일 회담에 대하여 본교에서도, 「현대사상연구회」가 주도한 한·일 회담 반대 시위 이후, 투석전과 최루탄 매연으로 교내·외가 소란스러웠다. 어떤 학기는 1개월 정도만 강의를 들은 적도 있었다. 이런 사태가 197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고, 1975.4.9.에는 본교 재학생 여정남(62학번)을 포함한 8명이 중앙정보부가 날조한 「민청학련」과 「인혁당」사건을 핑계로, 박정희 대통령이 감행한 “사법 살인”도 있었다. (2007.1.23. 무죄 판결)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는 박정희·전두환 군사반란 정권에 대한 과격한 반정부 시위로 학교가 자주 문을 닫기도 하고, 계엄령이 발령되기도 하였다. 드디어 화염병이 난무(亂舞)하고, 교수들은, 페퍼포그 차(가스 차/지랄탄 차)와 장갑차를 앞세운 전투경찰 혹은 해병대와 같이, 학생들이 학교에 들어오지 못하게, 학교 정문과 후문에서 보초를 서거나, 데모를 저지하거나 하였다. 그리고 문제 학생을 파악하여 선도하라는 지시와 제자들의 가정을 방문해 그 결과를 보고하라는 명령(?)도 받았다. 
당시 본교 재학생의 70% 이상이 농촌 출신들이어서, 다수의 학생이 학교 주변의 허름한 주택에서 자취(自炊)하기도 하였다. 당국자의 명령에 의거, 교수들이 자취생들에게 사전 연락도 없이 가정방문도 하였다. 아무튼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전두환 군부 독재 정권이었다. 흔히 단독 주택의 부엌이 딸린 문간방에서 자취하던 남학생들이, 여학생들보다 더 정갈하게(필자가 본 경우), 부엌의 각종 식사 도구들을 깨끗이 씻어서, 소형 목제 찬장에 가지런하게 정리해 두고, 태연히 공부하던 의외의 광경도 보았다. 이들 중에는 안기부, 경찰, 신문사, 방송사, 대기업 등의 공채시험을 통과한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군사정권이 교수들에게 부당한 잡무를 강요한 탓인지, 한동안 학교 당국은 현금 3만 원을 누런 편지 봉투에 넣어 교수들에게 지급하였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교수님 중에는 이 3만 원조차 사모님에게 모두 헌납하여, 그 사모님이 같은 아파트에 사시던 모 교수 부인에게 지난달에 받은 3만 원으로 00식당에서 푸짐한 가족외식을 하였다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누런 편지 봉투에 든 현금 3만 원을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사모님의 뚜껑이 열려, 말로 다 하지 못할 심각한 가내(家內) 전쟁이 일어났고, 이 지도비 횡령(?) 사건을 수습하느라 엄청나게 고생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도 있다. 
극우 쇼비니스트(chauvinist)이거나, 정치판을 기웃거리거나, 교내 보직만을 추구한 극히 일부 교수들을 제외하고, 반란 정권에 저항한 학생들의 용기를 나무라는 교수는 없었다. 

유물(遺物)이 된 월급봉투 
대학기록관이 보관 중인 교수 월급봉투와 월급명세서는 이제 역사적 유물이 되어버렸다. 아직 한국전쟁의 후유증이 남아 있던 이승만 대통령 시대인 1960년대까지는, 철필과 스텐실을 사용하는 수동 “등사기”로 인쇄된, “봉급계산표”(사진 ③)라는 이름의 급여 명세서와 현금을 지급하였고, 잉크로 기록된 당시 정교수 월급 실수령액은 후생비와 전임 수당 등을 포함하여 약 7만 원에 불과하였다. 박봉이었고, 별도 강의·연구자료 구매비도 지급되지 않아서, 후진국 교수들에게 제공한 UNESCO 쿠폰으로 선진국의 강의·연구자료를 획득하기도 하였다.
당시 학과에 고용되어, 잔심부름하던 야간부 중·고등학생(사동)들이 서무실에서 현금을 담은 월급봉투를 찾아와 교수들에게 전달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월급날이면 영남별장 등등의 방석집(술집) 마담들이, 밀린 외상 술값을 받기 위하여, 화려한 한복 차림으로 삭막한 캠퍼스에 들어와 각 건물과 연구실 주변에서 서성이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그 봉투 전면에는 혼자만의 은밀한(?) 지출 명세를 추가 기록한 자필 기록도 보인다.


사진③ 1960년 2월분 봉급계산표


경북대 교수 사모님 옷은 서문시장에서 산 “길” 표(?)
군사 쿠데타를 감행한 일본 정규 육사 출신 장교였던 박정희 대통령 시대인, 1971년 1월부터는 월급봉투의 크기가 편지 봉투보다 1.5배가량 큰 황색 마분지(갱지) 봉투(사진④)였다. 그 전면에 한글로 “봉급계산표”와 공제 항목을 “활판” 인쇄하여, “잉크”로 그 내역을 써넣은 봉투에 현금을 넣어 지급하였다. 신임 교수 월급 실수령액은 약 3만 원 정도였다. 
1970년대 말은, 서울법대 출신인 김기춘 검사가 기초(한태연· 갈봉근 교수가 자귀 수정)하였다는 “유신헌법”에 의거, 박정희 단일 후보를 찬·반 투표로, 대통령으로 선출한 유신체제 말기였다. 이 엄혹한 시국에 본교 재학생 7,000여 명이 대통령과 대구사범학교 동창인 본교 김영희 총장의 퇴진과 유신체제 반대를 외치며 시내로 진출하여 파출소의 유리창과 기물을 모두 파괴해 버린 대규모의 폭력 시위가 돌발하였다(1978.11.7.). 엄격한 언론 통제 탓에, 국내 신문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으나 일본 미국 등 외국의 신문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모교(대구사범학교)에서 대규모 유신체제 반대 시위가 있었다고 대서특필하였다. 이후 유신 반대 시위가 더욱더 과격하게 진행되더니,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항쟁으로 발전하였고,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한 대통령 피격사건을 계기로 유신체제도 그 막을 내렸다. 이 당시 교수의 본업인 연구 교육 이외 학생 생활지도 및 데모 예방 활동에 참여하였다는 구실로 교수들에게, 재원 불상인, 현금을 봉투에 넣어 수시로 지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는 경제 발전과 정보 전산화가 상당히 진척되어, 1978년 1월 월급봉투(사진⑤)가 고급백색 모조지로 바뀌었고, 크기도 A4 용지의 3분의 2 정도로 늘어났으며, 그 봉투 전면에 “급여(상여) 명세서”와 급여 명세를 도트프린터로 인쇄하여 배부하였다. 그러나 공무원 신분인 국립대학교 교수 급여 액수는 유명 사립대학교 교수 월급의 절반 이하였다. 당시 경북대학교 교수 사모님과 자녀들의 옷은 서문시장에서 산, “길” 표(?)이고, 영남대학교 교수 사모님과 자녀들의 옷은 대구백화점에서 매입한 고가의 “유명 메이커” 옷이라는 유행어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적지 않은 수의 교수들이 박봉을 피해 혹은 더 좋은 연구 환경을 추구하여 서울의 유명 대학이나 인근 대학으로 떠나기도 하였다. 
4년제 정규 육사 출신의 반란군 장군이었던, 전두환 대통령 말기인, 1986년 4월부터, 3저(유가, 금리, 달러) 호황으로, 경제가 안정되고 신용 카드 사용도 보편화 되자, 월급봉투가 사라지고 (사진 ⑥)과 같은 A5용지 크기의 “봉급명세서” 만 배부하더니, 자·타 공인의 민주투사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당시인 1996년 4월부터는 (사진 ⑦)과 같이 급여 봉투의 전면을 초록색과 검을 줄무늬로 장식하고, 그 봉투 전면에 “보수지급내역서”란 제목만 있고 내역란은 “경북대학교” 교명만이 연속 인쇄된 봉투를 배부하였다. 접착제로 붙인 봉투를 열어야만 급여 명세 내역을 볼 수 있도록 정교하게 제작된 것이었다. 직급마다 차이가 난 연구보조비와 각종 수당 등이 동료 교수와 학생들에게 공개되는 것을 꺼린 교수들의 불평 때문이었던 것 같다. 
IT· 벤처기업 육성을 추진한 김대중 정부는 국가정보 전산화를 한층 더 진척시켜 2002년 2월부터, “보수지급내역서”를 인쇄하여 교수들에게 배부해주지도 않고, 연구실이나 가정의 PC로 급여 명세를 검색하여 확인하고, 필요한 경우 프린트할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월급날 당일 급여 전액이 사모님 통장으로 사라져 버려, 현금을 찾아 으쓱대면서(?), 사모님에게 알량한 월급봉투를 하사하던 가부장 시대는 다 가버렸다.


사진④ 1971년 1월분 봉급계산표


사진⑤ 1978년 1월 급여(상여) 명세서


사진⑥ 1986년 4월 봉급명세서


사진⑦ 1996년 4월 보수 지급내역서

성과연봉제 
끝으로 덧붙여 말해야 할 사항은 교수 「성과연봉제」의 부작용이다. 현행 「성과연봉제」는 모든 교수를 S, A, B, C. 4등급으로 상대 평가하여 급여를 차등 지급한다는 것이다. 즉 B.C.급 교수의 연봉을 삭감하여 S, A.급 교수에게 준다는 제로섬(Zero Sum) 방식이다. 이러한 상호 약탈적(掠奪的) 교수평가 연봉제는 동일 학과의 동일 직급 교수들 간에도 급여 액수의 차이들 두고 있다. 
상대적으로 우수한 능력의 신임 교수가 채용될까? 강의 준비가 소홀해지지 않을까? 교수 공동체가 붕괴하지 않을까? 진리 탐구가 목적인 대학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책이다. 교수는 논문 생산 공장의 단순 노동자가 아니다. 뇌물 수수 및 횡령죄로 수감 증인 이명박 대통령과 탄핵으로 파면된 박근혜 대통령 재임 당시 강행된 성과연봉제는 ‘플러스섬’이 아니고 교수들의 정부 비판을 막기 위한 악의적 제도였다. 이것도 모자라, 한때 청와대가 간섭하여,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일부 교수들이 신청한 연구비를 선별적으로 탈락시키기도 하였다. 학문의 자유와 창의적 연구를 위하여 개선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아무튼, 이제 국립대학교 교수들의 정확한 월급 액수를 알아보기는 더욱더 어렵게 되어버렸다.


김종길 명예교수
(인문대 사학, 초대 기록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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