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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기록관-우리가 몰랐던 경북대 이야기

25. 경북대학교 초대 총장 – 한국 흉부외과학의 선구자 영서(瀛西) 고병간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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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는 1945년 10월에 출범한 대구의과대학, 1946년 9월의 대구농과대학, 그리고 같은 해 10월의 대구사범대학이라는 대구지역 3개의 단과대학을 계승하고, 1951년 문리과대학과 법정대학을 신설하여, 1951년 10월 6일 국립 종합대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1952년 4월 입학식을 거행하면서 출범한 전국 최초의 지방 국립 종합대학교이다. 당시 대구의과대학 학장이었으며 문교부 차관이었던 영서(瀛西) 고병간(高秉幹) 박사가 1952년 4월 1일에 초대 경북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되었고, 그 해 단오절이었던 5월 28일에 대구경북도민의 열망이었던 역사적인 본교 개교식이 거행되었다. 필자는 교수와 의사라는 좁은 시각에서 초대 총장 고병간 박사의 발자취를 살펴보고자 한다. 경북대학교 태동과 설립과정 중 교육행정가로서 그의 노력에 관해서는 이미 경북대학교 사료 등에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으나, 더 광범위한 자료에 기초하여 별도의 정리와 기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에 관한 개인적인 사료가 빈약하여 일부 자료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음이 아쉽다.

1949년 6월 7일 대구의과대학 부속병원 수술실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국 최초로 폐절제술이 성공한 것이다. 가슴 속 심장과 폐는 지금도 수술하기 어려운 분야이다. 그러나 당시 전신마취기가 없는 열악한 조건에서 국소마취로 이를 성공한 이가 바로 고병간이었다. 고병간은 한반도 최북단 의주 출신으로 신학문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인 집안에서 1899년 1월에 태어났다. 의주의 신영보통학교를 졸업 후 평북 선천의 신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선천은 당시 기독교화된 지역으로서, 미국 북장로회가 선교활동을 시작하였고 신성중학교를 설립하였다. 그곳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우던 고병간은 1919년 학우들과 함께 삼일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경찰에 체포되어 중학생의 몸으로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2018년 광복절 독립유공자 정부포상자로 선정됨). 1921년 졸업 후 바로 세브란스의전에 입학하여 수학하였으며 1925년 26세에 졸업한 고병간은 알프레드 러들로(Alfred Ludlow) 교수 지도로 2년간 외과를 수련하였다. 수련을 마친 1927년에 캐나다 장로회가 설립한 함흥의 제혜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하였다. 낙후된 지역이었음에도, 지역민 진료에 정성을 쏟으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선교활동에 적극적이었기에 1933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함흥중앙교회 장로가 되었다. 그러나 후배인 이영준의 학문적 성취에 자극되어, 고병간은 1934년 5월, 일본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로 건너가서 결핵환자에 대한 외과적 처치에 관심을 두고 흉부외과 연구 등에 매진하였다. 당시 조선에는 결핵이 만연하였기에 고병간은 의사로서 결핵 퇴치를 위해 부단히 연구하고 노력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1940년에 교토제국대학 의학부에서 “고환조직의 항체 산생” 등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이보다 앞서 1937년 4월 세브란스의전 외과 교수가 되었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35년 고병간은 잠시 제혜병원 병원장 서리직을 맡기도 하며, 1941년부터는 제혜병원의 제3대 병원장으로도 취임하였다고 한다. 당시 함흥 제혜병원은 83병상 규모로서 70명의 직원이 근무하던 큰 병원이었다.

1945년 8월 15일 감격스러운 해방을 맞이하여, 일제강점기 대구의전을 졸업한 조선인 동창들은 자력으로 대학 인수운영 등의 꿈을 안고 움직임이 활발하였다고 원로선배들은 전한다. 그런데 세브란스의전 외과 교수였던 고병간은 어떻게 대구의전 교장에 취임하게 되었을까? 미군정은 일본인이 경영하던 모든 교육기관들을 몰수하여 군정청에 예속시켰다. 고병간은 당시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한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회”에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미군정청은 조선 교육정책도입을 위해 교육위원회를 발족시켰으며 그 참여 위원들이 중심이 되어 10개의 분과위원회를 만들고 대한민국 교육의 기본 틀과 대학인사까지 선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구지역 또는 모교와의 관련인재들은 광복 직후 연합군과 손이 닿지 못한 것 같았다. 그때 교육위원회에서는 제10분과위원으로 내정되었던 고병간을 대구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 위촉하고, 또 동 위원이었던 최상채를 광주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 윤일선을 서울대 의학부장(학장)으로 동시에 발령하였다. 경북의대 내과학교실사에도 “해방과 함께 일본인들이 철수하자 당시 대구의학전문학교 출신의 내과 배종호 조교수는 일본인 학교장으로부터 업무를 인계받았다. 해방을 맞아 온 나라 전체가 어수선하기만 하던 1945년 9월 10일 고병간 박사가 학교장으로 새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1945년 10월 1일 미 군정청의 방침에 따라 대구의학전문학교가 대구의과대학으로 승격됨에 따라 대구의과대학 초대 학장이 되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대구의전 동문들과 고병간 학장 진용 사이에는 상당한 대립과 불화가 있었음을 일부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학교 재건을 위해 대구의전 동창회에서 유능한 인재를 선정하여 추대하였으나, 고병간 학장 진용과 의견대립이 생겨 큰 분쟁이 일어났다.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동창회에서 추천한 인물 중 몇몇 기초교수를 제외하고 임상에는 한 사람도 주임교수로 남지 못하였다”라고 당시 대구의전 출신 교수의 회고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격동기 이념투쟁 혹은 미군청의 행정실패와 굶주림에 대한 민중봉기 중 하나로 1946년 대구10월 사건이 있었으며, 대구의대 학생들의 개입과 동맹휴학 및 많은 교수들의 사직 속에 고병간 학장의 고민이 컸을 것이나 어떻게 대처하고 수습하였는지에 관해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점이 아쉽다. 학장으로서 의학교육기관의 재건에 힘을 기울이던 고병간은 1947년 9월 조선의학협회(현재의 대한의사협회) 총회에서 의육의원으로 선출되어 의협 일을 맡기도 하였으며, 1947년 유럽학회 참석과 함께 미국에서 흉부외과계의 선진 치료법을 견학할 기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1948년 한국 최초의 흉곽성형술, 1949년 한국 최초의 폐절제술을 성공하였으며, 1954년 결핵퇴치사업 공로자로 표창을 받았고, 1955년 12월에는 2대 결핵협회 회장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 문교부장관 백낙준은 고병간에게 문교부 차관직을 맡겼으며, 그 후 1년 반 정도 문교부차관으로서 국립종합대학 설립계획을 헌신적으로 지휘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52년 경북대학교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인 1953년 11월, 고병간은 미국 국무부의 초청으로 6개월간 미국 의료계를 시찰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국내 의료분야의 인적 재원과 물적 토대는 큰 손실을 보았다. 대구의대도 수업이 일시 중단되고, 교사는 군사시설로 사용되었으며, 교수들은 군의관으로, 학생들은 위생병으로 입대하였다. 1948년 입학생의 회고에 따르면 1950년 7월에 피로 쓴 자원입대서를 고병간 학장에게 제출하고 입대하였으며, 1951년 12월 24일 국방부 학병복귀 명령에 따라 전장에서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 경북의대 가교사에서 서울의대, 세브란스의대 학생들과 같이 일 년 동안 강의를 받았다고 한다. 경북의대 교정에는 육이오참전전몰학우 추모비가 있다. “조국은 빛나고 너희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도다”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10명의 학우영령을 모신 53춘추회(1949년 입학, 1953춘추졸업동기회)의 눈물 짙은 역사가 있다. 격동의 시절 고병간은 학장으로서, 그리고 문교부 차관으로서 대구의대를 유지하였으며, 남들보다 일찍 외국의 선진 의학교육과 의료를 경험할 기회를 가짐으로 경북의대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는 1959년 4월 제2대 경북대학교 총장직을 연임하였으나, 이듬해에 4.19혁명으로 사임하게 되었다. 그 후 1960년 12월에 연세대학교 총장이 되어 1년간 재직하였으며, 총장사직 후 세브란스병원장으로 일하던 고병간은 1964년 5월 숭실대 3대 학장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교육행정가로서 업무를 맡게 되었다. 다만, 1966년 12월 전국대학 총학장회의 도중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아쉬움이 있다.

고병간은 해방 후 우리나라 흉부외과학을 개척한 의학의 선구자이었으며, 교육행정가로서 경북대학교를 출범시킨 초대 총장으로, 역사의 격동기에 경북대, 연세대, 숭실대를 이끈 현대 대학 교육의 거목이었다. 그가 별세한 이듬해인 1967년, 그를 기념하기 위해 개교기념일을 기해 그의 흉상이 대학본부 교정(瀛西建學庭)에 세워졌다.



▲고병간 박사(경북대 초대, 2대 총장) 증명사진



▲고병간 박사 흉상(본관 왼편)



▲대구의과대학 학술강연 기념(앞열 왼쪽에서 세번째 고병간 박사)(1948)



▲고병간 총장 회고 산문 원고 첫페이지(경북대학교 60주년 기념 공모전)(2006)



권태환 교수

(의대 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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