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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기록관-우리가 몰랐던 경북대 이야기

24. 단풍 지고 은행나무 잎 떨어질 때면 늘 생각나는 학생회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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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무살. 경북대학교 전자공학과 91학번 새내기. 1991년으로부터 30년 세월이 흘렀다. 울산이 고향이었던 나는 아는 사람도 없었고 사람들을 사귀기 위해 신입생 환영 모꼬지(MT)를 시작으로 학생회 행사를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과 학생회 그리고 단대학생회, 총여학생회, 총학생회까지 학생회 행사와 정치집회까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참가하게 되었다. 
1991년은 얼마 전 사망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이었던 시절이었다. 80년 광주학살의 ‘원흉’(그때는 그렇게 불렀다)이었던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분노가 여전했다. 4월 26일 등록금 인하를 외치며 시위하던 서울 명지대학교 91학번 동기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아 사망하였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노태우 정권에 대한 학생 시민들의 분노는 높아져갔고 그해 5월에 죽음으로 항거한 학생, 노동 열사가 많았다. 우리의 5월은 핏빛이었고 ‘민족복현’은 매일 북문과 정문, 후문(지금 서문)을 오가며 최루탄과 짱돌의 싸움이었다. 거의 매일 경북대 북문 민주광장, 대백 앞, 한일극장, 반월당, 동아쇼핑 앞을 돌아다니며 “폭력정권 살인정권 노태우정권 규탄한다”를 외쳤다. 스무살 5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30년 전의 대학생 사회는 ‘운동권’이 주류였다. 80년 518광주학살에 대한 분노와 진상규명 책임자처벌운동이 확산되면서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분노,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열망과 정의감으로 뭉친 다양한 ‘운동권’세력이 학생회를 책임지고 사업을 펼쳐갔다. 시대적 분위기상 집회 시위 등의 정치활동이 중심이었고, 학생복지와 일상 사업이 함께 병행되었다. 당시 학생 운동권은 사상 이념에 따라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었고 학생회도 그에 따라 다양한 정치성향을 가졌다. 전국적으로 크게는 자주 민주 통일을 중심과제로 하는 ‘민족민주계열(NL)’, 계급해방을 중심과제로 하는 ‘민중민주계열(PD)’이 장악하고 있었다. 경북대도 마찬가지였고 나는 ‘민족민주계열’로 ‘자주적 학생회’를 지향했다.
92년까지 존재했던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과 93년 새로 출범한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당시 학생사회를 대표하는 조직체였다. 학생회 선거는 전국적으로도 지역사회와 대학자체적으로도 이슈였다. 언론에서는 대학선거에 민족민주계열, 민중민주계열, 백색(정치성향 없음)의 예상결과나 후보성향을 분석해 보도할 정도였다. 결과가 나오면 다시 분석해서 향후 대학사회가 어떻게 흘러갈지 주목했다.
처음으로 맞이한 학생회 선거는 신기함 그 자체였다. 집회와 시위는 많이 익숙해져 있었으나 학내에서 펼쳐지는 선거를 처음 겪는 나로서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500여명에 가까운 우리측 선거운동원들. 지금 학생들이 믿기는 할까 모르겠다. 각 단대별 선거운동본부 발대식을 하고 힘을 모아 지금은 사라진 소강당에서 자주총학 선거운동 발대식을 했다. 색깔 맞춰 제작된 선거운동복을 입은 500여명의 학생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뭉클함은 얼마나 좋았던가! 
거의 전 단과대학에 후보를 낸 우리는 새벽 5시 30분부터 일정을 시작했다. 총학생회 후보들은 도서관 문을 여는 6시가 되기 전에 나가 있었다. 언 손을 입으로 호호 녹이며 새벽 공부를 하러 나온 학생들과 손내밀며 악수로 인사했다. 코로나 시국인 지금은 상상이나 할 일인가? 양복 또는 두루마기를 입은 후보들은 “자주총학 기호1번 000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하며 손을 내밀고 어색할 만도 한 악수를 학생들은 선뜻 받아주었다. 가끔 어색하고 무안해서 눈인사만 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있었지만 후보들은 씩씩했다. 아침 7시부터는 각 단과대학 후보들이 단과대학 주요 동선 앞에서 인사를 시작했다. 후보들은 학우들에게 다가가 인사하고 삼사오오 모여 있는 선거운동원들은 큰 목소리로 우리의 슬로건을 외친다. “민족복현이 그대의 자랑이듯 그대 또한 민족복현의 자랑입니다” 자주총학 기호1번, 해방공대 학생회 000 000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며 우리는 목이 쉬어갔다. 
1교시가 시작되고부터 후보들과 선거운동원들의 활동은 달랐다. 후보들은 강의실별로 유세순서를 짜고 한 수업도 빠짐없이 학과별 학년별 계획을 세워 유세를 했다. 교수님들께는 현장에서 양해를 구하고 대부분의 교수님들은 이해해주셨다. 일부 운동권들은 완전 싫어하는 교수님들과는 충돌도 있었다. 내 수업에서는 절대 안 된다, 학생회 활동을 방해하지 마라며 서로 언성이 높아지는 촌극도 발생했다. 선거운동원들은 선거운동복을 입고 수업에 들어갔다. 가끔씩 같은 수업에 3개의 선거운동원들이 있으면 빨간색, 연두색, 노란색 등 3가지 색깔의 원색 옷이 눈에 확 들어온다. 교수님은 서로 사이좋게 선거운동 하라며 덕담도 해 주시고 과 친구지만 생각이 달랐던 동기 선배들은 때론 감정이 상해 서로 논쟁하며 싸우기도 많이 했다.
약 10일간의 선거운동이 끝나는 마지막 투표일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후보들은 한 명이라도 더 만나려고 주요 동선과 거점을 다녔다. 선거운동원들도 마지막 선거운동을 하며 본인의 동기, 선배, 후배들이 투표했는지 확인하고 투표하시라고 독려했다. 모든 선거가 그렇지만 선거는 개표할 때까지 결과를 알기 힘들다. 학생회 선거는 여론조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도 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오프라인에서 읽을 수 있는 선거분위기 말고는 데이터가 없었다. 투표율이 낮다고 하면 비상체제로 돌입했다. 북문, 정문, 후문의 식당, 카페, 당구장, 만화방을 돌며 투표 안 한 학우님들 계시면 꼭 투표해달라고 했다. 가끔 친한 친구한테 투표 안 했다고 하면 등 떠밀어 투표하고 오라고 반 강제로 학교로 보냈다. 거의 하루 만에 50퍼센트 투표율을 넘겨 선거는 무사히 끝났다. 
1992년 11월에 끝난 선거에서 우리 측 총학생회 후보는 4표 차이로 졌다.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기억될 만큼 아쉽고 속상한 결과였다. 표 차이가 너무 적어 재개표를 통해 확인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선거운동의 치열함을 엿볼 수 있는 단면이었다. 2번의 선거운동을 거치고 3번째는 나도 공대학생회장으로 입후보해 출마해서 1994년 공대학생회장이 되었다. 그 이후에도 이런 식의 선거운동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인터넷이 열리고 2000년대가 시작되고 급격한 사회변화에 모든 것이 변했다. 학생회에서 ‘정치활동’은 사라졌고 최근에는 학생회
가 사라져가는 것 같다. 후보가 없어 학생회를 세울 수 없고, 코로나로 축제도 체육대회도 MT도 없는 

대학사회의 생기가 떨어지고 있다.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지만 아쉽기는 하다. 
경북대 북문에서 카페를 하며 매일매일 학생들을 만나고 있는 나는 손님들 중에 2022년 총학생회장 당선자가 있으면 좋겠다. 그가 어떤 사람이라도 따뜻한 차 한잔 내 주고 싶다. “나도 복현인이고 그대도 복현인이니 우리 함께 차 한 잔 해요!” 


▲제3기 한총련 출범식(1995년)


▲2001학년도 총학생회 선거 공동정책자료집 표지


오택진 사무처장
(여정남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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