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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놀이터

<토이 스토리 4>로 읽어낸 실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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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이 스토리 르네상스를 겪어보지 못한 우리 세대가 극장에서 처음 접한 토이 스토리는, 아마도 토이 스토리 시리즈의 종착역인 4편일 것이다. 세계 최초의 Full CG 애니메이션이라는 타이틀, 실제와 흡사한 색채나 질감 같은 외적인 표현력, 그리고 이 시리즈가 얼마나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는지 등에 대해 얘기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실존주의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얘기해 보려 한다.
인간은 자기실현의 가능성을 갖는 존재이다. 즉,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실존’은 반드시 스스로의 자기실현에서 성취해야 하는 것인데, 관계 속을 살아가는 우리는 종종 이 선택을 남에게 맡겨버리곤 한다. 그런 맥락에서 ‘적당히’ 혹은 ‘보통’같은 단어는 참 편안하면서도 무서운 단어다. 모난 구석 없이, 튀지 않고 살아가고 싶은 욕구에 잠식된 나머지 서서히 ‘나’를 잃도록 하기 때문이다.
토이 스토리의 주인공들은 이전 시리즈에서도 실존을 탐색하는 모습을 보여주나, 장난감 세계에 국한돼 자신의 가치를 찾아나간다. 이것은 진정한 실존이라고 하기 어렵다. 김춘수 시의 한 구절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에 꽃이라는 존재로 남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도 스스로가 꽃임을 인지하고, 어떤 꽃이며 심지어는 어떤 꽃이 되고 싶은지 주체적으로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이 스토리라는 세계에 앤디라는 절대자가 있기에 장난감 우디와 버즈가 있는 게 아닌, 그 없이 살아가는 우디와 버즈 그리고 수많은 장난감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진짜 나’를 찾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죽음을 자신의 철학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그 해답이 죽음에 있다고 말했다. 죽음이란 것은 나 외의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없는 무언가이다. 그 안에서는 대중 속으로 숨을 수 없다. 철저히 혼자이다. 비로소 죽음을 마주할 때라야 인간은 진정으로 자신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카뮈의 <이방인>과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같은 실존주의 소설의 분위기가 어두운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죽기 전까지는 평생을 살아갈 우리에게 ‘죽음’이란 너무 먼 얘기인 듯하다. 하이데거는 불안이라는 감정, 그중에서도 대상 없는 불안이 인간 실존의 기본 전제라고 보았다. 위에서 언급한 ‘적당히’ 살아가고자 하는 욕구, 자신의 삶은 결단 내리지 못한 채 애매하게 군중 속에서 반쯤만 살아있는 상태. 즉 비본래성 존재 양태라고 불리는 ‘가짜 개성’이 불안을 계기로 바뀔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불안은 오로지 홀로 있을 때 발생한다. 죽음이라는 자기 고유의 실존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끝없이 내던지고 그에 따라 나만의 고유한 태도가 생겨나는 것이다.
토이 스토리 4편이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지극히 유아적인 매체를 통해 죽음의 체험 즉 실존의 과정을 부여함과 더불어 그 속에 우리들을 대입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에서 가끔 접하는 죽음을 애써 무시하며 죽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발판 삼아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이순원
(IT대 전자공학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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