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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기록관-우리가 몰랐던 경북대 이야기

12. 1987년 6월, 역사는 부른다! 폭압에 항거하는 대학의 지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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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다시 돌아왔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총에 맞고 군홧발로 차이고 몽둥이에 맞아 고꾸라지고 부서졌던 몸뚱이들이 트럭에 실려 갔다. 41년이 지난 오늘까지 해마다 오월이 오면 억울한 죽음의 원혼을 달랠 무거운 진혼곡이 조용하게 울려 퍼진다. 
80년 5월의 학살에 대한 진상이 밝혀지지 못한 채 숨통마저 조여오던 7년의 세월 후, 1987년 1월과 6월에 두 명의 학생이 국가권력에 의한 물고문과 최루탄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희생은 활화산의 분화구처럼 민중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뜨겁게 달구었고, 6월 민중항쟁의 도화선이 되어 전국으로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4·13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든 전국의 국민들은 광장과 거리에서 집회를 열거나 평화적인 행진을 진행하며 독재정권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정권에 부역하는 자들은 전투경찰들을 앞세워 최루탄과 지랄탄을 쏘거나 곤봉을 휘두르고 방패로 찍으며 강제해산에 나섰다. 그 속에서 크게 다치는 시민과 학생들이 속출하였으나 결코 두려움으로 물러서는 이는 없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온 국민의 민주화 함성이 힘차게 울려 퍼진 그 무더웠던 1987년 6월에 경북대 학생들은 어떻게 결사항쟁을 준비하고 진행하였을까? 대학기록관에는 그 당시 누군가가 손으로 예쁘게 써서 6월 항쟁의 마무리쯤인 6월 23일에 발행한 「국민운동속보」가 남아 있다. 여기에는 6월 22일 하루 동안의 투쟁 상황을 마치 중계방송 하듯이 시간 순서대로 자세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박물관 4층 경북대 역사관 한 모퉁이에 87년 6월에 창간된 복현함성과 경북대 총학생회가 발행한 민주소식, 총학생회를 비롯한 대구지역 대학학생회 및 여러 민주단체가 함께 주최한 일청담 박종철 학우 고문 조작은폐 규탄 및 6·10대회 참가 범대구지역 10만학도 결의대회문 등의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다.
87년 6월 항쟁이 경북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3월 3일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 열사의 49재가 거행된 날부터이다. 4월에는 정부의 호헌조치 반대시위로 총장실을 점거하였고, 안기부에 자금을 제공한 메모가 발견돼 총장퇴진투쟁이 전개되었다. 5월에는 광주항쟁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였고, 6월 10일부터는 날마다 학내뿐만 아니라 대구 시내로 나가서 시민들과 함께 하는 거리투쟁을 전개하였다. 6월의 거리투쟁 코스는 주로 정문에서 강남약국을 지나 칠성시장과 동대구역까지였고, 혹은 동인네거리에서 대구백화점 앞을 지나서 원대오거리, 서문시장과 당시 2.28기념탑이 있던 명덕네거리를 지나 동아백화점 앞까지였다. 흩어져서 투쟁하던 모든 대열이 동아백화점 앞에서 밤늦게 집결하면 정리 집회를 열어 하루의 투쟁과정을 보고하였다. 거리투쟁에 참가하는 인원이 많은 날에는 새벽까지 집회가 이어지거나 일부 학생들은 한 밤중까지 집집마다 상황을 알리는 선전물을 대문 틈으로 밀어 넣는 선전 작업을 하였다.
 대학기록관에 남아있는, 6월 23일에 발행된 「국민운동속보」에는 그 전날의 자세한 투쟁 상황이 기록되어있다. 오후 5시에 경북대 학생 400여 명은 오스카극장 앞에서 비산로터리로 전진하기 위한 시위를 벌였고, 오후 6시 35분 봉덕시장에서는 학생들이 건넨 독재타도와 직선개헌의 전단지를 받아든 시민들은 그들과 뜻을 함께 할 것을 결의하거나 버스를 타고 가면서 창밖으로 지지의 박수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 때 오후 6시반경에 전경들이 출동하자 시민들이 전경들을 가로막고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고함치자 전경들이 뒤로 물러서기도 하였다. 시민들의 보호 속에서 학생들은 조국의 자주화와 민주화를 향한 몸짓으로 해방춤을 맘껏 추었다. 9시 40분경에 시민과 학생 700여명이 집회를 열었고, 대명학원 앞부터 동대구역, 대구역에서 동아백화점까지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졌다. 11시 45분경에는 대구역 앞 선전광고탑이 불타며 12시까지 시위가 계속되었다. 
위 1일간의 자세한 투쟁의 기록은 87년 경북대학교를 다닌 이들의 자화상이다. 그 당시 대학은 성벽처럼 학교와 외부를 경계로 삼았던 교문과 담이 있었다. 그 성벽을 사이에 두고 전경과 학생들이 대치하였고, 전경들이 쏘아대는 최루탄과 이에 맞서 던지는 화염병과 돌들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결국 우리는 권력에 눈이 멀어 이 땅의 주인인 국민을 무시한 독재자의 항복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여 지금 시민이 참여하는 민주주의의 한 단면을 이룩하였다. 이 시점에서 피를 먹고 자란다는 민주주의가 87년을 넘어 30년이 지난 오늘 어떠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가를 경북대인들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본다. 


▲국민운동속보 1면


▲국민운동속보 2면


정보선
(영남문화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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