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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현메아리

도망을 위한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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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나를 위해 울어줬으면 좋겠다.”
2018년 9월 5일, 열아홉 살의 나는 이렇게 썼다. 그 뒤에는 왜 굳이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투정에 가까운 물음이 따라붙는다. 당시의 나는 혼자 진단하기에 정신적으로 매우 피폐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고, 아무것도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울어줬으면 좋겠다니. 인간관계의 회복과 감정의 이해를 동시에 바라는 어린애 특유의 뻔하고 우울한 문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문득 그날의 내가 궁금해진 탓에 사진첩을 뒤져서 찾은 9월 5일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해맑기 그지없게 웃고 있다. 한없이 가라앉은 글을 쓴 아이라기엔 너무나 밝은 모습이다. 나는 그 미소를 바라보면서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둘 중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어서였을까.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웃는 얼굴이 짠해 보인다. 내가 자주 글을 비상구 삼아 도망쳤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탓이다. 이젠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이 어린애의 마음속이 얼마나 곪아있었을까를 어른의 시선에서 가늠하게 된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글을 썼다. 처음으로 펴낸 책은 열한 살 때, 풀과 가위를 이용해 접어 만든 동화책이었다. 당시 주인공은 많은 공부량에 지친 어린아이였다. 집 안의 비밀 통로를 타고 내려가 시골에 사는 할아버지를 찾아가고, 손녀를 가엾게 여긴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마음껏 뛰어놀 자유를 되찾아 준다. 주인공의 서사에 대체 누구의 삶을 덧씌워 놓고 쓴 글인지 아주 투명하다. 그러니 십 년 가까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써 오고 있는 나는 내 글 안에 담긴 것들을 두고 ‘내가 아니다’ 라고 단언할 수가 없다. 이미 스스로의 삶을 양분 삼아 글을 쓰는 것은 내게 습관이 돼 있었고, 해서 내가 써 온 거의 모든 글들이 나 자체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쓴 글 안에는 내가 숨쉬고 있다. 내가 느낀 감정, 절망, 후회와 좌절들. 다른 인물의 입을 빌리기도 하고 화자를 설정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하고픈 말만 휘갈기기도 한다. 그러니 글쓰기는 나의 또 다른 세계다. 평행우주다. 현실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이 글 속에서는 수없이 현실이 된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얘기들을 글로 쓰면 아무도 나를 질책할 수 없다. 일종의 중독이다. 현실이 쓰고 텁텁할 때, 달고 시원한 세계를 찾아 글 속으로 도망치게 되는 것이다. 
도망의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남들 앞에서 진심으로 웃거나 울어본 적이 언제였는가. 혼자 기쁘다고 마구잡이로 웃을 수 없다. 그렇다고 슬플 때 엉망진창으로 울 수도 없다. 오글거린다, 지루하다, 혹은 유치하다는 표현들은 사람들에게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앗아 갔다. 이십 년 전까지만 해도 로맨틱함의 대명사로 만인의 심금을 울리던 드라마 대사가 오늘날 진부하고 우스운 것으로 치부당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토록 삭막해졌다. 중2병이니 사춘기니 하는 말들에 근거한 위로와 동정은 의미 없다. 평균을 기준으로 사람의 심리에 대해 몇 가지 단순한 정의들을 내린 뒤 그걸 토대로 수만 개가 넘는 감정의 줄기들을 전부 틀어막아 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감정표현을 거리낌없이 하는 이는 배려심과 상황파악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며, 어린애 같고 철이 덜 든 사람으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현대의 인간은 살아가면서 대체 어떤 방식으로 자기 이야기를 마음 편히 풀어놓을 수 있을까. 우리는 감정 소통의 창구를 틀어막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그걸 어디로든 배출해야만 하는 인간적 본능 또한 필연적으로 지닌 사람들이기에, 말로 못 하는 것들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 참은 순간들이 쌓이면 결국 가장 아래쪽부터 썩기 시작하고 만다. 그 썩은 것들을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 바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도피적 글쓰기의 방식이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는 현실로부터 있는 힘껏 도망쳐 펜을 드는 것이다. 가장 썩어 문드러진 부분부터 천천히 글로 녹여내기 시작한다. 이 경우 첫 글은 사실 제대로 봐주지도 못할 만큼 자학적이거나 충격적이다. 글을 위한 글쓰기가 아닌 도망을 위한 글쓰기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어른이라곤 하지만 요즘도 종종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듣는다. 너는 참 애가 밝아 보이는데 쓰는 글들을 보면 축축하기 짝이 없단다. 막상 그렇게 이야기하는 친구들의 글도 다를 바가 없다. 아무리 맑은 사람일지라도 그의 도피성 글에서는 필연적으로 혼탁한 부분이 보인다. 도망칠 명분이 많은 사람이 펜을 쥐면 어쩔 수 없이 생소한 감정들을 속 깊은 곳에서부터 응어리째 꺼내 펼쳐 놓게 되는 거다. 다만, 그저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곪아 버린 부분을 잘 정제하여 내놓는 것은 ‘쓰기’를 즐기는 괴짜들의 전형적인 도피 방식이다. 사실 나와 내 친구들은 이런 면에서 심각한 괴짜들인데, 이는 끔찍한 것을 단정히 다듬어 놓는 것이 도망치는 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렇다. 곰팡이 핀 심장을 꺼내 예쁘게 전시하는 기분이랄까. 어쩌면 글을 쓰는 우리 모두는 각자의 최선을 다하며 도망치는 중일지도 모른다. 삭막하고 가슴 답답한 현실에서부터, 혹은 자신을 위협하는 자신 안의 어떤 것으로부터.
2020년 7월 30일. 스물한 살의 내가 다시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도 누가 나를 위해 울어줬으면 좋겠다. 스스로가 밉고 사랑스럽다. 이것은 전부 내가 당신에게 읽히는 사람이므로 고백할 수 있는 것들이다. 누군가가 도피하려 쓴 글을 진심으로 읽어 주는 것은 그가 혼자 웅크리고 앉아 눈물을 떨구는 비상구로 선뜻 걸어들어와 등을 토닥여 주는 거나 다름없다. 나는 당신이 이곳을 안다면 좋겠다. 내 등도 두드려 주고, 가끔 그래도 괜찮다며 눈물도 두어 번 닦아 주고, 그러다 당신이 내킬 땐 같이 쭈그려 앉아 도망자가 되어 울어도 보고, 그랬으면 좋겠다. 글은 도피처다. 비상구다. 그러나 쓰다 보면 집이 된다. 견고하게 기둥과 벽을 세우고 창문에 커튼까지 달 수 있게 된다. 
나만의 아지트를 짓는 것은,
수없이 도망쳐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김진솔
(인문대 국어국문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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