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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기록관-우리가 몰랐던 경북대 이야기

5. 박정희와 계철순, 그리고 월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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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 졸업생이나 재학생이라면 누구나 박물관 옆에 넓게 조성된 야외전시장을 알 것이다. 인흥사지 석탑과 고려시대 부도, 불상을 비롯한 각종 석조문화재가 잘 조경한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월파원(月坡園)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꽃들이 만개하는 봄이나 단풍 물드는 가을, 혹은 하얀 눈이 쌓여 절경을 이루는 겨울이면 학내의 대표적인 포토 존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휘영청 달이 뜨는 밤 월파원의 풍광도 멋들어진다. 원래 잡초만 무성한 언덕이었다는 이곳을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으로 조성한 이는 경북대 제4대 총장 월파 계철순(1961-1968 재임)이었다. 월파원이란 이름은 그의 호를 따서 붙인 것이다.
학내 구성원들은 물론이고 인근 지역 주민들의 산책 장소이기도 한 월파원이 조성되던 시절의 이야기는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 계철순이 경북대 총장으로 임명된 시기는 1961년 12월이었다. 박정희를 필두로 한 일군의 군인들이 5·16 군사정변으로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수립된 장면정권을 전복하고 권력을 틀어쥔 바로 그해 겨울이다. 사진 속 편지의 발신인 박정희와 수신인 계철순. 지금부터 풀어나갈 이야기는 박정희가 직접 손으로 쓴 이 편지글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혁명’과 ‘재건’, 그리고 이 편지를 받은 계철순 총장 부임 전후 경북대학교에 관한 것이다.
1960년 자유당정권의 정·부통령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와 저항으로 시작된 4월혁명은 많은 이들의 희생을 딛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자유당정권의 붕괴로 귀결되었다. 이로부터 우리 사회 각 방면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민주화를 추동하는 힘이 활성화되었다. 통일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운동이 폭발적으로 분출하기도 했다. 우리 경북대학교를 비롯한 대학가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사회의 이러한 양상을 5·16정변의 주역들은 ‘극도의 사회혼란’으로 치부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5·16 직후 군사정부는 문교부장관에 현역 대령을 임명하고, 1961년 두 차례에 걸쳐 대학정비 방안을 내놓았다. 7월 22일 발표된 1차 대학정비 방안은 입학자격 및 졸업예정자에 대한 국가고시제(1963년 4월 폐지), 전임강사 이상 대학교수 매년 논문 제출 의무화, 논문을 제출하고 심사에 합격한 자에 한하여 신규채용 또는 진급 등을 주요 골자로 했다. 8월 16일 발표된 2차 방안은 국립대 통폐합 및 정원감축 정책을 담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대학교육 정상화를 내세웠지만 보다 실질적인 목적은 대학의 비판기능을 약화시키고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해 12월 7일 계철순이 경북대 총장에 임명되었다. 사실 계철순 총장과 군사정부의 인연은 이보다 약간 앞서 시작되었다. 계철순 총장은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판사로 근무했다. 해방 이후에는 군법무관, 변호사를 거쳐 1954년부터 1959년까지 경북대 법정대 학장을 역임했다. 이후 다시 변호사로 복귀했던 그는 1961년 7월 쿠데타 직후 군사정부에서 설치한 혁명재판소 상소심판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7일 상소심판관에서 해임됨과 동시에 경북대 총장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제 편지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봉투에 1962년 4월 소인이 찍혀있는 이 편지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군정이 실시되던 당시 입법·사법·행정 삼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던 최고 권력기구) 의장이던 박정희가 경북대 계철순 총장에게 ‘격려’의 내용을 담아 보낸 자필편지이다. 그런데 편지 속에 등장하는 ‘국가재건’, ‘교육의 재건’, ‘낡고 부패한 질서’의 타도, ‘학교 혁명’은 다 무슨 소리일까? 5·16은 4월혁명처럼 대중의 봉기가 아니라 3천 5백 명 정도의 일부 군인들이 무력으로 선거를 통해 수립된 장면정권을 전복한 군사정변이었다. 때문에 정변의 주도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들은 5·16 직전의 상황을 사회 혼란과 북한의 남침위협이 극대화한 절체절명의 위기로 주장하며, 자신들의 행위는 이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구국의 결단’, 곧 ‘혁명’이라고 강변했다. 더 나아가 편지 속에 등장하는 내용처럼 “낡고 부패한 질서를 신속 과감히 타도”하고 “참다운 민주주의”, “참다운 복지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이 ‘혁명’의 목적이라 주장했다. 
우선 전(前) 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강조하는 한편 5·16 이전을 극복해야 할 부정(不正)의 대상으로 삼고 이후의 모든 사업은 ‘재건’의 사업으로 강조했다. 5·16 직후 사회 곳곳에 ‘재건(再建)’이란 단어가 유행처럼 혹은 의도된 것처럼 번져갔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재건국민운동본부 등 국가기구 명칭 이외에도 재건복, 재건체조, 재건두발, 재건담배, 재건호(열차) 등 각종 상호, 상품, 단체 이름에 재건이란 접두어가 거의 빠지지 않았다. 심지어 학생들의 방학용 교재 제목도 ‘재건방학생활’이었다. 재건(再建)이란 문자 그대로 다시 건설한다는 뜻이다. 군사정변의 주역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정상적인 상황을 뒤집어엎은 ‘반동(反動)’이 아니라 비정상적이고 부정해야만 하는 상황을 타파하고 바로잡아 새로이 건설하기 위한 필연적 행위임을 거듭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학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본격화되고 자율성이 위축되던 시기에 부임한 계철순 총장의 학사 행정은 아마도 군사정부가 내건 모토(motto)에 대체로 부합했나 보다. 그가 총장으로 부임하고 내건 학사행정의 당면 목표인 “혁기적(革期的)인 신구질서의 교체, 인간개조, 연구생활태도의 확립”과 그 실행 방법을 “학교혁명을 위한 불가결의 것으로 신임하고” 있다는 편지 속 박정희의 언급을 보면 그러하다. 군사정부가 내건 정책과는 큰 갈등이 없었는지 모르겠으나, 계철순 총장이 부임한 후 경북대 안에서는 그의 학사행정과 관련하여 각종 잡음이 불거져 나오기도 했다. 예컨대, 의과대학에서는 학계 이력이 별로 없는 개업의(開業醫) 출신 전임강사를 학장 직무대리를 거쳐 정식 학장으로 단기간에 발령 내 정실인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리한 징계 내신(內申)으로 몇몇 교수들을 면직 처분케 하여 소송 끝에 다시 교수들이 복직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현재 월파원을 비롯하여 일청담, 꽃시계 등 우리 학교를 상징하는 공간들이 조성되고, 본관을 중심으로 한 오늘날의 캠퍼스 전경이 제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그것도 계철순 총장이 재임하던 시기이다. 대학의 자율성이 위축되고 학내의 주요 업무를 모두 총장이 문교부 지시를 받아 학장회의를 거쳐 시행하던 때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캠퍼스 풍광 이면에 씁쓸한 역사의 한 단면이 존재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본교 계철순 제4대 총장에게 보낸 편지

김현주
(인문대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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