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4 (금)

  • 맑음동두천 -4.0℃
  • 맑음강릉 1.4℃
  • 맑음서울 -2.4℃
  • 맑음대전 -1.6℃
  • 흐림대구 1.4℃
  • 구름조금울산 2.4℃
  • 구름많음광주 1.2℃
  • 구름조금부산 3.1℃
  • 흐림고창 0.8℃
  • 흐림제주 7.5℃
  • 구름조금강화 -4.4℃
  • 맑음보은 -5.0℃
  • 구름조금금산 -3.6℃
  • 구름많음강진군 2.9℃
  • 구름많음경주시 1.9℃
  • 맑음거제 4.1℃
기상청 제공

사회기획

2020년의 전태일들에게, “오늘 우리의 노동은 안녕한가요?”

URL복사
조현영 전임기자 
이인주 기자 iij20@knu.ac.kr
장준원 기자 jjw16@knu.ac.kr
편집 진수별 기자 jsb19@knu.ac.kr

‘인간선언’.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의 서두에 등장하는 단어다.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 낮은 임금을 받으며 일했던 노동자들은 본인들의 기본권마저도 보장받지 못한 채 때로는 기계 취급을, 때로는 값싼 가축 취급을 받으며 버텨야 했다. 인간이 없는 그곳에서 우리 경제는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그 많던 노동자들, 인간들은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1970년 11월 13일, 50년 전 이 날 청년 전태일은 스물네 살의 나이로 삶의 시계를 멈추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소리치며 불꽃으로 사그라진 그에게 2020년의 노동은 어떻게 비춰질까? 태어나는 순간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인권, 인간답게 살 권리, 1970년의 전태일은 왜 그것을 그토록 갈망했는지, 오늘날 전태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왜 전태일 열사를 기억해야 하는지 알아봤다●

◆ 1970년의 전태일로부터, 인간이 될 수 없었던 노동자들

전태일 열사의 죽음에 대해 논하려면 먼저 그 배경을 살펴야 한다. 1960~70년대 한국은 바야흐로 산업화의 정점을 달리며 눈부신 경제 성장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때 주력 산업 중 하나가 바로 경공업, 섬유산업이었고, 서울 동대문 인근의 평화시장에는 수천 개의 조그마한 공장들이 모여들었다. 전태일이 근무했던 곳도 이 인근 청계천의 피복 공장이었다. 당시 이러한 공장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주로 종사했다. 이들은 대부분 상경한 10~20대였고, 기본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열악한 환경에서 돈을 벌어야 했다. 근로기준법은 1953년에 이미 제정되어 몇 차례 개정을 거친 후였고, 하루 근로시간 8시간과 휴일규정 등을 법으로 분명하게 정해놓았으나 적용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평화시장의 경우 평균 노동시간이 하루 15시간을 웃돌았고, 한 달 내내 휴일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전태일은 이처럼 노동자들의 처우가 최악인 상황에서 공장 재단사로 근무했다. 이때 함께 일하던 미싱사, 소위 ‘시다’라고 불리던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처지에 관심을 가지고 배려해주었다는 이유로 다니던 공장에서 해고되기도 했다. 이후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1969년에 ‘바보회’라는 노동자 조직을 만들었다. 인근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모아 ‘나라가 근로조건을 법으로 보장한 것도 모르고 혹사당하기만 한 바보들’의 모임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 모임은 점차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단체로서의 성격을 띠게 됐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영향력이 미미한 상황에 어떻게 근로조건을 개선할 수 있겠냐는 의문도 적지 않았다.
1970년,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조문을 달달 외워가며 구청, 시청, 노동청 등을 찾아가고 언론사에도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곳은 없었다. 전태일은 생전 쓴 글에 ‘사회를 신임하지 않게 된 동기’라는 문장을 남기는 등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전태일은 바보회를 바탕으로 조직한 삼동친목회의 회장으로 선임됐고, 삼동친목회 회원들과 함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활동들을 전개했다. 이에 언론이 평화시장의 노동 환경 실태를 보도하고 노동청에서도 법 개정을 약속하는 등 성과가 보이는 듯 했으나, 실질적으로 개선되는 것은 없었다.
그해 11월 13일, 전태일과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평화시장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진행했다. 그러나 잠복 중이던 경찰들이 피켓을 빼앗고 회원들에게 폭행까지 가하자, 전태일은 이윽고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부은 뒤 불을 붙였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등의 몇 마디를 외치고 쓰러진 그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곧 숨을 거두었다.

◆ 2020년의 전태일들에게, 우리는 인간으로 살고 있는가

전태일이 외쳤던 구호는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기엔 너무도 당연한 말들이다. 근로기준법의 준수, 정해진 휴일, 노동자 처우 보장. 그러나 2020년 현재에도 “근로기준법이 모든 사업장에서 완벽하게 준수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는 없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여론조사 전문기관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직장인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직장인 10명 중 4명은 근로기준법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의 처우가 좋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비정규직의 47.8%가 근로기준법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응답했다. 정규직(34.7%)보다 13.1% 높은 수치였다. 5인 미만 노동자(47.6%), 20대(45.1%), 비사무직(45.0%), 150만원 미만(41.2%)인 사업장에서 ‘근로기준법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높았다. 반면 상대적으로 노동 여건이 좋다고 여겨지는 공공기관(31.1%)·300인 이상(33.7%), 50~55세(36.0%), 사무직(34.8%), 500만원 이상(26.4%)에서는 같은 답변의 비율이 낮았다. 엄창옥 교수(경상대 경제통상)는 “21세기 한국에서도 구의역 故김 군, 서부발전 故김용균 씨 등 매년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죽음의 외주화’를 겪는다”며 “노동운동은 자본주의 원죄성에 내재된 자생적 현상으로 현재 진행형”이라고 말했다. 전태일이 분신을 각오하면서까지 외쳤던 말들이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전태일 3법(근로기준법 제11조 개정, 노조법 제2조 개정,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발의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지난 4일 서울 전태일다리에서 열린 <전태일 50주기 캠페인>에서는 참가자들이 “우리는 전태일이다”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5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전태일이라는 인물을 다시 조명하고, 그의 삶을 통해 시대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태일재단 박미경 사무국장은 “일하는 이들을 배제한 민주주의는 성립할 수 없다”며 “전태일은 오늘 우리가 가꾸어가는 민주주의의 원점”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많은 것들이 개선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지만, 전태일의 족적은 우리나라 사회와 노동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선 그의 사망 이후 어머니와 친구들이 고인의 뜻을 이어 ‘청계피복 노동조합’을 탄생시킨 것을 꼽을 수 있다. 이동진 교수(사회대 사회)는 “청계피복 노동조합은 우리나라 민주노조 1호”라며 “다른 노동조합들이 청계피복 노동조합을 모방하여 만들어지는 등 전태일 열사로 인해 우리나라 사회운동이 한 단계 발전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학생운동, 재야운동, 노동운동 등 세 가지 사회운동을 하나로 연결시켰다는 의의도 있다. 이 교수는 “전태일을 통해 재야운동이 노동운동을 만나면서 학생들도 노동자를 만나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전태일 열사 50주기라는 시점에 우리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전태일은 누구인가? 엄 교수는 “전태일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공감’이라고 말하고 싶다”며 “그의 노동운동은 공감에서 시작되었고, 파편적이고 개인적인 현대 청년들에게도 이런 심정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박 사무국장은 “전태일은 시다와 여공과 재단사와 사업주가 모두 행복한 사회를 꿈꿨다”며 “양극화의 시대에 전태일은 다시 ‘연대와 나눔으로 함께 길을 찾자’고 외칠 것”이라고 말했다.
20대 청년, 저학력의 도시 빈민, 노동자로서의 전태일, 우리는 그 개인의 삶을 회고하며 오늘날 노동에 대한 관점과 지금 노동자들이 처해있는 상황이 어떠한지 돌아봐야 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1970년의 전태일과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 전태일을 기억하기 위해 모인 ‘친구들’, 그리고 대구

전태일의 출신지인 대구에서도 그를 기억하고 현재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태일에게 대구는 각별한 곳이다. 그는 자신을 곧잘 대구사람 전태일이라고 소개했고, 아버지와 어머니 이소선 열사도 대구 출신인 지역 토박이였다. 생전 구상했던 소설 초고에는 “마음의 고향, 육신의 고향,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추억이 있는 대구 여기에서, 옛 동창을 모아 놓고…”라는 문장을 적었을 만큼 지역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러한 전태일을 기념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다. 대구 전태일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이름으로 한 달간의 릴레이 콘서트를 준비했다. 매 공연마다 ‘전태일의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 특징이다. 전태일의 친구들 김채원 상임이사는 “전태일 열사가 살았던 집이 허물어 사라지기전에 시민들의 힘으로 구입해서 대구 전태일 기념관으로 조성하자는 뜻을 모았다”며 “전태일 열사가 꿈꿨던 차별 없는 세상, 어린동심들이 물질에 짓밟히지 않는 세상, 누구나 인간의 존엄을 보장 받는 세상을 위해 노력하고 전태일의 삶과 정신을 고향 대구에서 더 많은 시민들에게 알리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대구에서 전태일을 기념하려는 시도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2015년 전태일의 발자취를 답사하며 시민 이름으로 ‘전태일 공원’을 지정하고, 전태일이 살았던 집을 탐방하는 등의 노력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태일이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곳이 서울 평화시장이었던 만큼 지역과 그의 관계성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에 전태일이 살았던 집을 기념 공간으로 재생하자는 흐름이 생겨나며 시민모금운동이 전개됐고, 대구에서도 본격적으로 전태일의 열사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김 이사는 “고향인 대구에서는 오랫동안 전태일을 잊고 살았다”며 “전태일의 참다운 인간존엄, 인간사랑, 노동존중의 정신을 제대로 알리고 대구의 정신적 유산으로 회복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 글을 마치며

개인을 보면 시대를 알 수 있다는 말처럼, 전태일이라는 개인을 통해 우리는 그가 살았던 시대를,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되돌아볼 수 있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공부할 당시에 법전이 모두 한자로 돼있어 공부하는데 늘 한숨 쉬며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원이 없겠다”고 했다. 아직까지도 많은 노동자들의 삶이 크게 존중받지 못하는 2020년, 전태일이 남긴 숙제는 무엇인지, 각각의 개인이 그것을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 다시 한 번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 참고도서
『전태일 평전』 조영래 저, 재단법인 전태일재단
『대구에서 전태일을 기억하기 - 전태일로 본 대구정체성』 대구교육누리, 대구문화재단

▲대구 남산동에 위치한 주택. 전태일 열사가 청옥고등공민학교(현 명덕초등학교) 재학 시절 살았던 곳이다.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이 이 주택을 구매하여 대구 전태일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제공 : 전태일의 친구들)

▲지난달 14일 전태일다리에서 전태일재단, 노동단체 및 시민단체가 ‘전태일 50주기 [전태일 추모의 달] 선포식’을 진행했다. (사진제공 : 전태일재단)

▲대구 전태일 기념관 건립을 위한 기금 마련 콘서트 안내 패널. 10월 13일부터 한 달 동안 대구 지역 예술가들의 참여로 진행된다.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