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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기획

국제교류 학생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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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윤 기자 ldy19@knu.ac.kr

편집 곽나영 기자 gny18@knu.ac.kr

코로나19 속에서 우리들의 일상은 예전보다 많은 변화에 직면했다. 특히 해외여행, 교환학생, 해외 인턴 등은 당분간 그림의 떡이 됐다. 당장 입국할 수 있는 국가도 얼마 없으며, 설령 갔더라도, 도사리는 위협 속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지난 학기 본교 국제교류 프로그램으로 해외에 파견됐던 학생은 전부 115명이었는데 코로나가 확산돼 대부분의 학생은 전부 중도귀국을 선택했다. 하지만 아직도 귀국하지 않고 현지에 남아 있는 학생들도 있다. 이들이 낯선 나라에서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를 알려왔다. 이들은 코로나의 감염 위험뿐 아니라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을 향해 겨눠지는 차별도 경험하고 있다. 부디 건강히 지내다 돌아오길 기원한다.●


작년 12월,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새내기 때부터 가고 싶었던 중남미의 ‘라틴아메리카 에너지 기구(Organización Latinoamericana de Energía)’ 인턴 프로그램에 합격했다. 그리고 올해 3월, 설렘을 안고 라틴아메리카 에너지 기구가 있는 에콰도르로 출국했고, 출근한 지 9일 만에 코로나19 팬데믹이 선언되었다. 파견 초반만 해도 중남미는 코로나19 청정지역이었는데, 4월 초에는 에콰도르 길거리에 시신이 방치되고 있다는 기사가 쏟아질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저유가가 지속되어 에콰도르를 포함한 중남미의 원유 수출국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현재 중남미 20개국이 IMF로부터 코로나19 대응 관련 금융지원을 승인받았다고 하면 그 심각성이 좀 더 구체적으로 와닿을지 모르겠다.
팬데믹 선언 이후 재택근무로 전환되어 귀국하는 날까지도 사무실에 나가지 못했다. 장장 5개월이 넘도록 집에만 있었던 격이다. 다행히도 혼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는 편이라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세계 각국 마트에서 물량 부족이 심각했다고 들었는데, 내가 살았던 지역은 휴지도, 밀가루도, 고기도 쌓여 있었고, 장보는 데 아무 걱정이 없었다. 공산품을 제외하면 물가가 한국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에 대구 자취방보다 훨씬 넓은 집에서 스테이크를 구워 먹으며 나름 호화롭게 지냈다. 근무 시간에는 영상통화로 업무 내용을 전달받아 일을 했다. 중남미 에너지 기구의 연구부서에서 일하며 주로 회원국의 코로나19 관련 정부 정책이나 일일 전력생산 통계자료를 취합하는 등의 일을 했다. 비록 기대했던 인턴 생활이 되지는 못했지만 새롭게 배워가는 것도 적지 않았다.
외출 시에는 유난스럽다 할 정도로 조심했다. 처음 두 달은 통행금지, 차량 이동 제한, 음식점 내에서 식사 금지 등의 조치로 인해 길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점차 규제가 풀리면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 확진자 수의 증가 추세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조심하느라 길게는 두 달까지 외출하지 않았다. 마트에 갈 때도 택시를 타지 않으려고 캐리어를 끌고 걸어 다녔다. 이게 정말 고역이었는데, 에콰도르 키토는 고도가 높아 산소가 평지보다 30% 부족하기 때문에 마스크를 끼고 한 달 치 식자재를 나르다 보면 숨이 넘어갈 듯했다. 배달 음식 한번 시켜먹지 않고 매끼를 요리해 먹었다. 유난인가 싶다가도 의료시스템이 무방비한 이곳에서 코로나에 감염된다면 제대로 치료받지도, 한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할 거라는 생각에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속상했던 것은 코로나19로 인해 인종 차별이 심해졌다는 점이다. 에콰도르 도착 후 초기에 잠깐 출근을 했을 때 대중교통을 이용했는데, 한 할아버지가 나에게 다가와서 너 기침은 안 하냐며 물어본 적도 있고, 초등학생 무리가 길을 가던 나를 보며 중국인이라며 도망치라고 웃으며 소리를 지른 적도 있다. 마트처럼 사람이 많은 곳을 가면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은 일상이었다. 멕시코로 교환학생을 다녀왔던 적이 있기 때문에, 인종 차별이 낯선 경험은 아니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더 심해진 것 같아 안 그래도 심난한 마음이 한층 더 불편했다.
빈부격차도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중남미는 대륙 중 가장 불평등도가 높기로 유명한데, 방역 또한 국가마다, 지역마다 많이 다른 듯했다. 내가 지내던 동네는 부자동네라 그런지 신기할 정도로 예방수칙도 방역도 잘 실천했다. 중심가에 들어가기 전에 설치된 스크린을 바라보면 마스크 착용 여부와 체온이 표시되었고, 마트에는 체온 측정, 전신 소독, 카트 손잡이 소독이 끝나야만 입장할 수 있었다. 한 병원은 입장 시 모든 예약자의 산소포화도를 측정하기도 했다. 이를 보면서 빈부 격차를 끔찍이 실감했다. 해외여행을 다닐 정도의 부자들이 들여온 바이러스가 깨끗한 물에 대한 접근조차 어려운 빈민층, 전통시장 이용자,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비공식 부문 인구를 강타하는 양상이 큰 비극으로 느껴졌다.
에콰도르 인구는 한국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1,760만 명인데, 확진자 수는 한국의 다섯 배를 넘는다. 아직도 하루에 천 명이 넘는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다. 머나먼 에콰도르까지 가서 적도에서 달걀 세우기도 못 해보고, 갈라파고스섬은커녕 유명한 맛집 하나도 가보지 못하고 돌아온 한국인은 나밖에 없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도 건강히 귀국해서 이 습한 여름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한다.

장민영(경상대 경제통상 16) 


올해 3월 8일, 한일 관계 악화와 코로나의 전 세계적 확산 속에서 나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였다. 과거 일본에서 2년간 회사생활을 했던 나에게, 일본에서의 교환학생 생활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일본에서 취업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기에 오히려 더 기대가 되었다. 또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는 나로서는, 일본 명문대학교에서 정치를 배우게 되면 양국의 입장 차이는 물론 엉켜있는 실타래 같은 한일 관계도 하나씩 풀어 이해할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편입생으로 기존의 학칙 상,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지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작년 5월 이후, 학칙이 개정되어 편입생 최초로 교환학생을 갈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예측되지 않는 코로나 시국 속에서 일본은 한국인 입국을 제한했고 그로 인해 단 이틀 만에 짐을 꾸려 일본으로 떠났다.
내가 기대했던 유학 생활과는 달리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입주하기로 계약했던 기숙사는 3월 말부터 운영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빨리 입국한 나로서는 우선 다른 숙소에 머물면서 2주간 자가 격리를 해야 했다. 이 기간에는 학교에서 배울 것들에 대해 준비하면서 1년간의 일본 생활을 계획했다. 개강 후 어려운 용어들에 대한 개념 정리와 선행이 필요했다. 그러나 대면 수업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었던 것과는 달리 모든 수업은 비대면으로 대체되었다. 또한, 온라인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온라인 비대면 수업보다 과제로 대체되는 수업이 많았다. 이 때문에 같은 과(법학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과의 교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숙사 생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외국 학생들은 자국으로 돌아갔고, 코로나로 인해 입국하려고 했던 100여 명의 학생 대부분이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취소하는 바람에 학교 전체에 남은 교환학생은 나를 포함해 3명뿐이었다.
학생들이 교환학생을 준비하는 이유는 학생들의 숫자만큼 다양하겠지만 대부분의 학생은 해당 국가에서의 문화체험과 교류 활동 및 관광 등을 기대하곤 한다. 그런 점에서 2020년의 코로나 시기는 여러모로 꼬일 수밖에 없었다. 학교 자체 프로그램은 전면 취소되었고 여행은 커녕, 기숙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따분한 시간이 지속되어 난바나 우메다와 같은 오사카의 번화가에 나가보기도 하였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긴급사태 선언’ 이후 번화가에는 관광객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평상시보다 빨리 폐점하라는 정책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곳이 적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작정 코로나 탓만 하고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해외에서 생활하는 것을 꿈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사람들도 많다는 생각에 새로운 시도를 하기로 결심했다. 첫 번째가 운동이었다. 일본 대학에는 서클과 부 활동이 있다. 서클은 한국 동아리와 비슷하며 편하게 학생들끼리 모여 활동하는 제도이다. 그에 반해, 부 활동은 서클과 다르게 엄격한 상하관계와 훈련이 있다. 나는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부 활동을 하기로 결심했고 부 활동 중에서도 역도부를 지원했다. 역도부에 들어가서 활동하게 되면 일본인들과의 교류는 물론이고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정감을 찾기 위해 한인 교회를 찾아가기도 하였다. 최대한 한국인 학생들과의 교류를 피하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사람들과의 교류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한인 교회는 종교의 이름 아래 환영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나와 같은 유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교회 활동을 하며 오사카 사회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실제로 일본에 입국 후 3개월 동안 스트레스로 인해 몸무게가 15kg 정도 감소했다. 그러나 현재는 부 활동과 한인 교회에서의 생활을 통해 예전의 몸무게와 기력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을 작성하는 8월 현재,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을 기숙사에서 보내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무료한 삶의 반복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이 시기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모든 상황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은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있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더욱 충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학기부터는 대면 강의로 운영된다는 공지가 떴지만 최근 일본의 코로나 확진자 수가 급증함에 따라 이마저도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러한 상황을 보며 지인들은 ‘왜 귀국하지 않느냐’는 말을 하기도 한다. 나 역시 귀국이라는 것을 아예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 있다고 하더라도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현재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려 한다. 또한 한 번 계획했던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마무리를 짓고 싶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의 상황을 잘 이겨내고 1년간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끝까지 그리고 건강히 완수할 것이다.


정시원(사회대 정치외교 17)

지난 1학기에 교환학생을 갔던 학생은, 어느 나라에서건 코로나19 때문에 만족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2월 중순에 처음 폴란드에 왔을 때는 한국보다 감염자 수도 적고, 사회적 거리두기나 마스크 착용 등의 예방 수칙도 실시되기 전이었다. 하지만 폴란드에도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금방 역전되고 말았다. 낯선 곳에서 코로나에 감염될까봐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까 고민도 했지만 만약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오랫동안 계획했던 교환학생 경험을 포기하는 것이라, 폴란드에 그대로 남아있기로 결정했다.
코로나로 인해 여러 가지로 힘들었지만, 교환학생의 특권인 여행을 다닐 수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아쉬웠다. 체코, 헝가리, 이탈리아, 그리스 등 여러 나라를 가고 싶었고 부활절과 정규학기가 끝난 방학 때에 여행하기로 계획도 다 세워둔 상태였다. 하지만 3월부터 코로나가 확산돼 폴란드 국경이 봉쇄되었고, 그 이후로 여행은 아예 불가능해졌다. 또한 국제적 상호주의에 따라  ‘한국에서 유럽국가에 비자를 주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유럽 국가들 역시 한국인들을 받아주지 않는 상황이라 결국 아무 곳도 갈 수 없었다. 교환학생으로 오기 전에, 여행을 하려고 그토록 열심히 알바를 했었는데, 그 모든 노력이 헛된 것이 되었다는 생각에 박탈감마저 들었다.
코로나 팬데믹 선언 이후 인종차별이 심해졌다. 사실 나는 덩치가 있는 편이라서 그런지 좀 나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코로나 때문에 처음으로 인종차별을 당해봤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일상에서 마주한 인종차별로 인해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기대했던 학교 생활 역시 수업 외에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교환학생 첫 번째 목표는 바로 친구 100명을 사귀는 것이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이마저도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외국인 친구를 많이 만나 영어로 한마디라도 더 대화하려고 했는데 만날 수 있는 기회조차 얻기 힘들었다.
같이 왔던 친구들이 돌아갔을 때는 정말 힘들었다. 몇 명 되지 않았기에 다들 한두 달 사이에 많이 친해졌고 거의 모든 생활을 같이했던 터라, 친구가 떠나갈 때는 마치 훈련소에서 동기들만 수료하고, 나만 홀로 군대에 남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한 감정 속에 한국을 가면 편해진다는 생각과 한국에서도 그대로 학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은 너무도 큰 유혹이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들은 바로는 현재 한국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 역시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한다. 이곳 폴란드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이곳에 남아있다면, ‘한국에 있는 것보다 좀 더 나은 게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에 교환학생 생활을 계속 하기로 결정했다. 시간이 지나 코로나에 대한 제재가 완화되면서, 기대만큼 많은 외국인 친구를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몇 명과는 지속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원하던 영어 실력도 조금씩 향상된 것 같다. 사실 교환학생이기 때문에 수업 부담이 덜한 게 사실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공부하는 양 만큼 공부해야 한다면 친구들을 만날 여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교환학생이기에 수업도 한국에서보다 적게 듣고, 수업 내용도 이론적인 깊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 현재 상황에 대한 이해와 기본적인 역사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친구들을 만나는 시간이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다.
코로나가 확산되는 시기에 교환학생을 와서 놓친 것도 많았지만,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여전히 있을 거라 믿고서 다음 학기엔 가능하다면 그리고 이곳 상황이 호전된다면 교환학생과 인턴을 병행하면 어떨까 생각을 해본다. 원래 다음 학기에는 말라야 대학에서 교환학생을 할 계획이었으나, 국경이 봉쇄되어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다음 학기 역시 전면 비대면 수업이라 이제는 조심스레 인턴 기회를 찾아볼까 싶기도 하다. 

박세민(사회대 정치외교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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