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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기획

인류와 전염병, 둘 사이의 전쟁 위생의 시대, 질병과 인간의 전쟁

그 시작백신 개발과 의학의 발달로 인류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전염병을 어느 정도 정복한 듯 보이지만,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은 이런 자신감을 비웃기라도 하듯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의학의 발전과 백신, 약물의 개발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전염병은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이다. 전염병은 그저 역사책에만 등장하는 이야기도, 다른 나라의 소식만 듣고 지나치게 될 존재도 아니라는 게 드러난 셈이다. ‘코로나19 발생 이전의 세상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문장을 새기며 이제는 일상생활 속에서 감염에서부터 전염까지의 위험을 차단하고 예방해야 할 것이다. 이에 위생의 개념이 확립된 시점부터 달라진 인간의 삶과 상·하수도, 화장실 등 위생시설의 등장에 대해 알아보자●


특별취재팀/knun@knu.ac.kr



정착과 함께 시작된 질병

수렵과 채집으로 생존하던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12,000년전 농경이 인류의 역사에 등장하던 무렵 정착을 시작했다. 정착 초기 인류에게는 득보다 실이 많았다. 말라리아나 십이지장충 같은 풍토병이 생겨났고 수렵과 채집이 주가 되던 시기보다 섭취할 수 있는 영양분은 부족했다. 초기 농경은 풍요에 대한 약속이었다기보다는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고, 곡물에 편향된 영양섭취를 하다보니 수렵채취 때 자연스레 유지되던 영양 밸런스는 깨질 수밖에 없었다. 정착은 안정감을 주면서 인구의 증가를 가져왔지만 그러면서 인류는 매시기 출몰하는 전염병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인류의 전반적인 건강수준이 향상됐고 면역력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질병의 위협은 존재했다.  쌓여가는 배설물과 쓰레기는 질병의 근원이 되기 안성맞춤이었다.

정착촌 간의 교류로 새로운 질병의 전파경로가 만들어졌고, 키우는 가축으로부터 병원균(감염증을 일으키는 기생생물)이 유래됐다. 인류 근대사에서 주요 사망 원인이었던 천연두, 인플루엔자, 결핵, 말라리아, 페스트, 홍역, 콜레라 같은 여러 질병들은 모두 인간과 밀접한 동물의 감염병에서 진화한 전염병(감염병 중에서도 전염력이 강해 소수의 병원체로도 쉽게 감염되는 질병)이었다. 홍역 바이러스에 가장 가까운 것은 소에서 유래된 우역(소, 양, 산양에 생기는 급성 접촉 감염성 질환)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인데, 코로나 바이러스와 비슷하게 이 우역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침투해 인간에게 맞도록 진화해 홍역 바이러스가 되었다. 결국 정착과 농경 및 가축 사육 등으로 인해 인간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바이러스의 위협에 처해진 것이다.


인류와 전염병, 둘 사이의 전쟁

세계사 속에서 전염병은 빠짐없이 출현해왔다. 고대도시에서는 위생에 대한 개념도, 관련 시설도 없었기 때문에 전염병 창궐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병원체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고대인들은 전염병을 신의 징벌로 받아들였다. 질병을 치료하는 수단으로 주술이 사용됐던 이유기도 하다.
예방과 치료 수단이 없었던 새로운 전염병은 세계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에 충분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싸웠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 역병 창궐로 인해 아테네의 패배로 끝났다. 아테네 역병은 BC430년 첫 발병을 시작으로 BC429년, BC427년 두 번에 거쳐 발생했다. 고열, 장기출혈, 구토, 염증 등이 증상으로 나타났고 살아남더라도 손가락과 발가락을 절단해야 하거나 기억상실증이 후유증으로 남았다. 당시 아테네 군인과 시민 1/4이 사망했으며 전쟁 초반 우세했던 아테네는 이 역병으로 인해 전세를 역전 당했다. 또한 도덕관념과 종교도 붕괴됐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은 역병이 창궐하자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것처럼 느껴 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고 한다.
안토니우스 역병(165~180년 유행)과 키프리아누스 역병(251~266년 유행)은 15년 동안 유럽전역에서 500만 명을 사망시키며 로마제국을 붕괴시키는데 일조했다.
키프리아누스 역병은 세균과 바이러스의 중간단계인 발진티푸스 리케치아에 의해 감염돼 발생하는 전염병이다. 초기 기독교 저술가 성 키프리아누스가 목격하고 기록한 것이 역병의 유래가 되었다. 주로 ‘이’를 통해 감염이 되며, 심할 경우 치사율이 무려 70%에 이르기도 한다. 270년에 키프리아누스 역병은 당시 황제였던 클라디우스 2세 고티쿠스(재위 268~270년)의 생명을 앗았다. 이는 당시 로마의 농업력과 군사력에서 심각한 인원 부족을 초래했다. 후대에 발진티푸스는 한번 더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스티아누스 역병(541~750년 유행)은 이집트에서 전파돼 하루 1만 명을 사망시키기도 하며 유럽 인구를 반 토막 냈다. 유스티아누스 역병과 함께 다른 여러 가지 요인들로 로마제국은 무너졌다. 그 후 각 지방의 영주가 지방자치를 하며 유사시에만 군주를 돕는 중세 봉건 시대로 돌입하게 됐다. 결국 유스티아누스는 처음 유행이 지나간 뒤에도 수십 년 간격으로 반복해 나타나고 피해를 주다가 750년 유행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페스트(흑사병)는 14세기 중기 전 유럽에 유행했던 페스트는 쥐벼룩을 매개로 퍼져나갔으며 수치상 총 7500만 명의 인구가 페스트로 사망했다. 아시아 지역에서 시작된 페스트는 킵차크 칸국(몽골 제국 분열 후 생긴 4대 칸국 중 하나) 군대가 유럽인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 던진 시신으로 유럽에 전파됐다. 페스트는 유목 생활을 하는 킵차크 칸국에게 심각한 질병이 아니었다. 들쥐는 게르(몽골식 주거용 천막)의 두꺼운 펠트를 뚫고 들어갈 수 없었으며, 유목민들은 들쥐의 먹이, 즉 페스트의 매개체였던 쌀 등의 곡식을 갖고 살지 않았다. 그러나 농업을 통해 정착한 유럽의 민족에게는 목재 창고가 많았으며 곳곳에 곡식들이 널려 있었다.
페스트로 많은 인구가 사망하면서 유럽 사회도 크게 변화했다. 인구 손실로 인한 노동력 부족으로 지주들은 농노(중세시대 봉건제도 하에서 장원에 귀속됐던 소작민)를 부릴 수 없어 파산했다. 유럽 경제의 기반이었던 장원제도와 봉건제도는 무너졌고, 이는 근대 사회로 넘어가는 계기로 작용했다. 페스트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수도원은 급하게 성직자들을 양성했으나 자질이 부족한 성직자들은 이단과 각종 미신들을 만들어냈다. 결국 페스트를 퇴치하는데 실패한 교회는 민심을 잃어 중세의 정신적 기반이었던 기독교의 위세도 흔들리게 됐다.
발진티푸스는 전쟁 중 활활 타는 캠프의 모습을 따 ‘캠프 열병’이라고도 한다. 십자군 전쟁 동안 발진티푸스는 1489년 스페인에서 처음 발발했다.
30년 전쟁(1618~1648년) 동안 약 800만 명의 독일인이 발진티푸스와 선페스트로 사망했다. 이 질병은 또한 나폴레옹의 1812년의 러시아에서 대육군의 절멸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반인들은 흔히 신대륙으로 건너간 유럽인들이 총칼로 인디언들을 제압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인디언 제압에 더욱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바로 유럽인들이 가져간 전염병이었다. 원래 아메리카 대륙에는 유럽에서 막대한 인명을 살상하던 인구 밀집성 병원체가 없었다. 인디언들은 유럽인들이 침입할 때까지는 유럽 대륙을 초토화시킨 것과 같은 전염병의 대유행을 거의 겪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5세기 들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면서 유럽의 전염병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입됐다. 인디언들은 난생 처음 겪는 유럽의 전염병에 면역력이 없었고 천연두와 홍역, 그리고 인플루엔자 등의 바이러스성 질환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천연두는 우리나라에서 두창, 마마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감염자는 고열, 발진, 전신 수포 등의 증상이 나타났다. 16세기 카나리 군도의 전 인구가 천연두로 절멸했으며, 히스파뇰라에서는 원주민의 절반이 천연두로 죽었다. 페스트 못지않게 천연두 역시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찬란했던 잉카제국은 스페인의 침략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역사에선 유럽 선진 문명의 힘으로 평가하지만 아무리 총과 말을 가지고 있어도 고작 168명인 군대에 8만 명 병력이 일거에 패배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상당히 신빙성 있는 학설 중 하나에 따르면, 이 전쟁의 승패를 가른 것은 천연두였다. 1526년 천연두는 유럽에서 여러 차례 유행했고, 스페인 군인들은 천연두에 내성을 갖고 있었으나 잉카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스페인 군대가 가져온 천연두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내성이 없는 잉카인들을 쓰러뜨렸다. 심지어 잉카 제국의 황제 우아이나 카팍과 후계자 니난 쿠유치가 모두 천연두로 사망하면서 제국의 혼란은 극에 달했고 무너졌다. 천연두는 유럽의 금융 질서를 바꾸기도 했다. 1500~1800년 남아메리카의 은 생산량은 13만~15만t으로 세계 은 생산량의 85%를 차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 역시 세계 생산량의 71%가 남아메리카에서 생산됐다. 유럽의 화폐는 금과 은이었다. 유럽인들이 남아메리카를 정복하면서 금과 은이 유럽으로 대거 유입됐다. 금과 은의 증가는 곧 화폐의 증가를 의미한다. 화폐의 증가는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돈이 늘자 구매력이 늘어났고, 그 결과 공산품 가격이 식비나 인건비보다 빠르게 상승하면서 상공업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자본주의가 싹텄다. 경제적 풍요는 정신의 고양으로 이어져 시민정신과 계몽 사상이 움텄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을 비롯한 시민혁명이 유럽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나면서 근대가 시작됐다.
17세기 들어 네덜란드의 과학자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이 현미경으로 미생물의 존재를 발견할 때까지 인류는 오랜 세월 자신들을 괴롭혀왔던 전염병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여러 가지 병원체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을 눈으로 보고 식별할 수 있게 되자 전염병 예방 및 치료 연구는 급물살을 타게 됐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전염병에 대한 유효한 반격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인공적으로 면역력을 갖추기 위해 백신을 처음 과학적인 방식으로 만든 사람은 19세기의 생물학자 파스퇴르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인류는 경험을 통해 백신의 존재 및 효과를 느낄 수 있었다. 파스퇴르가 백신을 발견하기 수백 년 전부터 천연두 환자의 고름을 비감염자의 몸에 접촉시켜 천연두를 예방해왔던 것이다. 천연두 환자의 고름에 접촉한 비감염자는 가벼운 천연두 증세를 보였지만 이 과정에서 천연두에 대한 면역이 생겼다. 물론 당시 사람들은 이 과학적 메커니즘을 알 수는 없었겠지만 이 같은 인두접종은 18세기 초 유럽에도 도입됐다. 18세기 말에는 천연두와 근친관계지만 증세가 덜한 우두를 앓아도 천연두에 면역력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자 우두 고름을 대신 접종하게 된다.
파스퇴르는 미생물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 같은 전통 백신의 과학적 원리를 밝힘으로써 광견병, 인플루엔자, 독감, 콜레라 등 다른 질병도 예방할 수 있게 됐다.
20세기에 들어와선 영국의 세균학자 플레밍에 의해 세균의 증식을 억제하고 죽이는 물질인 항생제(페니실린)가 발견됐다. 이후 여러 가지 항생제가 발견돼 전염병과 싸우는 인류에게 큰 도움이 됐다. 물론 전염병을 정복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세계 역사상 어떤 질병보다 많은 목숨을 단 몇 달 만에 앗아간 스페인독감이 발병했다. 1918년 전 세계 인구는 약 4억5000만 명에서 3억5000만 명으로 1억 명이 줄어들었다.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을 고려하더라도 2000만∼5000만 명, 많게는 1억 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스페인독감 당시에는 당연히 현재와 같은 진단키트도 없었고 치료제도 없었다. 또한 열악하고 부족한 의료시설과 공공보건시설이 갖춰지지 않아 피해가 상당했다.

질병 극복의 시작

고대 그리스인들은 처음으로 질병에 대한 초자연적 개념에서 벗어났다. 이전까지 질병을 신의 벌로 여기며 신에게 용서를 구하던 모습과 달리 고대 그리스인들은 질병 관리가 자연적인 원인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히포크라테스 시대 그리스 의사들은 영양과 배설, 운동, 휴식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상태가 이상적 삶의 방식이라 여겼다. 이러한 균형이 불안정해지면 질병이 발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질병보다는 사람과 예방에 초점을 맞췄다.
고대 로마가 점점 팽창하고 도시화되면서 점차 테베라 강의 수질도 바이러스와 오염물질로 더럽혀졌다. 고대 로마인들은 질병들에 대비하고자 그리스의 건강관을 받아들여 상·하수도 시스템, 목욕탕, 화장실 등의 도시위생시설을 만들어냈다.

상·하수도 시스템, 목욕탕 그리고 질병

로마 정치가들은 물을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기존 시설을 정비하는 한편, 새로운 수도 시설을 건설하기로 했다. 최초의 상수도인 ‘아피아 수도’는 BC312년 착공된 수도 시설이다. 이는 정치가이자 이 공사의 책임자였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스’의 성을 따서 명명된 것이다. 이 수도 시설은 지하와 지상의 비율이 185대1로, 압도적으로 지하 수도의 비율이 높았다. 침범해온 적들로부터 시설을 보호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수온 상승으로 인한 증발을 막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다고 볼 수 있다. 수온 상승 시 물은 썩게 되며 로마는 더운 남쪽에 위치해 물이 쉽게 증발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건설된 ‘마르키아 수도’는 과거와 현재 모두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는 수도 시설이다. 이 수도 시설은 총 길이 91.4km로 고대 로마 때 건립된 11개의 수도 시설 가운데 가장 길다. 수질 역시 최상급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송수량은 185,600㎡로 명성에 걸맞게 가장 많은 양을 공급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수도 시설이 오늘날에도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인데, 21세기인 지금까지도 로마 도심에 물을 계속해서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통일 직후 1870년 시민들이 마르키아 수도의 좋은 수질을 기억해내 복구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제국 때 건립한 총 11개의 수도 시설은 현대 상하수도 시설과 거의 유사한 형태였다.
상수 확보만큼이나 하수 처리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생활 오수나 분뇨같이 더러운 것들을 길가에 버릴 수도 있었지만 로마는 당시 만연하던 수인성 질병(병원성 미생물에 오염된 물에 의해 전달되는 감염성 질병)을 제어하기 위해 깨끗한 식수가 오염되지 않도록 하수도를 건설했다. 이후 로마가 도시 곳곳에 설치하게 되는 공중화장실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또한 고대 로마인들은 수도 시설의 개발을 바탕으로 공중화장실, 공중목욕탕 같은 주민들의 생활을 한 단계 높이는 사회기반 시설을 건설하기도 했다.
의료계에서 이 현대적 상·하수도 보급이 의료기술의 발전보다 수명연장에 더 큰 공을 세웠다고 주장할 만큼 상·하수도 시설은 인류 건강에 혁명적인 공을 세웠다. 우리나라에서도 상·하수도 정비가 기생충 박멸에 공헌한 요인 중 하나였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화장실과 질병

고대 로마는 나름대로 화장실 문화를 갖췄던 문명국이었다. 각 가정의 화장실은 모두 수세식으로 설치됐고, 로마시대에서만 석조로 된 수세식 화장실이 14개나 발견됐다. 그러나 중세에 접어들면서 로마식 화장실은 없어졌고 다시 원시적인 농경생활의 화장실로 되돌아갔다. 오물은 정원 구석이나 도로에 버려졌다.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의 주택은 말할 것도 없고 베르사유궁전에서도 화장실과 세면소 등의 시설은 설치되지 않았다. 1843년 <파리 시 공공소식지> (Bulletin Officiel de la Ville de Paris)에 “벌건 대낮에도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사람을 보는 것은 그다지 희귀한 일이 아니다”며 “그들은 전혀 자신의 몸을 숨기거나 가리려고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거리의 오물에 골머리를 앓던 유럽은 화장실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방안을 마련했다. 1847년 영국 정부는 하수 시설이 완성되자 런던 시민들에게 모든 분뇨를 하수 시설에 방류해야 한다는 ‘하수처리법’을 선포했다. 이후 변기의 발명과 발전으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수세식 변기가 탄생하게 됐다.
수세식 변기의 발명은 현대식 화장실이 정착되는 계기가 됐다. 오늘날과 거의 흡사한 최초의 가정용 화장실은 1852년 미국의 한 호텔에 처음 설치됐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특급호텔, 백화점 등에 처음으로 인공 수세식 변기가 보급됐다. 해방 이후 미군 주둔으로 수세식 화장실이 본격적으로 설치됐고, 경제개발로 국민소득이 상승하던 1970년대 수세식 화장실의 일반화가 이뤄졌다. 1977년부터는 음식점과 유흥업소 등 접객업소 허가 조건으로 수세식 화장실 설치가 의무화됐다.
수세식 화장실의 보급화와 전문화가 이뤄진 기간은 2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수세식 화장실과 정화조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개발도상국의 경우 물이 동물 및 인간의 배설물과 섞이면서 오염돼 다양한 수인성 질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이하 WHO)와 UNICEF에서는 수인성 질병이 개발도상국에서 발생하는 질병의 80%를 차지하고 있으며 수인성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전체 사망자의 1/3에 달한다고 밝혔다.
수인성 질병은 오염된 물을 섭취하거나 접촉했을 때 발병하며 대부분 위장관 질환을 일으킨다. 환자의 분변이 정화조를 통해 처리되지 않고 배출되면 해당 병원균은 다시 물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감염시킬 수 있다. 과거에는 어디서든 수인성 질병이 아주 흔했지만, 화장실과 수돗물의 공급 이후 수인성 질병의 발생빈도는 획기적으로 줄었으며 위생적인 화장실의 공급은 1840년 이래로 가장 중요한 의학적 진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인간과 질병, 끝나지 않는 전쟁

현재 인간 문명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크고 밀집된 거대도시를 만들어냈다. 도시는 높은 인구 밀집도로 인해 전염병에 매우 취약하며 생활과 관련된 필수조건들을 대부분 외부에 의존하고 있기에 전염병 창궐 시 페스트와 스페인 독감과 같은 혼란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 3월 11일 WHO가 코로나19에 전염경보 6단계 중 최고 단계인 ‘팬데믹(세계적인 전염병 대유행)’을 선언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동안 확진자의 수가 위협적으로 증가하기도 했지만 이후 선별진료소를 통한 선제적 검사와 투명한 정보 공개로 안정을 되찾았아 가는 추세다. 아마도 현재의 위기를 겪어 나가면서 로마의 화장실과 상하수도 시설의 발전에 버금가는 새롭고 혁신적인 공공위생과 의료시스템, 이를 총괄하는 사회시스템에도 발전이 뒤따를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발전에는 시민들의 위생 의식과 실천도 함께 수반될 것이다.




『문명의 탄생과 질병의 시작』, 홍윤철(여시재)
『전염병의 역사는 ‘진행 중’』, 송영구(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학교실), 대한내과학회지
 『화장실의 역사』, 야콥 블루메, 이룸
『서양 문명의 역사』, E.M,번즈, 소나무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한길사
『총, 균, 쇠』 재레드 다이아몬드, 문학사상사
『세상의 모든 지식 EBS 다큐프라임 ep_12 물이 넘쳐나는 폼페이 상하수도의 비밀?』, E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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