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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현메아리

타협의 정치, 이해가 먼저

지난 20대 총선 이후 ‘협치’라는 단어가 한동안 세간에 맴돌았다. 국회에서 과반수를 얻은 정당은 없었다.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은 서로 120여 석을 나눠 가졌으며, 그 사이의 다른 정당들도 적지 않은 의석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국정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서로 협력해야 했다. 협치는 그렇게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당시 국회의장이던 정세균 의원은 협치에 대해 ‘각자의 주장에서 벗어나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사람들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양보해 가는 ‘협치’를 하길 바랐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광화문에는 수많은 촛불과 태극기가 지나갔고, 여러 번의 단식과 한 번의 필리버스터가 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성향이 다른 정치인들이 ‘협치’하는 사례를 얼마나 보았는가?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서로 싸운 사례에 비해 얼마나 많았을까? 정확한 통계를 낼 수는 없되 그들의 타협을 보며 흐뭇해했던 기억이 없는 것을 생각해 보면 협치보다는 대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 같다.
누구를 집어 탓하기도 어렵다. 한 정당이 어떤 정책을 제안하면 다른 정당은 깊이 검토도 하지 않은 채 반대에 나서고, 제안한 정당은 반대 의견을 들을 생각도 없이 무조건 ‘협치/협조하라’며 정책을 들이민다. 아무도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이제는 ‘협치’라는 단어도 그 소용돌이에 들어가 양보가 아닌 굴복의 의미에 가까워졌다. 모두가 가해자요 피해자가 되었으니 누구에게 수갑을 채우고 어디에 책임을 물을 것인가.
물론 각자에게 정치적 신념이 있기 마련이고 현대사회에서 만장일치가 존재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적 신념도 결국 국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모두가 찬성하는 정책을 수립하기는 어려워도 대다수가 동의하는 정책은 만들어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대연정’이니 ‘사회적 대타협’이니 하는 말도 없었을 것이다. 당색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서로 무엇을 양보할 수 있고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최소한의 논의라도 할 수 있지 않으냐는 말이다. 그것이 커져 타협이 되고 협치가 되고 사회적 대타협이 되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우리는 반대 편에 선 사람들을 과하게 적으로 몰아 왔다. 협치의 빛이 바랜 것은 선 긋기를 부추기던 일부 위정자들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고 옳고 그름만을 따지던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당장 인터넷 뉴스의 댓글들을 한번 돌아보자. ‘OO들은 모조리 없애버려야 한다.’ 따위의 표현을 얼마나 많이 보게 될까?
정치인들이 바뀌지 않았다면 우리부터 바꿔나갈 수밖에 없다. 듣기 싫은 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고, 정치색이 다른 의견도 주의 깊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 1987년 6월 이래 민주주의는 발전하였고 우리의 의식 또한 발전하였다고 한다면 우리가 정적들에게, 그리고 싫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미국의 시인 오든의 시 구절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할 따름이다. (We must love one another or die.)”

박준서
(사범대 역사교육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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