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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대구·경북, 3.1운동 100주년을 맞다

“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 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오는구나.”<3.1 독립선언서> 이 선언서는 당시 전국에서 낭독했고, 100년을 넘어 2019년 3월 1일에도 읽혔다. 억압받지 않고 억압하지 않고 시민 스스로의 양심으로 자유롭게 펼쳐나가는 세상. 1919년의 사람들이 꿈꿨던 세상은 2019년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과제이자 시대정신일 것이다●

100년 후에도 "대한 독립 만세!"

공휴일 오전 대구 시내는 하얀 한복을 입고 태극기를 든 시민들로 붐볐다. 지난 1일 대구광역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만세 행진 재연 행사를 진행했다. 만세 행렬은 달성공원에서 풍물소리와 함께 출발했다. 서성네거리에서는 대구제일교회에서 출발한 또 다른 만세 행렬이 합류해 대규모 행진을 이어나갔다.
이날 만세 행진에는 순찰복을 입은 어린이 무도인순찰대, 옛 교복을 입은 중학생, 대한 독립 머리띠를 두른 어르신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수천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중앙네거리를 지나 2·28기념중앙공원에 다다르자 신명고등학교 학생들의 3.1운동 재연 연극이 펼쳐졌다. 연극에서는 일본 순사에게 한복을 입은 학생들이 폭력을 당하면서도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강렬한 모습이 재현됐다. 실제 3.1운동 당시 신명고등학교 학생들이 학생 독립운동을 주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신명고등학교 김상민 학생(19)은 “직접 당시 의복을 입고 행진에 나와 보니 행렬 속 시민들에게도, 같이 온 친구들에게도 3.1운동을 펼쳤던 이들의 영혼이 깃들어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만세 행진은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까지 이어졌다. 긴 행진을 마치고 공원에 주저앉으면서도 만세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만세 행진에 참여한 장진 학생(16)은 “지금은 즐겁게 거리를 행진하고 있지만 100년 전에는 이 길이 피로 가득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무섭기도 하다”며 “그럼에도 꿋꿋하게 길을 나아갔던 당시 사람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고 소감을 전했다.
3.1운동에 대해 본교 김경남 교수(인문대 사학)는 “3.1운동은 민중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몸부림이었다”며 “오늘날의 학생들도 이러한 역사의식을 지니고 우리의 시대적 사명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늘날 재연 행사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을 100년 전의 3.1운동. 당시 대구 시민들의 ‘몸부림’은 어떻게 전개됐을까?

1919년 3월 8일 "대한 독립 만세!"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에 장이 서는 날이었다. 대한 독립 만세 선창을 신호로 결집한 학생들과 장터의 시민 7백여 명이 도심으로 행진했다. 대구·경북의 첫 독립 만세운동이었다. 시위대는 동성로 진입 후 달성군청까지 나아갔지만 대구 주둔군인 일본군 80연대 병력과 헌병 경찰의 무차별 공격과 검거로 해산됐다. 경찰에 검거된 인원은 157명이었으며 심문 후 67명이 구속돼 재판에 회부됐다. 재판 대상은 교사와 학생, 농민과 잡화상 등으로 다양했다는 점에서 각계각층 시민들의 능동적 참여로 만세운동이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이어 남문시장에서 3월 10일, 30일 두 차례에 걸친 만세 시위가 있었다. 이로 인해 시위 주도 세력 대부분이 체포됐으며 군경을 통한 일본의 통제가 강화됐다. 8일, 10일 시위에서는 총 75명이, 30일 시위에서는 10명이 실형을 선고 받았다. 김경남 교수는 “목숨이 위험함에도 어떠한 일에 뛰어든다는 것은 당시 상황이 말할 수 없이 힘들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며 “조선총독부의 폭압적인 지배 가운데 일본인들 대부분이 대지주로 자리 잡아 토지 지가를 움직이고 상권도 장악하니 조선인들 입장에선 숨통이 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독립을 바라는 일념으로 불나방과도 같이 뛰어들었기에 그 정신이 숭고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30일 시위가 진행되고 이틀 뒤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철시 시위를 벌였다. 8일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 김수길을 중심으로, 31일 밤 대구 시내 상인들을 대상으로 한 철시시위 촉구 유인물 배포가 시작이었다. 4월 1일 아침, 상인들은 이에 호응해 일제히 폐문 철시를 단행했다. 2일 아침에도 전날 철시에 참여했던 상인 일부 및 서문시장 부근 조선 상인들이 철시 시위를 단행했다. 이에 김 교수는 “3.1운동이 역사적인 거사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최초 시위 또는 유명 인물에만 주목해왔지만, 후에 농민과 상인들의 파업 및 투쟁이 이 운동의 영향을 받아 계속 이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며 “3.1운동의 폭발력으로 민중이 자신감을 갖고 조직력을 기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민중의 움직임까지 함께 조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3월 8일 서문시장 시위를 시작으로 만세 시위는 두 달간 경상북도 각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안동과 영덕 등지에서는 관공서를 부수거나 점령하는 형태의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도 만세운동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기에 조선총독부는 무력 진압과 함께 친일 관리 및 조선인으로 구성된 ‘자제단’을 조직해 방책을 강구했다.
4월 6일 대구에서는 발기인대회를 통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자제단이 결성됐다. 자제단은 만세운동을 국권 침범으로 규정해 ▲만세운동 직접 진압 ▲만세운동 참여를 막기 위한 조선인 회유 ▲독립 및 항일 선전·선동자들을 적발 즉시 경무관헌에게 신고할 것을 서약하도록 강요했다. 자제단은 행정구역 단위의 구를 기준으로 구장과 찬성원을 통해 구민 전체를 가입 대상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각 구장들이 일일이 가구들을 방문해 가입을 강요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표시했으며 구장들이 야간에 봉변을 당하거나 협박장을 받기도 했다. 결국 자제단은 기대만큼의 실적을 낼 수 없었다. 
이후 4월 17일 만세운동을 계승한 비밀결사 ‘혜성단’이 조직됐지만 5월 초 경찰에게 발각됨으로써 대구 3.1운동은 끝을 맺었다. 전국 대중운동이었던 3.1운동 또한 끝을 보였지만 이후 3.1운동의 영향력은 중국 상해임시정부, 미국, 호주 등 국외로도 퍼져나간다. 


출처: 이윤갑 외 6인(2019). <영남의 3.1운동과 만주의 꿈>. 경북대학교출판부 / 김일수(2019). 3.1운동 정신으로 바라 본 대구 시민운동의 과제와 전망. <3.1운동 100주년, 대구의 기억과 성찰> / 허종(2019). 대구지역 3.1운동의 전개 과정과 성격. <3.1운동 100주년, 대구의 기억과 성찰>


이한솔 전임기자
유동현 기자/ydh17@knu.ac.kr


대구·경북의 여성 독립운동가들

국가보훈처에서 훈장과 포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15,180명, 그중 여성은 전체 2%인 357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확인된 수치와 달리, 항일독립운동 역사에서 많은 여성들은 단순한 조력자나 주변인으로만 남지 않았다. 어떤 여성은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남편을 대신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부모를 봉양하고 자녀들을 또 다른 독립투사로 키웠다. 말하자면 일종의 보급병이자 취사병이기도 했다. 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고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고 군수품을 운반했다. 실제로 총을 쥐고 일본을 겨누거나 혈서를 쓴 여성 투사도 있었다. 교복을 입고 거리로 뛰쳐나가 대한독립을 부르짖은 학생도 있었다. 사회주의자로 제국주의에 투쟁한 지식인도 있었다. 다양하고 능동적인, 그러나 아직 현재에는 제대로 호명되지 않은, 기록되지 않은 주체들이 그 시대에 존재했다.
3.1운동은 여성이 전통적 관념을 뛰어넘어 시대의 주체로서 구국운동에 뛰어들게 된 중요한 사건이기도 했다. 여성의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은 남성에 비해 찾기 어렵지만, 3.1운동의 경우 재판기록을 통해 그나마 객관적 자료를 확보하기 용이한 편이다. 3.1운동에 참여한 대구·경북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일부 기록을 찾아봤다.

50여 명의 신명여학교 교사와 학생

1919년 2월 24일, 경상도 독립 만세운동의 연락책임자였던 이갑성이 대구로 와 지역의 독립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당시 신명여학교를 졸업해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임봉선(1897~1923, 경북 칠곡)이 이 소식을 들었다. 임봉선은 계성중학교·대구고보·성경학교 학생들과도 연락을 취해 3월 8일 서문외 장날, 연합시위를 하기로 결의했다. 3월 8일 오후 3시경, 임봉선은 신명여학교 학생 50여 명을 이끌고 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합세해 시가지를 행진했다. 시위 대열이 경찰서 앞의 저지선을 뚫고 중앙파출소를 돌아 달성군청 앞의 삼각지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헌병, 경찰은 기관총을 들이대고 군중을 구타, 검거하기 시작했다. 임봉선은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유증으로 27세에 별세했다.
그 자리에는 신명여고 졸업생 이선애도 있었다. <독립운동사>에 따르면. 한국인 경부가 그의 팔을 잡고 만세 시위를 못하게 하자, 경부의 뺨을 격렬하게 치고 엄히 책망하기를 ‘너는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으며 무엇 때문에 여자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느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대구여성가족재단 최세정 연구위원이 지난달 28일 대구시민주간 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이선애는 10년 가까이 ‘이선희’라는 남성으로 기록된 채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선애는 6개월 실형을 받았고 복역 후 기독교 전도 활동 및 여성 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역시 31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했다.
당시 일본 경찰은 신명여중 학생 21명과 교사 2명을 구금했다. 그중에는 이재인 징역 1년 6개월, 유인경 징역 1년을 선고받은 기록이 남아있다.

경북의 김락과 신분금, 윤악이

안동의 김락(1863~1929)은 양반 독립운동가 집안의 딸이자 독립운동가 집안의 며느리,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아내였으며 그 스스로도 독립운동가였다. 안동의 예안 시위는 일본이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리는 것을 시작으로 총 2차례, 3월 17일·22일에 일어났다. 김락은 이 시위에 참여하다 수비대로 끌려갔다. 그는 신문 과정에서 받은 고문으로 두 눈을 실명했고 11년 동안 고생한 끝에 1929년에 별세했다.
영덕의 신분금(1886~), 윤악이(1897~1962)는 남편이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검거되어 같은 처지에 함께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3월 24일, 영덕 원전동 시장에서 두 사람은 독립만세를 불렀고 신분금은 징역 6개월, 윤악이는 8개월을 선고받았다.
그 외에도 대구·경북에는 차보석, 이희경, 정칠성, 이춘수, 백신애 등 기록이 확인되거나 아직 추서 받지 못한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심옥주 소장은 “특히 그 시대에도 청년으로서 여러 고민이 있었을 여학생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움직였다는 사실은 100년이라고 하는 시대를 뛰어넘어 가슴 속 울림을 준다”며 “지금까지의 역사가 남성 위주로 기록돼왔기 때문에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과 민중의 기록과 정신을 담아내는 것이 100주년의 의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현 정부 들어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나 발굴된 인물에 대해 자세히 조명하고 알릴 수 있는 체계는 잘 갖춰져 있지 않다”며 독립운동가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 정부의 장기적인 계획 마련을 필요성을 강조했다.


출처: 공훈전자사료관 / 최세정(2019). 3.1운동과 대구 여성. <3.1운동 100주년, 대구의 기억과 성찰> / 한재숙(2015). 경북 여성 독립운동의 특성과 의미. <젠더리뷰> 


김서현 전임기자
편집: 이연주 기자/lyj17@knu.ac.kr


▲지난 1일 달성공원부터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까지 대구 만세운동 재연 행진이 이어졌다. 참여 시민들이 태극기와 풍선기를 들고 행진을 준비하고 있다.


▲만세운동 재연 행진 도중 동성로 도로에서 3.1운동 재연 연극이 진행됐다. 학생이 일본 순사의 총에 맞아 태극기를 떨어뜨리며 쓰러지고 있다.


▲3.1운동 당시 대구에서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계성·신명고등학교 학생들도 의복을 입고 행진에 참여했다. 신명고등학교 학생들이 행진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재연 행진에는 어린이들도 다수 참석했다. 무도인 순찰대 소속 어린이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만세운동 재연 행진에 동참하고 있다.


사진: 유동현 기자/ydh17@knu.ac.kr, 김서현 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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