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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기획

목소리로 세상을 연기하는 사람

전숙경 성우(인문대 중어중문 93)


“다시 갈게요. 여자 들어갑니다, 큐!”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녹음실, 똑같은 대사를 수차례 반복하는 이들이 있다. 목이 메어 큼큼 헛기침을 하기도 하고, 방금 녹음한 대사가 너무 빠르지는 않았는지 엔지니어에게 묻기도 한다. “시간 괜찮아요? 1초 더 빨리 할까요?” 단 1초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계산하며 말하는 사람들, 바로 성우들이다.

주요 언론에서조차 ‘목소리의 힘’을 논하며 명료한 발음과 정제된 목소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요즘이다. 이 ‘목소리’를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전숙경 동문을 만나 물었다. 성우(聲優), 뛰어난 소리로 세상을 표현하는 직업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Q. ‘성우’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A. 중학생 시절 김기덕 DJ의 ‘2시의 데이트’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즐겨 들었다. 특히 일요일 오후에 한 시간씩 가요 한 곡을 주제로 삼아 진행하는 라디오 드라마를 꼬박꼬박 들었다. 당시 송도영 성우와 양지운 성우가 남녀 주인공이었다. 처음 우연히 그걸 듣게 되니 너무 재미있었다. “이게 뭐지?” 싶더라. 성우라는 직업이 뭔지도 모를 때였다. 그때부터 “이런 직업도 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때 국어 선생님 덕에 ‘방황하는 별들’이라는 청소년 연극을 무료로 보게 됐다. 그 무대를 보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막 뛰고 “내가 저기 올라가야 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처음에는 성우보다 연기와 연극에 좀 더 관심을 가졌었다. 그래서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연극부에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경명여자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문제는 이 학교에 연극부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방송부에 들어갔다. 방송부 생활을 하면서 방송부 언니들로부터 호흡하는 법, 발성하는 법, 멘트 읽는 법 등을 배웠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1학년, 2학년 학생들이 어떻게 그렇게 잘했나 싶다. 그때 방송부 언니들의 실력이 현재 성우들과 비슷할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렇게 배워서 학교 방송제 같은 것을 진행하곤 했다. 대학 입학 후에도 본교 교육방송국 KNUBS의 아나운서로 활동하며 자연스럽게 꿈을 키웠다.

 

Q. 성우의 어떤 점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나?

A. 되게 많다. 나한테는 정말 딱 맞는 직업이다.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어떤 것을 시키는 걸 싫어하고, 정해진 룰이 많은 조직체도 싫어한다. 성우라는 직업이 참 아이러니한 게, 콘텐츠 제작자로부터 캐스팅되는 직업이다 보니 어떻게 보면 꽤 수동적일 수 있다. 반면 스케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참 능동적이고 자유롭게 느껴진다. 출퇴근 시간도 따로 없으니 부담도 없다. 또 매일 다른 일을 하니 너무 새롭다. 똑같은 일이 없다. 하나의 배역을 맡아 계속 일을 해도 녹음할 때마다 그 배역이 처한 상황이 달라지지 않나. 정말 단점이 별로 없다. 내 직업 만족도는 100퍼센트다.


Q. 중어중문을 전공하다가 성우가 된 것이 특이하게 느껴진다.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A. 나는 중국어와 잘 맞는다. 당시 장국영, 주윤발, 장만옥 등 홍콩 배우들이 우리 세대의 우상이었는데, 그 영향을 받아 중국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막연히 중국어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중어중문학과에 입학을 했는데, 다행히 중국어 발음 등이 나와 잘 맞았다. 정말 재밌게 공부했다. 그래도 성우가 되고 싶다는 꿈이 제일 중요했기 때문에 전공과 무관하게 성우 시험을 봤다. 그 후에는 전공을 살릴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말과 중국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성우가 거의 없다 보니 이게 장점이 됐다. 게임 ‘오버워치’의 중국인 캐릭터 ‘메이’ 역을 맡을 때에도 내가 중국어를 할 줄 알기 때문에 캐스팅된 것이었다. 이 외에도 중국어 교재 관련 녹음 등도 자주 맡는다. 덕분에 전공을 생각보다 많이 살리고 있는 것 같다.


Q. 성우가 가져야 하는 자질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A, 제일 중요한 건 공감 능력과 감수성이라고 생각한다. 성우는 목소리로 연기를 하는 사람이다. 연기라는 건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이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맡을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한다. 그게 없으면 캐릭터의 껍질만 연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평소에 독서를 많이 하고, 영화 및 연극 감상을 많이 해봐야 한다. 그렇게 공감 능력과 감수성을 차곡차곡 길러둔 후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는 거다. 공감하는 능력, 이해하는 능력은 한 번에 키워지지 않는다. 성우는 주는 대본을 그대로 읽기만 하는 직업이 결코 아니다. 배우들이 대본을 받고 어떻게 연기할지 고민하듯 성우들도 캐릭터 분석을 다 해야 한다.

 

Q. 19년차 베테랑 성우로서 활동 중인데, 본인이 맡았던 역할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역할이 있다면?

A. 외국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의 ‘크리스티나’ 역이 가장 인상 깊다. 사실은 담당 더빙 PD가 내게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맡긴 역할이었다. 당시 막 프리랜서가 돼서 오디션을 보던 때였다. 그레이 아나토미는 처음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원작지인 미국에서조차 후속 시즌을 염두하지 않은 드라마다. 여기에 ‘산드라 오’라는 한국계 배우 한 명이 출연하는데, 그 역할이 바로 크리스티나였다.

내가 그 드라마의 오디션을 볼 때 경쟁률은 20대1이었다. 그런데 정말 운이 좋게도 내가 됐다. 당시 그레이 아나토미 성우진들은 정말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었다. 나 말고는 거의 다 더빙 베테랑들이었다. 그래서 함께 녹음하게 된 성우 선배들도 매우 놀랐다. 내가 너무 신인인데 비중이 거의 주인공과 맞먹는 역할을 맡았으니까. 그러니 처음에는 우려가 많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정말 노력했다. 그러고 방송이 나가니 “크리스티나 역할 성우는 누구야?”하는 얘기가 나왔다. 나는 인지도가 없던 신인이니 기존 성우들도 모르고, 시청자들도 몰랐다. 그래서 크리스티나 역은 대체 누구냐며 녹음실, 방송국, 성우 선배들, 청취자들까지 다 묻고 다녔다고 했다. 그때 당시 기존의 외화 더빙 스타일과 조금 다르게, 일부러 말을 좀 더 툭툭 던지는 스타일로 녹음을 했었다. 그런 게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 드라마가 시즌 6까지 진행된 덕에 그동안 드라마 속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사를 전부 함께 했는데, 그게 나를 개인적으로 많이 성장하게 도와줬다. ‘그레이 아나토미’는 내 인생 작품이다.

 

Q. 더빙 콘텐츠는 다른 콘텐츠에 비해 공급이 다소 적은 편이다. 이에 대한 생각은?

A. 내가 어릴 때는 ‘맥가이버’와 같이 우리말로 더빙된 외국 TV 프로그램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TV가 아니면 매체에서 더빙판 콘텐츠를 접할 기회가 없던 시절이다. 지금은 매체가 워낙 많고 다양하다 보니 자막과 함께 나오는 원음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는 특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나 프랑스 등 해외 여러 나라에서는 자국어 더빙이 꼭 방송으로 나가도록 하고 있다.

더빙 콘텐츠가 약해지는 것은 콘텐츠를 제공하는 이들이 더빙이 아닌 원음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원음 콘텐츠를 제공하는 매체가 너무 많다보니 글을 잘 읽지 못하는 어린이나 노약자들에게는 더빙 콘텐츠가 매우 중요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적 취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것 같다. 자국어 보호 차원에서도 더빙 콘텐츠는 꼭 필요하다. 원음 콘텐츠는 수요가 많은 만큼 여러 다양한 매체에서 접할 수 있으니, 적어도 TV를 통해 송출되는 콘텐츠들은 우리말 더빙으로 더 자연스럽게 나갔으면 좋겠다. 더빙 콘텐츠의 저변을 더 넓혀줬으면 한다.

문화 예술 인프라의 대부분이 너무 수도권에만 집중된 것도 문제다. 문화 예술은 지방분권화 돼야 한다. 대부분 방송사에 소속되는 우리나라 성우들과 달리 일본 성우들은 프로덕션에 소속된다. 일본에는 그런 프로덕션들이 지방에도 많이 위치해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서울에만 집중된 경향이 강하다. 요즘엔 인터넷이 발달돼 있으니 녹음실, 수입 배급사, 애니메이션 더빙사 등이 지방에 위치한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높은 퀄리티의 콘텐츠를 제작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분산돼야 좀 더 발전할 수 있을 것 같다.

 

Q. 현직인으로서 성우라는 직업의 전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A. 현직 성우들 사이에서는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더빙이 많이 줄어들면서 어려워졌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활동하는 19년 동안 성우계는 계속 불경기였다. 경기가 호황이다, 일이 너무 많아서 좋다,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또 없어지는 영역이 있다면 새로 생기는 영역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영화 더빙이 없어진 대신 인터넷 엔터테인먼트 ‘넷플릭스’에서 새로 더빙하는 게 많아졌다. 넷플릭스는 이용자가 콘텐츠의 더빙판과 자막판을 선택해서 볼 수 있게 제공한다. 그래서 넷플릭스 콘텐츠의 더빙을 하며 성우들은 또 바빠지기 시작했다. 또 요새는 인터넷 녹음시장이 많이 열리기도 했다. 항상 뭔가 하나 없어지면 또 하나가 생기기 마련이다.

 

Q. 성우를 희망하는 본교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서울엔 정말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어우러져 있다. 그러다보니 직업 선택의 폭도 매우 높아진다. 대구는 상대적으로 그게 적은 도시다. 진로체험 강사로 중·고등학교에 가서 교복 입은 친구들에게 장래희망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대다수가 공무원을 하고 싶다고 답한다. 공무원도 좋은 직업이지만 학생들이 그것 하나 밖에 모르는 점이 안타깝다. 그래도 요즘에는 인터넷이란 창이 열려 있으니 직업과 진로를 탐색해볼 길도 다양할 거라 생각한다. 혹시 성우가 꿈인 학생이 있다면 나에게 개인적으로 메일을 보내도 좋다.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다.

나는 후배들에게 교량이 돼주고 싶다. 성우뿐만 아니라 엔지니어, 피디 등 성우와 관련 있는 직업군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얼마든지 나서서 도와줄 의향이 있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직업들이, 재미있는 직업들이 많다. 내가 어떤 일을 할 때에 눈이 더 반짝반짝 빛나는지 고민해봤으면 한다. 도전을 정말 많이 해보면 좋겠다. 실패도 해보고. 적어도 20대 초반에는 정말 여한이 없게 이것저것 많이 해보면 좋을 것 같다.


▲전 성우가 인터뷰 질문에 열정적으로 답변하고 있다. 인터뷰에서 전 성우는 성우 지망생 시절 주변에 아는 성우가 없어 힘들었다고 말했다. 마지막에 전 성우는 성우가 되고 싶은 본교 후배가 있다면 꼭 도와주고 싶다고 전했다.

▲녹음실에서 버스 광고 녹음을 하는 전숙경 성우. 전 성우는 버스 광고 녹음에서 1인 2역을 소화하는 동시에 초 단위까지 신경쓰며 프로다운 능숙함을 보였다.


▲게임 ‘오버워치’의 ‘메이’(좌)와 영화 ‘코코’의 ‘이멜다’(우)는 전 성우가 맡아 연기한 대표적인 캐릭터들이다. 이외에도 전 성우는 19년 동안 서울 시내버스 안내방송, 만화 ‘썬더일레븐’의 ‘강수호’, 외화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의 ‘크리스티나’ 등 수많은 방송 및 광고와 캐릭터 연기를 맡아 활동해왔다.


글 조현영 기자/jhy16@knu.ac.kr

 사진 조선희 기자/jsh17@knu.ac.kr

 편집 이홍은 기자/lhe16@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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