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플’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악플은 악성 댓글(리플, reply)의 줄임말로, 인터넷상에서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조롱하기 위해 작성된 악의적인 댓글들을 일컫는다. 특정 인물을 향한 인신공격, 허위사실 유포, 저주 등이 이에 포함된다.악플은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한 직후부터 꾸준히 사회적 문제로 거론됐다. 단순히 누군가를 모욕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 그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이름이 잘 알려진 연예인이나 정치인, 공인의 경우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연인에 대한 공격까지 받게 된다. 인신 공격적 악플은 당사자에게 모욕감을 주고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만들며, 대인기피증이나 불면증, 우울증, 공황장애, 스트레스 장애 등 여러 정신적 피해를 입힌다. 심할 경우 최근의 몇몇 연예인 사례처럼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그런데도 현재까지 악플이 근절되지 않은 데에는 미약한 처벌이 한몫했다. 현행법상 사실 적시 혹은 허위 적시 명예훼손으로 인정될 경우 최대 7년의 징역과 5천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을 수 있지만, 대다수의 경우 악플 작성자를 고소하더라도 벌금형 1~300만 원 정도로 그치는 실정이다. 악플 작성자가
누군가는 변화를 바라고 있다. 거창한 변화는 아니더라도 나와 내 친구들이 다니는 이 학교가 더 즐거워지길, 더 편안한 곳이길 바란다. 그래서 학생들은 표를 던졌다.지난 10월 말 후보자등록부터 2주간의 선거운동, 3일의 투표기간까지. 약 한 달에 걸친 총학생회 선거가 막을 내렸다. 총학생회 선거는 작년에도 그랬듯 두 선본이 출마해 치열하게 맞붙었다. 단과대학 또한 작년에 5곳에 그쳤던 데 비해, 올해는 9곳이 선거를 치렀다. 그 중 과기대와 자연대는 경선까지 이뤄졌다. 2018년, 33년 만에 처음으로 총학이 출범조차 하지 못한 해였던 것을 돌이켜보면 놀랍다. 이는 단순히 학생회라는 작은 조직만의 성과가 아니다. 꾸준히 신뢰를 쌓아간 학생회, 용기 있게 출마를 택한 후보들과 그들을 밤낮으로 뒷받침한 선거운동원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을 관심 있게 살피며 표를 던진 학생 개개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올해 총학 선거의 키워드는 ‘참여’와 ‘생활밀착형’이었다. 스케치 선본은 ‘권리’, 하나 선본은 ‘복지’에 각자 방점을 찍었지만, 두 선본 모두 학생 생활과 복지에 집중된 공약을 내놓았다. 전반적으로 학생회 인지도가 낮은 분위기에서 두 선본은 총학이 학생들에게
지난 5월 생활관 축제에서 관생자치회(이하 관생회) 임원들이 관생에게 나눠줄 경품을 임의로 사용했다는 사실이, 지난 4일 관생회 전 부회장의 입장문을 통해 뒤늦게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다. 이후 일부 관생회 임원들의 사과문 및 입장문을 통해 전 부회장 또한 해당 행위에 암묵적으로 동조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관생들 사이에서 관생회 전반에 대한 비판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먼저 해당 경품은 관생회가 생활관 행정실로부터 받은 축제 명목 예산으로 구매한 것으로, 곧 관생들이 납입하는 생활관비의 일부였다. 관생의 생활관비로 구매한 상품인 만큼 관생회는 경품 증정 및 처리 과정을 투명하게 관리할 의무가 있었다. 이번 사건은 경품 관리 미흡뿐만 아니라, 현재 생활관비 관리 과정에서 투명성과 엄정성이 제도적으로 잘 갖춰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뒤늦은 사실 공개와 사과 표현 또한 문제의 단면이다. 관생회는 이 사건을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여기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사건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을지 재고하고 시스템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해당 사건을 통해 관생회의 운영 전반에 대한 관생들의 비판 여론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 또한 안타까
지난 11월 3일은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지 90주년 된 날이다. 1929년 10월 30일 전남 나주역에서 발생한 일본 남학생의 한국 여학생 희롱사건에 분노한 광주 학생들의 시위가 11월 3일 시작됐다. 11월 12일 2차 항일시위가 광주에서 대규모로 진행되었고, 이 소식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12월 초부터 개성, 인천, 원산을 비롯하여 함경도와 평안도 등지에서도 항일시위가 격화됐다. 항일운동은 일본과 중국, 연해주와 쿠바, 멕시코까지 확산됐다.1930년 1월 중순부터는 도시뿐 아니라, 읍면의 보통학교(오늘날의 초등학교) 학생들까지도 시위에 동참했다. 학생들은 시험거부, 백지동맹, 동맹휴업, 격문살포, 교내시위, 거리시위 등을 통해 항일과 독립을 외치며 투쟁의 최전선에 나섰다. 전국으로 확대된 학생운동은 1919년 3.1운동 이후 일어난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194개교 5만4천여 명이 참가했다.학생운동이 일어난 지 90년이 되는 2019년, 얼마나 많은 학생이 그날의 함성과 분노와 저항과 투쟁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가?! 광주학생운동기념탑에 새겨진 두 문장은 많은 것을 웅변한다.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