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친구에게 사람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 찍을 수 있는 카메라는 왜 없냐고 물었다. 친구는 그런 것쯤은 이미 발명됐을지 모른다고, 그러나 비싸서 구매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런 카메라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렸을 때는 당시 쓰던 카메라 자체가 눈에 보이는 대로 찍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메라란 원래 그런 물건인줄 알았다. 인간의 좌우 시야각은 거의 180도에 가깝다고 한다. 인간의 시야에 가까운 광각렌즈도 분명있다. 그렇지만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쓰던 디지털 카메라는 화각이 좁았고 휴대폰 카메라 역시 인간의 시야에 들어오는 넓은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내지 못해 아쉬웠다. 눈으로 봤을 때의 아름다움은 사각 프레임 속에만 들어오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프레임 밖의 모습까지 이미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에 머릿속으로는 프레임 안팎이 모두 보이는 그대로의 사진을 기대했던 것 같다. 카메라 라는 기계에 많이 의존했다. 사진이 찍고 싶은 순간, 내 눈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 셔터를 누르면 그 순간이 카메라에 담길 것 같았다. 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난생 처음 대만여행을 갔을 때, 낯선 나라의 모습을 꼭 남기고 싶어 열심히 사진을…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우리 아버지는 내가 노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셨다. 뛰어다니며 놀거나 게임을 하고 있을 때면 청춘을 낭비한다고 생각하셨다. 오직 독서와 공부만이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것이며 의미 있는 일이라 말하곤 했다. 그러나 15살의 어린 소년은 공부를 잘하지 못했고 흥미도 없었다. 아버지는 나를 못마땅해 했다. 나는 이유모를 죄책감에 시달렸고 무엇이든 완벽하게 하려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내가 못해본 것을, 관심도 없는 것을 잘할 수 있을리 만무했다. 이 생각은 끔찍하게 변이 되서 ‘완벽하지 못할 것 같으면 안해야지’로 번졌고 나는 안 될 것 같으면 쉽게 포기해버리곤 했다.취업포털 ‘잡코리아’에서 출판사 시공사와 함께 남녀 직장인 1176명을 대상으로 완벽주의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직장에서 완벽주의를 추구한다'고 답한 응답자가 전체 67.2%를 차지했다. 그 중 '완벽주의가 업무성과를 높인다고 생각하는가'란 질문에는 '그렇다'는 응답이 전체 61.3%로 가장 많았다. 한편 '완벽주의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아니다'는 응답이 전체 75.9%로 가장 많았다. 완벽주의가 업무성과를 높힐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시시때때로…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르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 ‘혀 아래 도끼 들었다’ 등 예부터 말의 힘을 전하는 속담들이 많이 있어왔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소피스트들을 일찍이 언어의 힘을 알고 언어를 잘 구사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했다. 현대사회에서는 언론기관이 소피스트처럼 언어의 힘을 파악하고 이용한다. 하나의 진실도 언론이 전하는 언어, 단어 하나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둔갑된다. 전쟁을 다룬 보도가 대표적이다. 한 국가에게는 ‘급습’이 상대 국가에게는 ‘침략’으로 표현된다.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언어에 대해 순진하게 접근한다. 단어를 단순히 사물, 관념을 가리키는 개념쯤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단어가 어떤 사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여주는 것만큼 그 사물을 상대에게 표현해 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언어는 단순한 지시 그 이상으로 복잡 미묘하다. 추상적이며 부정확하고 때로는 감정을 담고 전달하기도 한다. 그래서 같은 사물을 말하더라도 사용하는 단어에 따라 전달하는 의미와 느낌이 달라진다. 2007년 충남 태안반도 앞 바다에서 삼성중공업 크레인 선박이 홍콩 소속 유조선 허베이스피리트호에 충돌해 원유 1만 9백 톤의 기름이 유출됐다. 당시 한
며칠 전 퇴거를 앞둔 독거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현장에는 “고맙습니다. 국밥이라도 한 그릇 하시죠. 개의치 마시고”라고 적힌 봉투와 10만원 가량의 현금이 있었다. 최근 다큐멘터리를 찍는 과제 때문에 쪽방촌에 다녀온 나로서는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본 쪽방촌의 모습은 유명 시사다큐 프로그램에서 본 모습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이야말로 쪽방촌에 거주하는 독거노인들의 단면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대구 중구 달성동에 위치한 한 쪽방촌에는 각설이 삼돌이 아저씨가 사신다. 밝아 보이는 아저씨에게도 슬픈 사연은 있었다. IMF 때 사업실패 이후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물론 10살 때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져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술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형제라고는 여동생 하나가 전부지만 여동생마저 어렸을 때 잃어버리고 찾지 못했다고 한다. 여동생에 대해 묻는 말에 아저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내 말을 잇지 못하셨다. 아저씨는 50살이 넘은 나이에 내 집을 마련하고, 결혼해서 소박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꿈이라고 하셨다.옆집에 사는 할머니는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가 없어 음식을 제대로
“무슨 과세요?” 이 말은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인사말같이 상투적으로 묻는 질문이다. 나 역시도 이런 질문들을 자주 하고 자주 받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이런 질문이 ‘편견’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처음 만난 사람끼리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전공이나 학과가 때로는 중요한 정보가 될 수도 있다. SNS나 커뮤니티에서도 전공이나 학과에 관련된 우스갯소리나 유머 글에 대한 반응들이 뜨겁다. ‘학과 별 그럼 이만’이나 ‘학과 별 많이 듣는 소리’가 가장 대표적이다. 심리학과 학생들에게 “‘내 생각을 맞춰봐’ 같은 소리 하지마세요. 난 지금 내가 왜 공부를 안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으니까. 그럼 이만.” “컴퓨터 공학과야? 내 컴퓨터 좀 고쳐줘”는 대표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에피소드이기도 하다.이런 시리즈나 유머 글들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의 현실이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나 역시도 이러한 유머 시리즈들에서 다른 사람들이 겪은 것과 같이 전공에 대한 웃지 못 할 경험을 종종 했다. “명함이나 포스터 하나만 만들어 줘” 혹은 “그림 잘 그리겠네? 여기에 내 얼굴도 그려줘”라는…
이번 해에 나는 수도 없이 부서졌다. 많은 경험을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나를 만나게 됐고 그런 만큼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나를 부서뜨렸다.사람들은 과거의 나를 통해 자신을 한정한다. 과거의 경험, 추억으로 비추어 나의 성향, 기호, 능력을 한정한다. 그래서 나는 수학문제는 쉽게 풀었지만 받아쓰기 시험에서 40점을 맞고 책을 싫어했던 유년시절을 기억하며 내가 이공계열에 적합한 학생이라 판단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15년 동안의 내가 흔들렸다. 문학과 시가 재미있고 사회수업이 기다려졌다. 하지만 이 모습은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아니었다. 나는 예전부터 수학과 과학을 잘하고 글 읽기와 쓰기를 싫어하는 학생이었다. 결국 나는 이공계열을 선택했고 대학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19년이라는 시간을 통해 파악했던 내 모습은 나의 전부가 아니었고 나는 C언어에 굴복했다. 그리고 나는 수학을 좋아하는 그때까지의 나를 떠나보내고 글을 좋아하는 새로운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시 수능을 쳤고 경북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다. 이제껏 관심을 가지고 다루어왔던 것과 다른 성격의 학문을 배우면서 나는 계속해서 새로운 경험을 했다.내성적이어서 학원 옆
머리가 커졌으면 좋겠다. 모델 같은 작은 사이즈의 머리 크기가 찬양받는 사회에서 웬 말이냐 싶겠다. 물론 외모지상주의와 함께 성장한 나에게 이 머리는 물리적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머리는 질문의 머리를 말하며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질문의 서론이고, 둘째는 질문에 담겨진 생각이다.질문에서의 서론은 단순히 날씨가 좋네요, 식사 하셨어요? 같은 인터뷰 초반의 안부 물음이 아니다. 서론은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질문에 관한 답을 들으려 설명하는 배경을 뜻한다. 기자를 시작한 초반에는 ‘어떻게 생각하세요?’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 사안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담당자가 알아서 말해 주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전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어느 범위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음 그러니까 그것에 대해서 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아니, 그러니까…’ 뭘 어떻게 말하라는 건지 앞뒤 설명 없이 질문하는 나도 내가 답답했지만 수화기 너머에선 꾸역꾸역 답이 왔다. 이런 식으로 전화를 해도 대답을 잘 해주는 사람이 있어 내 버릇은 더욱 나빠졌다. 그 때문인지 한 부처의 담당자 선생님께서 다음 취재 때는 공부하고 오라는 말씀에 엄청나게 뜨끔했다. ‘이
타지에 사는 내가 처음 대구에 와서 ‘대구스럽다’라고 느낀 건 단연 사투리였다. 경기도에서 태어나 그 지역 안에서 보고 느낀 것이 마치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던 나에겐 신선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느낀 사투리에는 단순히 나와 다른 것을 넘어 대구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무언가가 있었다. 삶, 그 자체와 맞닿아 있는 사투리는 그 지역에서 향유할 수 있는 어떤 문화보다 친근하고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문화부 기자로서 처음 내놓은 기획 아이템 역시 사투리에 대한 것이었고, 사투리는 더 이상 조폭들을 표현하는 저급한 말씨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문화란 단순히 고상한 예술이나 지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문화도 그런 것이었다. 간혹 우리는 평소 쉽게 즐길 수 없는 비싼 뮤지컬이나 오페라만을 진짜 문화생활이라고 여기는 착각을 하곤 한다. 우리가 흔히 ‘메이저’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이미 거대 기획사에서 수도 없이 밀어주는 콘텐츠를 굳이 대학 신문에서까지 다뤄줘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지난 학기동안 더욱 인디(indie) 문화에 집중했다. 인디는 음악에서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