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 학술면에서는 개항이후부터 해방이 되는 해까지 사회 각 방면의 친일파들에 대해 그 인물에 중심을 두어 살펴보려 한다. 그 선정 기준은 식민지하의 친일, 반민족 행위 정도와 해방이후 한국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동시에 고려하되 후자의 경우 그들에 의한 식민유산의 재생산과정에 초점을 둘 것이다. -엮은이-

지난해 10월 김근태 현 민주당 부총재 등 수많은 민주화 운동 관련 인사들을 고문하였던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10여년 넘는 도피 생활 끝에 자수했다. TV를 통해 그의 모습의 지켜 본 사람들 가운데에는 환갑이 넘어 반백이 된
머리며 고생 빛이 역력한 몰골에 연민을 느낀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지탄과 연민이라는 상반된 감정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 동안 우리는 우리 사회의 어두웠던 한 단면인 '고문'을 이근안이라는 한 사람에 국한시켜 생각했고 그런 만큼 악마화 되었던 그의 이미지가 실제 모습과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고문과 강압에 의한 수사 방식은 한국 경찰에서 일종의 '관
행'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처럼 좋지 못한 '관행'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우리의 인식이 거슬러 올라가는 지점은 일제시기. 거기에서 특히, 사상범이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최고위직
인 경시에 오른 친일 경찰 노주봉(盧周鳳)과 대면하게 된다.

해방직후인 45년 10월 광주 구시청 앞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렸고 당시 미군정하 전남 도경찰 부장을 맡고있던 이가 쓰러졌다. 그는 불과 두달 전까지만 해도 총독부 경찰의 경시(지금의 경무관)였던 노주봉이었다. 그가 어떠한 경로로 미군정의 고위직에 발탁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해방 후 친일파가 친미파로 다시 반공투사로 변신을 거듭하였다는 사실을 보면 이것이 특이한 경우는 아니었다.

당시의 '총독부직원록'에 의하면 노주봉은 1901년 나주에서 출생하였고 20년대 중반 경찰에 발을 들여놓았다. 27년 전라남도 경찰부 보안과 순사부장으로 발탁된 이후 줄곧 사상 관계사건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되어있다. 노주봉은 그 즈음 발발했던 광주학생운동 관련자들의 수사를 맡게 되었는데 당시 노주봉에게 취조를 당했던 학생들과 독립운동가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특히 학생들에게 가장 악랄하고 잔인한 고문을 가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를 계기로 노주봉은 총독부 당국에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악행은 그 정도를 더해갔으며 마침내 경시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
다. 노주봉을 비롯한 일제 정보과 또는 고등계형사들의 고문 수법은 무차별 구타에서부터 철봉을 팔 다리사이에 끼우고 주리를 틀고 메다는 이른바 '통닭구이', 사람의 코와 입을 수건이나 솜으로 틀어막고 고춧가루 물을 퍼붓는 '물고문' 그리고 전기고문, 성고문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했다. 이 같은 고문 수법들은 대부분 해방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왔으며 그 대상도 주로 사상관계 사건과 '정권안보'에 위해를 끼치는 사건으로 비슷한 것을 보면 해방 후에도 한국사회가 얼마나 일제 잔재 청산에 무감각한 사회였는지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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