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는 마침내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현대 사회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담아낸 걸작”

이는 칸영화제에서의 영화 ‘기생충’에 대한 평가이다. 사실, 영화 보는 것을 즐기기는 하지만 평론가와 같은 날카로움도 없고, 풍성한 해석도 할 줄 모른다. 그런 나에게는 이 표현이 그저 흔히 있는 코멘트로 보였다. 영화를 ‘잘 알지는 못하는(영화를 읽어내기보다는 느끼고 즐기는)’ 일반 대중 관객으로서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는 영화는 난해하거나, 지루하거나, 복잡하거나, 대단한 의미를 품고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걱정의 뿌리였다. 특히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를 가장 좋아하는 팬으로서 화려한 축제에서 번쩍이는 상을 받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기대감을 낮췄다.

기우였다. 역시 봉준호는 실망시키지 않았다. ‘봉준호가 하나의 장르’라는 표현은 화려한 미사여구로 포장한 오글거리는 극찬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영화와 감독을 가장 적확하게 묘사한 것이었다. 드라마와 코미디로 시작한 영화는 어느 순간 공포와 스릴러물로 변신하는 듯하더니, 또다시 범죄와 성인물을 아슬아슬하게 건드리다가 시대극 혹은 다큐멘터리로 끝이 난다. 당최 하나의 장르로는 묶을 수가 없는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느끼는 감정의 폭이 굉장히 넓다. 웃기고, 무섭고, 긴장되고, 슬프고, 답답하고, 공감되고, 씁쓸하다.

이번 작품에서도 봉준호의 상징 집착은 여전하다. 영화 장면 하나하나, 소품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가 있다. 그런데도 그 의미들은 고상하지 않다. 대단한 배경지식이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상징으로 가득한 영화는 그 자체로서 문화 권력이다. 있는 사람들과 배운 사람들, 아는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문화는 때로는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봉준호는 소박한 사람이다. 소박한 천재인 그는 문화 권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상징들은 무겁지 않지만 울림을 준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현란한 어휘로 표현을 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것에서 ‘무언가’를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한국인인 덕분에 머리로 이해할 필요 없는 한국적 정서는 덤이다.

영화가 막을 내리고, 얼핏 본 관객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다들 돌덩어리라도 하나씩 가슴에 품고 나오는 듯했다. 그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숨 막히도록 무거운 영화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웃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작품을 자막 없이, 날 것 그대로 볼 수 있다는 데에 감사했고 행복했다. 영화 보기 전 걱정의 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다른 수식어를 굳이 붙일 필요가 없다. 이 영화는 봉준호의 영화다.

옥동진

(인문대 노어노문 12)

저작권자 © 경북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