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년 빌헬름 폰 훔볼트가 베를린에 세운 훔볼트대학의 설립이념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교수와 학생이 함께하는 자유롭고 평등한 학문 공동체.” 자연과학에 바탕을 둔 훔볼트대학이 근대대학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까닭은 설립이념에 있다. 설령 국왕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타당하지 않으면 교수는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존재로 규정된다. 학생은 학문에 모든 것을 바치는 연구자의 전형을 의미한다고 전해진다.

대학의 주축이자 날개인 교수와 학생은 학문을 매개로 공존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폰 훔볼트는 생각한 것이다. 훔볼트대학 총장을 역임한 헤겔의 사상에 매료됐던 마르크스는 사유하고 인식하는 철학을 넘어서 실천하는 철학적 명제를 남긴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그저 다채롭게 해석해왔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27세 청년이 남긴 이 명제는 오늘날에도 세계변혁의 초석으로 작용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에서 학생과 교수가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학부생과 대학원 석박사과정생이 교수의 학문적 성취에 도전장을 낼 정도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학문 공동체가 있느냐가 문제다. 권위적이고 억압적이며 엄격하고 근엄한 교수와 의존적이며 수동적이고 굴종적인 학생 사이에서라면 수평적 관계 설정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런 풍경이 해마다 5월 15일 ‘스승의 날’ 행사에서 반복되고 있다.

우리의 학문적 성취나 방법론이 대개의 경우 수입되고 이식된 것이어서 자생력이 약하다는 문제점도 있다. 교수의 학문적 위치가 지식 소매상 수준에 머물러 있음에도 그를 바라보는 세간의 인식과 학생들의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양자의 괴리가 우심한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정이 이럴진대 우리는 아직도 ‘돈독한 사제관계’나 ‘인간애로 맺어진 교수와 학생 관계’를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21세기 문명사적 전환기에 그 시의성을 다했다고 판단한다.

전통사회 내지 산업화시대의 덕목을 가지고 제4차 산업 혁명기의 교수와 학생 관계를 규정하고 평가함은 불가하다. 우선적으로 우리는 학문 공동체로 부를 만한 진정한 대학, 대학다운 대학을 만들어야 한다. 대내적인 자생력과 대외적인 파급력을 가진 학문체계를 창출하고, 그것에 적절한 교수와 학생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지나간 세월의 관행과 암묵적 동의 아래 이뤄지는 돈독함과 인간애와 작별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힐 관계를 사유해야 한다는 얘기다.

충실한 연구원이자 봉급쟁이로 전락한 교수와 일자리 얻는 수단으로 대학을 생각하는 장삿속의 학생이 어떤 발전적이고 의미심장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사회-정치적인 불평등 같은 인류 보편의 문제를 천착하고, 인공지능로봇이 활보할 미래를 사유하며, 자유와 평등, 형제애를 구현할 원대한 방도를 고뇌하는 교수와 학생이어야 비로소 21세기 대학의 학문 공동체는 가능할 것이다. 어제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것이 그 길을 향한 첫걸음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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