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08 (금)

  • 맑음동두천 9.5℃
  • 맑음강릉 14.0℃
  • 맑음서울 9.9℃
  • 맑음대전 13.3℃
  • 맑음대구 15.3℃
  • 맑음울산 12.0℃
  • 맑음광주 12.2℃
  • 맑음부산 12.6℃
  • 맑음고창 7.2℃
  • 맑음제주 10.5℃
  • 맑음강화 5.0℃
  • 맑음보은 12.0℃
  • 맑음금산 11.9℃
  • 맑음강진군 11.9℃
  • 맑음경주시 12.5℃
  • 맑음거제 12.2℃
기상청 제공

대학시론

종이 신문과 만나기 - 경북대신문과 친해지기

“경북대신문의 현재 및 미래에 대해서 고찰이나 제안을 시론으로 해주시면 어떨까 합니다.”라는 요청을 받았다. 편집국원이 줄어드는 바람에 발행 면이 8면으로 줄어드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소식과 함께였다. 이러한 현실이 경북대신문만의 특수 상황은 아닐 터이다. (대학) 종이 신문의 어려움은 중앙지와 몇몇 대학 신문 등이 이미 몇 년 전부터 다뤄왔다. 현실의 어려움과 그 원인을 명명하고, 상황 분석을 토대로 미래를 위한 조언이라는 형식으로 대부분 작성되었다. 타지(他紙)에서 언급하는 이유를 내·외로 나눠보면, 안으로는 학보 기사 주제와 내용의 제한 또는 부실, 편집권 독립의 문제, 기자 수의 감소가 큰 문제였다. 외부 환경과 관련해서는 정보의 유통과 확산이 빠른 전자 매체의 일상화, 종이 학보 자체에 대한 무관심이 거론되었다. 카드뉴스를 만들고, 동영상을 올리는 등 “철저히 학생의 취향에 맞춰 학보를 만”드는 것이 (동의할 수는 없으나) 해결책으로 제시되기도 하였다. 편집권 독립을 위한 노력이나, 기자들의 처우개선, 심층취재의 중요성도 당연히 강조되었으며, 이런 점에는 당연히 동의한다. 
여기까지는 일반론. 그렇다면 이제부터 경북대신문의 현재, 미래도 아닌 독자로 만난 지난 시간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대학생의 반년대계: 시간표를 사수하라’(1615호/2018.9.3.)는 신선하고 발랄한 감각과 재치에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가게 만들더니, ‘망한 시간표 콘테스트’의 논평을 읽을 때에는 연구실 밖 복도를 지나가는 학생도 놀랄 만큼 박장대소를 가능케 하였다. 기사에 나오는 학생들의 화려한 전문용어는 반도 이해하지 못하였음에도 몰입이 가능하도록 만든 뛰어난 기획이었다. 생생한 현장감을 위하여 강의동 간 이동시간을 직접 발로 뛰며 확인하였다는, 그리하여 치열한 기자정신이 녹아든 기사였다는 후문까지 있었다. 마침내는, ‘대학이란 무엇인가’, ‘교수란 무엇인가’ 그리고 ‘강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그리고 던져버리고 싶게 한 기사였다. 
정보제공과 계몽의 차원을 넘어, 독자들을 논의의 장으로 자연스레 끌어들인, 진지한 고민이 느껴지던 ‘젠더: 다름을 인정할 때(1611호/2018.4.30.)’도 떠오른다. 계산은 젬뱅이이나 점수를 더해가던 나 또한 갈 길이 만만치 않음을 확인시킨 기사였다. ‘집은 사람이다1, 2(1568호/2016.3.1, 1576호/ 2016.5.23.)’는 또 어떠한가. 혹서와 혹한을 피할 수 있는 방 한 칸을 얻는다는 것은 파편화된 개인이 각자도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연대와 공동체의 문제임을 잘 보여준 연재기획이었다. 기획이 두 편에서 끝난 것은 아쉬웠지만, 청년들이 그들의 공간뿐 아니라 소외된 타인들의 거주공간 문제를 공동체의 문제로 다룬 자세와 성찰이 특히 훌륭했다. 지금의 학생들은 ‘큰 문제’ 에 대해서는 관심이 1도 없을 거라는 (나 포함) 많은 기성세대의 일반화는 어리석은 편견임을 보여주는 좋은 기획과 기사들은 그 외에도 많았다. 
교정 여기저기서 자라는, 이름 모를 식물의 존재와 특성을 살펴주던 ‘나무야 나무야 (2015-2016년 연재)’는 또한 얼마나 감성적인 기획이었던가! 그러나, 과거 상찬에, 직접 읽고, 쓰며 같이 만드는 현재가 있어야 미래가 밝아질 수 있다는 말을 이 자리에서 한들, 그 말이 신문을 읽지 않는 이들에게 어떻게 닿겠는가? 다수의 학생들에게 종이 신문은 이미 너무 낯선 것은 아닌지. 학보 배포대에 신문이 있다는 사실에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 듯하다. 그렇다고 경북대신문 홈페이지로 집중하는 것이 방법일까? 종이 신문이 매체로서의 생을 마감하여, 신문이 언젠가는 ‘경대말’ 또는 ‘에타’ 등으로 대체되는 미래를 맞이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고루한 줄 알지만, 아날로그적 ‘과격한’ 방안은 어떨까. 학생들이 모이는 장소와 시간, 신입생 새터, ‘신복자편’이 만나는 날, 그 외에도 여러 날 직접 찾아가 종이 신문을 배포하고 홍보하여, 낯설지만 다시 익숙해지도록, 그래서 기다려 지도록 하는 것. 몇 차인지 헤아리기도 어지러운 산업 혁명의 시대에는 맞지 않는 노동집약적 또는 착취적 제안일 터이다. 이쯤 되면 편집자는 “본 시론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을 추가하고 싶을 것이다. 
미래를 이야기 하라는 데, 내친 김에 200년 전 다른 나라로 가 보자. 바이마르 공국에 살던 괴테와 실러는 잦은 서신과 만남으로 우정과 문학을 깊이 했다. 괴테는 실러에게 신문에 편지를 끼워 보내며 안부를 물었고, 그들은 더 자주 만났다. 20세기 말 우리는 갓 나온 학보를 잘 접어, 학교 로고가 찍힌 레포트 지에 사연을 적고는 그 뒷면을 봉투로 삼아 타교 친구에게 보내곤 했다. 종이로 된 경북대신문을 읽고 나누는 기쁨을 같이 오래 하고 싶은 욕심이 지나친 것일지도. 자성의 차원에서 시론이라기보다는 독자의 다짐으로 글을 마쳐야겠다. 강의 첫날 ‘교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가져간 경북대신문을 강제?! 열독하도록 해보는 것이다.


김남희 교수
(인문대 독어독문)


포토/만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