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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기획

탄생 150주년, 새롭게 조명 받는 막심 고리키

이강은(인문대학 노문학과 교수)


구세계와 신세계를 잇는 다리
 
막심 고리키, 본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시코프(1868-1936)이다. ‘고리키’는 필명이며 러시아어로 ‘쓰라림, 고통’ 등을 뜻한다. 얼마나 힘든 삶을 거쳐 왔기에 작가는 ‘최대의 고통’이라는 의미로 ‘막심 고리키’라고 필명을 지었을까.
프랑스의 전기 작가 로맹 롤랑은 고리키를 가리켜 ‘구세계와 신세계를 이어주는 다리’와 같다고 말했다. 무너져가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소련에서 생을 마감한 것을 고려하면 로맹 롤랑의 말은 쉽게 이해된다. 하지만 어린 시절 고아가 되어 정규 교육이라고는 전혀 받지 못하고 온갖 하층 직업을 전전하며 러시아 전역을 떠돌다가, 일약 작가가 되어 혁명기 러시아 문단의 제 일선을 지키고, 소련 작가동맹의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고, 노벨상에 다섯 번이나 지명되기도 하는 등 고리키의 문학적 생애를 돌아보면 롤랑의 말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올해 10월 2일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는 고리키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막심 고리키의 휴머니즘’을 주제로 라운드테이블이 개최되었다.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다문화 세계화 시대에 고리키의 문화 보호와 창조 정신이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고, 문학비평가 파벨 바신스키는 “고리키의 휴머니즘은 인간을 억압하는 어떤 이념이나 어떤 외부적 조건도 거부하는 격렬한 분노”라고 정의하였다. 한국의 한 고리키 연구자는 ‘냉전시대의 마지막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한국에서 고리키와 그의 문학은 향후 더욱 절실하게 다시 읽혀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거들었다. 그는 한국의 분단극복이 단순히 한국만의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일상적 문화적 문제이며 세계사적 문제라고 주장하고, 그 과정에서 고리키 문학 정신이 큰 도움이 되리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 들판을 걸어가는 러시아의 빈털터리들


고리키의 초기 단편들은 작가 자신이 러시아 하층세계를 떠돌면서, 그리고 러시아의 여러 지방을 방랑하면서 체험한 사건과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당시 러시아는 산업화의 문턱에서 농촌의 와해와 도시화가 가속되던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미처 노동자로 정착하지 못한 부랑자 계층을 ‘보샤키(맨발의 사람들)’라고 불렀는데, 고리키는 바로 이런 사람들의 삶과 행동을 그려냈다. 전통적으로 귀족과 지주, 중간 계층의 삶을 그려내던 러시아 문학에서 고리키의 새로운 주인공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의 저항적인 성격과 자유분방한 행동주의, 기존 제도에 대한 거부와 새로운 윤리의 모색 등은 몰락해가는 러시아를 넘어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새로운 사회계층의 심리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위기에 처한 동족을 이끌고 불굴의 정신으로 새로운 땅을 찾아가는 지도자 단코(단편『이제르길 노파』 )나 떠돌이 부랑자이자 도둑이지만 결코 속물적이지 않고 돈과 욕망에 초연한 주인공( 『첼카시』 )등은 전제 정권에 맞서 싸우는 혁명가들의 알레고리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부랑자 형상들은 곧 이어 노동자 혁명가 형상으로 성장하고 구체화된다 (『어머니』 ). 무의식 노동자에서 강철 같은 사회주의 혁명가로 성장하는 주인공과 이를 걱정스럽게 지켜보다가 함께 혁명운동에 참여하는 어머니를 그린 장편『어머니』  는 고리키에게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안겨주면서 그를 20세기 내내 가장 문제적인 작가 중 하나로 만들었다.


혁명과 새로운 미학을 향하여


오늘날 고리키 문학은 결코 단일한 하나의 색채가 아니라는 점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새로운 관점을 탐구하는 현대의 학자들은 진정으로 작가가 공감을 보내는 인물들은 단코나 파벨과 같은 직선적인 이념의 대변자들이 아니라 삶의 다양한 측면과 모순적 측면을 담지한 주인공들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다른 시각’을 가진 학자들은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성격의 주인공, 삶과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 불가피성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삶과 사람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가진 고리키의 주인공들에 보다 주목한다. 이를테면 고리키의 자전적 삼부작( 『어린 시절』 ,『세상속으로』  ,『나의 대학』 )에 그려진 외할머니는 직선적인 이념이 아니라 종교적 사랑과 인내, 생명 자체에 대한 외경심을 아름답게 담아내는 대표적인 주인공이다. 진실과 용기를 내세우며 위대한 인간을 주창하는 사틴, 사랑과 용서의 위로하는 인간을 앞세우는 루카, 이 두 인물의 대립을 다룬 희곡『밑바닥에서』 는 고리키의 대립적 문학세계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명작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 고리키는 혁명적 현실의 파괴성과 잔인함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문화와 대중교육 사업에 헌신적으로 참여한다. 특히 이 시기 절망스러운 현실에서 지식인과 문화를 지켜내기 위한 고리키의 분투는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되고, 혁명과 문화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연구하기 위한 풍부한 자료이다. 이 무렵에 창작된『1922-1924년 단편집』( 『대답 없는 사랑 』 , 문학동네)은 혁명과정을 체험한 작가가 삶과 현실, 혁명에 대해 새롭고 깊은 성찰로 나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집에 실린『은둔자』 와『카라모라』등은 새로운 내용과 실험적 형식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들은 작가의 평가적, 이념적 시점으로부터 독립적인 인물들의 생애와 내면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 이전의 고리키가 직접 체험에 근거하여 자신의 관점을 대변하는 주인공을 그리고자 했다면, 이 작품들에서는 다양한 주인공과 이념을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상태 그대로 드러낸다.
삶에 대한 무한 긍정(  『은둔자』 ) ,혁명과 반혁명 사이를 넘나드는 인간의 내면세계( 『카라모라』 ) 등을 그리면서 고리키는 혁명과정에서 전개되는 인간의 운명의 모순적이고도 극적인 측면들을 포착한다.『카라모라』 의 주인공 ‘나’는 혁명운동의 중심적 인물이자 헌신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정보기관에 매수된 위장 활동가를 은밀히 살해한다. 이로 인해 체포되었다가 정보기관의 협조자가 되어 혁명가들을 밀고하는 일을 하게 된다. 혁명 이후 이번에는 혁명 정부에 체포되어 투옥된다. 사형을 언도받고 죽음을 기다리며 내적 독백을 기록하는 주인공은 혁명가의 내면 심리와 반혁명가의 논리를 오가며 진정한 인간의 정신이 무엇인지 고뇌한다. 결국 그는 사람들에게 영혼의 수정체가 필요함을, 그러나 그것이 부재함을 고통스럽게 되뇐다.
“사람들 눈에는 ‘수정체’가 있어 그에 따라 시력의 올바름이 정해진다고 말한다. 인간의 영혼에도 그런 수정체가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그런 수정체가 없다는 데에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 『카라모라』 중에서)


이데올로기와 지식에 대한 무한 성찰


고리키 문학은 우리에게 반의반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가 ‘모든 것을 총결산’하여 ‘50년 뒤의 새로운 세대에게 헌정한다’는 마지막 대작『클림 삼긴의 생애』 가 총 4부 중 1부만 번역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 클림 삼긴은 19세기 말 인민주의와 맑스주의가 교차하는 혁명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변호사로 성장하고 혁명가들의 연락 업무를 대행해주는 등 부지불식간에 혁명운동에 이끌려 들어간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신을 혁명가로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는 혁명적 분위기 속에 모호하게 자신을 위장하고 있다. 그는 항상 자기 분열적인 정서 상태에서, 즉 혁명에 공감하지도 않고 혁명가적 능력도 지니지 못한 채 부단히 혁명가 진영을 맴돌며 동요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주인공은 자신이 오랫동안 품어왔던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실현하겠다며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독립신문’을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미처 그 직전에 그는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볼셰비키 지도자(레닌을 암시하는)를 환영하는 인파에 밀려 죽음을 맞이한다.
『클림 삼긴의 생애』에는 수많은 등장인물과 수많은 이데올로기적 입장들이 난무한다. 볼셰비키 혁명가로부터 극우적인 자본가, 전제주의의 옹호자, 신비주의 종교가, 이념적 회의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입헌공화파, 경찰의 첩자 등등 수많은 인물들이 클림의 삶과 교직된다. 수많은 이념적 입장과 갈등, 그 탄생과 발전, 운명을 추적하면서 작가는 어떤 이데올로기의 몰락이나 승리가 아니라 인간의 이념적 삶의 불가피성, 그 구조를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단순하게 그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프리즘을 설정하여 현란한 이데올로기의 세계를 독자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라는 적극성을 요구하고 있다. ‘이데올로기 속에서 이데올로기 바깥으로, 그리고 다시 안으로’의 부단한 각성과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우리에게 고리키


고리키가 작가로서, 혁명가로서, 사상가로서 감당한 역사적 체험의 크기는 가히 세계사적 진폭을 가진 것이다. 그는 삶을 부정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저항 속에서도 삶에 대한 뜨거운 긍정,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새로운 모색을 멈추지 않는다. 고리키는 자신이 평생 기울여온 ‘혁명’의 문학을 돌아보면서 마지막 작품들에서 새로운 세계, 즉 자신의 문학 세계를 전복하는 새로운 ‘문학’의 혁명을 꿈꾸었다. 이 새로운 문학을 고리키가 온전하게 보여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문학의 혁명이 완수될 것을 고대하는 고리키의 ‘숨은 지향’을 읽어내는 것이 이제 우리의 일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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