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정 큐레이터는 경기·광주·지리산 일대·대구 등 전국 곳곳에서 한국의 근현대사와 그 지역의 특색을 담은 전시들을 기획해왔다. 특히 대구에서는 대구미술관 개관 당시 전시팀장을 맡기도 했고, 성매매 집결지인 자갈마당을 주제로 한 전시인 ‘자갈마당 기억변신프로젝트’에서 책임 큐레이터를 맡아 ‘이동석 큐레이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장을 사랑하고 현장 속의 이야기를 좋아한 그의 얘기를 들어봤다●

▲최윤정 큐레이터와 작가들이 올해 성매매 집결지 100년을 맞아 진행된 ‘나의, 국가, Arbeit Macht Frei’ 전시를 위한 회의를 하는 모습이다.(최윤정 큐레이터 제공)

Q. 학부는 국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미학과로 진학했는데, 큐레이터들의 전형적인 진학 과정과는 다소 다른 것 같다. 전공과 다르게 큐레이터의 길을 선택한 계기는 무엇인가?

원래 공연 쪽으로 갈 것이라 생각했다. 예전부터 연극에 관심이 많았었다. 대학 시절에는 노래패 동아리에서 활동했고, 극단으로 가서 청소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극단에서 창작이 진행되는 과정을 보니 자본이 모자란 탓에 했던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멋있게 창작하는 선배를 보지 못한 점에 실망해 극단을 나오게 됐다. 이후 학부생 때 밖에서 많이 활동하다 보니 막상 머리에 든 지식이 없다는 생각에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대학원을 미학과로 진학했다. 그러나 미학과를 다닐 때에도 나는 현대미술을 그저 인상파라고만 생각할 정도로 현대미술의 맥락과 담론에 대해서 잘 몰랐다. 큐레이터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우연이었다. 졸업논문을 스피노자의 인식론에 관한 내용으로 쓰며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시각적 대응물로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활용했는데, 그 때문에 선배들은 내가 미술에 관심이 많은 줄 알고 아르코 미술관에서 하던 큐레이터 양성 프로그램을 추천해줬다. 사실 미학 안에서도 미술 이론은 따로 있는데, 나는 전혀 관련 없는 독일 근대 철학을 공부했었다. 당시에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직종의 지평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 한심하기도 해서, 소개받은 큐레이터 양성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그때 미술계의 주요 담론이 ‘예술을 통해 사람들의 사회참여를 끌어내고 작품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하는 공공미술’이었다. 그 일이 글에 자신있고 사회적 담론에 관심이 많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 미술관 인턴이 아니라 현장 일이 잘 맞을 것 같다는 조언을 듣고 ‘대추리 현장예술 아카이브 프로젝트’라는 현장 프로젝트로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큐레이터 일이 지금은 11년 차에 접어들었다.

Q.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이 큐레이터라 하면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근무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실제로는 더 넓은 범위의 활동을 해오고 있는데, 큐레이터 영역에는 어떤 것이 있나?

전시공간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화랑(갤러리)과 미술관, 대안공간 등이다. 공통점은 ‘전시하는 곳’이지만 그 세 곳의 목적은 다 다르다. 화랑은 작품 판매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작품이 잘 팔릴 수 있도록 하는 전시를 필요로 한다. 미술관은 시민들의 감성을 고취할 수 있는 교육을 하는 곳이다. 여기에서 큐레이터는 연구자이자 학교 선생님 같은 존재로서, 전시를 교육자료로 활용한다. 대안공간은 화이트 큐브(화랑이나 미술관 등 하얀 벽을 지닌 전시공간, 제도 미술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쓰임)를 벗어나 제도권에 진입하기 어려운 젊은 작가나 실험적인 작가를 수용하는 곳이다. 그곳에서의 큐레이터는 작가를 발굴하는 사람이자 프로그래머다. 본격적으로 큐레이터 일을 시작했던 광주에서는 대인시장에서 현장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매개공간 미나리’라는 대안공간을 기획했다. 현장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대안 공간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현재는 독립 큐레이터의 삶을 살고 있는데, 소속 없이 자신의 이름으로 일을 하는 큐레이터를 이른다.

Q. 최근 전시 기획들은 그 전시를 위해 작업을 따로 하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본인도 그런 형태의 작업을 많이 해왔는데, 작가와의 소통은 어떻게 진행하나?

보통의 전시 기획은 큐레이터가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 연구하고 전시 주제에 맞는 작품을 섭외하는 형태로 많이 진행된다. 그러나 내가 가장 선호하는 전시 기획은 작가와 함께 만들어나가는 전시다. 나의 콤플렉스 중의 하나는 다른 큐레이터와 달리 미술 실기를 하지 않아서 작가가 작품에 쓰는 재료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 비평글 작성을 위한 인터뷰를 할 때에는 재료와 작업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반드시 작가의 작업실로 찾아간다. 직접 작업실로 찾아가니 작가들은 좋아한다.

전시를 기획하는 과정에서는 이 전시와 관련한 농염한 주제를 뽑아낼 작가를 찾고 그 작가들과 함께 스터디를 한다. 워크숍을 열고, 현장을 답사하고, 관련 서적을 돌려 보기도 한다. 그리고 작가들에게 이 전시와 관련해 어떤 주제를 뽑아낼지 고민하게 해서 작업계획서를 쓰게 한다. 그때부터 역할이 나눠진다. 나는 큐레이터의 업무를 하고, 작가들은 각자의 작업을 진행한다. 큐레이터와 작가가 일대일로 이야기를 하면서 작업을 발전시키거나 삭제하기도 한다. 피드백 과정에서는 작가 작업의 형식이 확장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좋다. 프로젝트의 주제가 작가와 연계되도록 하는 것이 큐레이터의 역할이다. 독립 큐레이터로 진행한 다수의 프로젝트가 그렇게 진행됐다. 

Q. 현장 프로젝트와 미술관에서의 큐레이팅에는 어떤 차이가 있고, 본인은 어디에 더 맞다고 생각하나?

전부 다 잘 맞는 것 같다. 미술관 전시팀장으로 근무했던 경험은 큐레이터로서의 소명의식을 키우기에 좋은 기회였다. 현장 프로젝트를 할 때에는 현장에서의 판단이 빨라야 해서 순발력과 민첩함을 갖춰야 했다. 현장이나 대안공간에만 있었으면 작품을 막 다뤘을 것 같다. 작품 하나하나를 생명체처럼 다뤄야 하는데 내게 그 태도를 가르쳐준 곳은 미술관이었다. 미술관을 떠나 현장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작품에 보험을 들고, 작품의 컨디션을 확인하는 등의 원칙을 지키려 한다. 어느 쪽이 더 맞다기보다는 배울 점들이 각자 다른 것 같았다. 

Q. 경기·광주·경남·대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역에서 활동을 해왔다.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는 이유와 그 매력은 무엇인가?

순전히 일 때문에 간 것이지만, 내몰리면서 간 게 아니라 그때마다 내 선택으로 간 것이다. 다만 이제 여기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면 그건 내가 여기 있어야만 하는 명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가 떠날 때라고 느낀다. 광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주에서 만 3년을 활동했는데, 광주의 토양이 나에게 잘 맞았고 음식도 가리는 게 없었다. 삭힌 음식도 나에게 잘 맞아서 광주에서의 생활을 즐겼다. 하지만 현장 프로젝트에서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으면 행정기관의 자본에 잠식당하게 되고, 우리가 꿈꿨던 창작촌은 현재 문화센터처럼 됐다. 광주에서의 마지막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그 명분을 찾지 못하면서 나 스스로가 소모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오게 됐다.

지역의 서로 다른 점을 보다 보니 인류학자가 되더라. 대구와 광주의 언어 차이가 매우 재미있었다. 광주의 언어는 ‘참견’하는 언어다. 난 신경도 안 쓰고 있는 내 밥상에 반찬이 떨어졌다고 알려주는 문화가 있다. 대구에는 ‘츤데레’ 문화가 있다. 대구에 처음에 왔을 때는 공무원들이 모두 내게 시비를 거는 줄 알았다. 호응하거나 추임새를 넣을 때도 대구는 ‘맞죠’라고 말하고 광주는 ‘그라제’라고 말한다. 언어와 음식을 비교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일종의 큐레이터 연대체로 각 지역에 한 명의 큐레이터를 배치했던 지리산 프로젝트에서는 경남 산청군을 맡아 한센인과 관련한 전시를 진행했다. 대구에서 지내면서 경상도 사투리를 다 알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경남은 또 달랐다. 서로 다른 지역을 비교하고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어느 지역에, 내가 왜 거기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분이 생긴다면 어디에 있느냐는 별로 따지지 않게 됐다. 

Q. 예술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또한 지역성, 지역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지역 예술에 있어 큐레이터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예술은 일종의 비유고 은유이다. 예를 들자면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표현하는 푸른색을 그려서 그 아픔에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듯 예술은 치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예술가는 현대판 무당이라고 생각한다. 현실 안의 먹고 사는 문제에 갇힌 사람들에게 학자들은 사회 문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면, 예술가들은 그것이 정서로 전달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매개한다. 옛날 하늘의 뜻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무당과 같은 역할이다. 무당도 자신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듯이 예술가도 소명이 있다. 신화가 사라지는 삭막한 현실 속에서 신화도 생산하고, 사람을 치유하거나 문제를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이 그것이다. 

지역성과 관련해서 나는 로컬 큐레이터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하려고 했다. 지역에 일을 찾아다니면서 일을 대충 하고 떠나버리는 ‘먹튀’ 큐레이터가 되기 싫었다. 나는 큐레이터가 지역을 대하는 데에 윤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역에 왔을 때 지역의 미술과 환경이 단순히 도구화되거나 편견에 갇히지 않게 하려면 큐레이터 스스로 그 지역에 푹 젖어야 한다. ‘지역 미술이 중앙 미술에 비해서 허접하다’는 인식을 갖는 게 아니라, 지역미술 속에서 특징을 밝히는 것이 로컬 큐레이터의 윤리적인 의무라고 생각한다. 큐레이터는 자기 형식 안에서 다소 자폐적인 활동을 하던 각 지역 작가들에게 다른 비전들을 던져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Q. 대구의 성매매 집결지 자갈마당에 대한 ‘자갈마당 기억변신프로젝트’를 맡게 된 계기, 관련 전시에서 주목했던 점은 무엇인가?

실은 성매매 집결지에 대한 제의가 들어왔을 때 두 번이나 거절했다. 성매매라는 주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성매매 집결지에서 나온 여성들의 토크콘서트에 초대받았다. 그때 순간 중학교 시절 친구가 떠올랐다. 내가 반장을 하던 때, 반에 흔히 ‘날라리’라 부른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졸업 후에 성적이 좋지 못해서 다른 도시의 고등학교로 갔다. 그 후 읍내에서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났을 때 학교에서 잘렸다고 고백하더라. 내 몫까지 열심히 공부하라는 그 친구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 사창가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 토크콘서트가 ‘나도 풀어내야 하는 숙제’ 같은 자리로 느껴졌다. 그게 명분이 생긴 시점이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성매매 집결지의 태반이 여성들이 일해서 번 돈을 저축할 수 없는 구조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성노동이라는 표현이 성립이 안 된다. 노동에는 노동환경이라는 것이 있는데, 성매매 집결지의 기본은 착취다. 성매매 경험 당사자의 방 사진을 보면 헬로키티 용품이 많다. 밖으로 나가서 쇼핑할 수 없어서 성매매 집결지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사람들에게 구매하기 때문이다. 그 업자들은 헬로키티가 비싸니 관련 용품들을 시중가의 몇 배로 판매한다. 손님을 대접하는 음료도 포주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시중가보다 몇 배나 비싼 가격으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밖으로 나오면 오히려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사기를 당하고 다시 성매매 업소로 돌아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개개인의 삶은 도저히 들여다볼 수 없었다. 대신 구조로 접근했다. 경찰이 포주가 되는 등의 어이없는 사건·사고들, 국가는 그 여성들을 어떻게 다뤘는지에 대한 성매매 경험 당사자의 역사 등으로 주제를 좁혔다. 

Q. 앞으로 큐레이터로서 갖는 목표나 원하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무엇인가?

작년에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실시한 ‘연구자 레지던시’에 참가했는데, 연구자에게 각각 원룸 하나를 제공해줬다. 거기에서 앞으로 10년 동안 무엇을 할지를 정리했다. 나는 연구과제로 한국 근현대사에 계속해서 집중할 것 같다. 우리나라의 모든 역사 중에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역사가 근현대사다. 근현대사 중에서도 소년 부랑아를 잡아가 직업교육을 명목으로 학대했던 대부도의 성감학원이나 소록도, 성병 걸린 기지촌 여성 수용소와 같은 장소를 다루려 한다. 그래서 그 당시의 사회구조, 근대화의 신기루를 파헤쳐 보고 싶다.

또 하나는 역사 혹은 특수한 직업 형태에서 바라보는 여성주의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다. 지금은 샤머니즘, 무당들에게 관심이 있다. 그 여성들의 삶이 어땠을지가 궁금해졌다. 민속, 설화 등의 문화적 원형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할 것 같다. 이와 같은 큐레이팅 스터디 과제가 나에게는 중요하다. 

앞서 언급한 스피노자가 나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사람은 세계관에서 필연성을 얘기한다. 인격적인 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자연적·우주적 질서가 우리의 존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우리는 불완전하지만 그 필연성이 있기 때문에 살아갈 이유가 있다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이다. 나도 스승의 말씀을 따라 내가 여기에 있고, 누구와 인연을 맺는 것에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필연성을 찾고 싶다.

김민호 기자/kmh16@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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