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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기획

최근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며 AI를 비롯한 인공지능 연구와 철학 및 심리학의 결합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심리철학을 전공하고 인지과학과 자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온 본교 권홍우 교수(인문대 철학)의 글을 통해 마음에 관한 철학과 과학 사이의 연결고리에 대해 알아보자●


최근에 인공지능이나 뇌과학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면, 마치 머지않은 미래에 인간과 똑같이 사유하고, 감각하고, 느끼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인공지능이 등장할 것만 같다. 마치 마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이르기까지도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관련 분야 연구자들이라면 다 인정하겠지만, 인간과 모든 측면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은 사실 요원한 일이다. 설령 그런 것을 만들 수 있다 한들, 그것이 곧바로 마음의 본성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성취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모든 과학 분야는 철학에서부터 나왔다고 한다. 사변적이고 모호하게 철학적으로만 논의되던 영역이, 잘 정의된 물음과 방법론을 갖추고 연구될 때야 비로소 철학의 품을 벗어나 독자적인 과학의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에 대한 학문은 어떨까? 물론 대학에서 행해지는 심리학이 독자적인 과학이라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없겠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마음에 대한 심리 과학이 철학의 품을 완전히 떠났다고 생각하기에는 이르다. 마음에 대한 여러 과학이 20세기에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이는 마음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과학 사이에 긴밀한 상호작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철학은 분명히 마음에 대한 이해에 기여할 바가 있다.  
이런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마음을 연구하는 많은 학문 분야가 있다. 심리학이 대표적이지만, 뇌과학, 신경생리학 등도 있다. 또 인지 과학이라 불리는 분야도 있고, 인공지능 분야도 빼놓을 수 없다. 모두 다 마음의 본성을 드러내는 데에 어느 정도 일조하는 학문이다. 
또한 보다 더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마음에 접근하는 분야들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명상’과 같은 내성적 방법을 통해 마음에 관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감정이입’과 같은 ‘이해’의 방법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 최선의 단서를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어찌 보면 하나의 영역에 이렇게 완전히 다른 접근 방법과 개념을 가진 분야들이 난립하는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 분야들은 정확히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서로 경쟁적인 관계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상호보완적인 관계일까? 
게다가 마음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서 아직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소위 ‘주관적인 현상’이라 불릴만한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색깔을 가진 대상을 볼 때, 자신은 생생하게 느끼지만 다른 사람은 절대로 접근할 수 없는 독특한 느낌이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과학자들에게 이런 부분에 대해서 물으면 흔히 돌아오는 대답은, “그런 것은 우리의 연구 영역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도대체 과학이 밝혀낼 수 없다면, 무엇이 밝혀낼 수 있단 말인가? 종교나 사변적인 철학에 의존하란 말인가? 설사 그런 것이 과학의 영역이 될 수 없다 한들, 왜 그러한지, 그리고 어떤 다른 방식으로 연구되어야 할지에 대한 규명도 필요하다. 
사실 마음에 대한 이해의 역사에서 철학자들이 하고자 한 것은 정확히 이런 종류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의 대답  
데카르트는 사람이 ‘물리적인 실체’와 ‘정신적 실체’(또는 영혼)의 두 가지 상이한 실체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데카르트는 당대의 가장 저명한 물리학자이자 수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기계론적 세계관의 신봉자이기도 했다. 심지어 마음의 여러 현상이 두뇌와 상관되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MRI가 없던 시절인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는 그 자신이 두뇌일 뿐이라는 결론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는 이런 직관에 꽤나 섬세한 논증의 옷을 입히고자 했다. 그 논증의 예로, 나는 유체이탈과 같이 나와 내 육체가 분리되는 현상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신은 그 둘을 분리해 낼 수 있을 것 아닌가?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이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두뇌와 다름 없다면, 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전능하다는 신조차도 어떤 것을 그것 자체로부터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견해는 그 후 300여 년 동안 마음에 대한 ‘표준적 견해’의 지위를 누렸다. 이런 견해가 쇠퇴하게 된 것은 그의 논증이 결정적인 논증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서 였다기 보다는, 심리학을 과학화하려는 열망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20세기 초 ‘과학적인 마인드’를 가진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는 이런 열망을 ‘행동주의’라는 견해로 구체화했다. 이들에 따르면, ‘고통’이나 ‘의지’ 등 심리적 용어들이 우리의 영혼 안에서 발생하는 어떤 ‘사밀한’ 대상을 가리킨다는 데카르트식의 견해는, 이런 용어들이 어떻게 그 의미를 획득하는 지를 오해한 것에 불과하다. 제대로 이해되면 이런 개념들은 어떤 행동 패턴을 지칭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고통이란 단순히 그에 수반되는 행동 패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행동주의의 등장
행동주의는 마음의 개념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켰다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주의가 마음에 대한 철학적, 과학적 이해에 공헌한 바는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모호하기 짝이 없었던, 그래서 아직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부적절했던 여러 가지 마음 상태나 작용에 대한 개념들, 가령, 의지, 믿음, 고통 등의 개념들이 어떻게 행동과 다른 마음 상태의 인과적 연결 구조 속에서 의미가 결정되는지가 개략적으로나마 드러나게 되었다. 또 마음 상태가 행동과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은 행동을 통해서 보다 더 과학적인 방식으로 마음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또 당시는 신경생리학의 연구가 눈부시게 발전하던 시절이었다. 마음 상태를 그 정의상 행동을 야기하는 원인으로 보는 것이 맞는다면, 마음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과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그런 행동의 원인을 뇌의 신경생리학적 수준에서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이 되는 바를 찾는다면, 마음 상태를 중추신경계의 어떤 물리-화학적 상태와 동일시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과학적 탐구를 통해 열은 평균 분자 운동에너지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듯이 말이다. 

뇌과학과 마음에 대한 이해
하지만 역설적으로, 하나의 마음 상태를 다른 마음 상태와 행동의 원인으로 보는 견해는, 마음 상태에 대한 본성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뇌과학의 연구가 원칙적으로 무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낳게 되었다. 어떤 마음 상태에 대한 개념이 특정한 행동을 야기하는 인간의 내적 상태로 이해된다면, 그 내적 상태가 어떤 재료로 구현되는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가령, 그 재료는 실리콘이 될 수도 있고 전자 장치가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두뇌에 스며들어 있는 어떤 신비로운 ‘숨결’과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이른바 철학자들이 마음의 ‘복수 실현 가능성’이라고 부르는 논제이다. 결국 마음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다시 말해 마음의 본성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두뇌에 대한 연구는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부차적인 중요성만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철학에서는 보통 기능주의라 불린다) 
게다가 이런 논의가 벌어질 당시는 컴퓨터가 처음으로 발달하던 시절이었다. 인간의 생물학적 두뇌가 아닌 다른 재료로 구현된 마음이라는 것은 컴퓨터의 발전이 없었다면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지만, 컴퓨터의 발전은 인간의 마음이 실제로 두뇌가 아닌 다른 것에서 구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바로 인공지능이란 아이디어이다. 컴퓨터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앨런 튜링(Alan Turing)이 자신 있게 ‘지능적인 컴퓨터’라 불렀던 것은, 단순히 그가 개발한 기계가 ‘보편 계산 기계’였기 때문은 아니다. 이런 식의 마음에 대한 이해가 선행된 것이었다. 
또 마음의 본성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가 아니라 그 기능적 구조라는 생각은 ‘인지 과학’(cognitive science)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태동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불과 1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마음을 다루는 여러 과학 분야들은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이 ‘정상 과학’(normal science)라 부른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만큼 성숙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즉, 잘 확립된 방법론과 잘 정의된 문제들을 가지고 있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그런 문제들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 단계 말이다.    
하지만 이는 마음에 대한 연구 전반이 순항하고 있고, 그 전모를 드러내는 것은 단순히 시간문제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과학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철학적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영역들이 있다. 몇 가지 예만 들어보자. 

행동에 주목하면서 잊혀진 철학적 질문들
앞서 보듯이 마음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가능해진 것은, 마음의 내밀한 측면보다는 행동에 주목한 것에 기인한 바 크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행동에 주목한 것은, 마음의 또 다른 측면을 완전히 누락한 결과를 낳았다. 철학자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보았을 때는 그들의 마음에 대한 이해에서,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적인’ 측면이 여전히 설명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령 빨간색 스크린을 보고 있을 때 느끼는 생생한 감각이라든지, 고통이 있을 때 느끼는 찌르는 듯한 그 느낌 자체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것들이 없다면, 우리의 정신적 삶은 훨씬 더 빈곤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아직 부재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떻게 이런 문제에 과학적으로 접근해야 할지 조차 분명하지 않다. 철학자 토마스 네이글(Thomas Nagel)은 “의식을 빼면 심신 문제(mind-body problem)는 훨씬 덜 흥미로울 것이고, 이는 의식을 넣으면 심신 문제는 아무런 가망이 없어 보인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의식의 문제에 관한 우리의 지적인 상황을 잘 드러낸다. 
이뿐만이 아니다. 의식만큼이나 우리의 정신적 삶에서 중요하지만, 아직은 정확히 어떻게 표현되어야 할지조차도 분명치 않은 현상이 있는데, 마음의 ‘능동성’이라 불릴 수 있는 현상이다. 앞서 설명한 현대 마음에 대한 과학의 배후에 있는 인간관은 마치 무기력하게 인과의 흐름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인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의 자의식을 이루는 핵심적인 부분은 우리 스스로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능동성’이 있다는 것이다. 일부 과학자들은 이런 것들이 과학에 의해서 반박될 수 있는 ‘자유 의지’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결론 내리지만, 이는 문제의 본성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진짜 문제는 그러한 의식(아무리 그것이 ‘환상’이라 한들)이 존재하고, 불가피해 보인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를 과학적으로 적절히 다루기 위해서는 철학적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권홍우 교수
(인문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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