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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획

그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예술가. 2018 대구 근현대 문화예술인물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은 격동의 한국 역사 속, 대구에서 예술혼을 불태웠던 그들을 기억하는가? 대구문화재단은 문화예술인 가치확산사업의 일환으로 매년 대구를 대표하는 근현대 문화예술인물을 선정해 기념한다. 올해 선정된 인물은 ▲경쾌하고 기교적인 필체의 서예가 회산 박기돈 ▲깊은 감성과 섬세한 감각을 지녔으나 스스로 생을 마감한 시인 이장희 ▲한국적 리얼리즘 영화의 선구자 영화감독 이규환 ▲한국음악의 세계적 보편성을 제시한 음악가 하대응이다. 당대에 대구를 빛냈던 문화예술가들의 생애와 업적을 대구문화재단의 도움을 받아 가상 인터뷰로 들여다 봤다●

서예가 회산 박기돈

Q. 서울의 양반가 출신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구에는 어떻게 정착하게 됐나?
A. 전형적인 양반 사대부 가문 출신이다. 20세 무렵에 스승 시암 이직현 아래에서 유학과 서예를 공부했고, 1901년 영광스럽게도 29세의 나이에 대한제국의 관료로 일하게 됐다. 그러나 정3품인 통정대부에 임명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김에 분개한 나는 관직을 내놓고 서울을 떠났다. 그 후 상해로 망명하려는 계획이 실패하면서 대구에 정착하게 됐다.

Q. 스승 이직현은 어떤 분인가?
A. 나의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 바로 스승 이직현이라 할 수 있다. 스승의 항일 정신이 고스란히 나에게도 전달돼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됐던 것 같다. 스승은 경술국치 후 일제가 주는 은사금(임금이나 상전이 내려 준 돈)을 거절하기도 했고, 1919년 3?1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지자 70세의 나이에도 지역의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대표적인 항일 유학자의 길을 걸었다. 스승과의 인연은 맏형이 합천 군수로 가면서부터였다. 형과 부친은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스승과 많이 교류했다. 부친은 내가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좋아해 글이 부족할 것을 염려했고, 합천으로 불러 스승 밑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나는 1893년부터 3년 간 스승 문하에서 유교 경전을 공부하면서 유학자로서의 소양을 익혔다. 이후 스승이 세상을 떠났을 때 비문을 새기기도 했다.

Q. 대구에서 경제인으로도 활동했는데, 어떤 활동을 전개했나?
A. 대구에 자리 잡고 난 후 가문의 자산을 바탕으로 관료 시절 상공학교에서 근무한 점을 살려 경제인으로 활동했다. 그 당시 대구는 일본인들의 토지 매점과 상권 침투로 지역의 경제 주권이 침탈당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이에 대응해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나도 모금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고 매일신보에 광고를 낼 때 같이 이름을 걸기도 했다. 국채보상운동 발의자인 서상돈과는 여러 사업체를 함께 설립하면서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가 찬탈됐다. 그해 경제권만은 사수하려는 대구 민족경제인들의 모임인 대구상무소(현 대구상공회의소)의 초대소장으로 추대됐다. 소장을 역임하면서 약령시 활성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3?1운동 직후였던 1920년부터는 노동공제회 대구지회 회장을 맡아 노동야학, 강연회 등을 통해 대중을 대상으로 계몽운동을 벌였다. 1921년에는 순종 대구 행차 때 은사금으로 지어진 명신학교가 경영난을 겪었는데, 학교를 살리기 위해서 후원회를 조직하고 임시의장을 맡기도 했다. 1924년 내가 설립했던 명신여학교를 서희원 여사에게 양도하고 나서는 사회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Q. 50세의 늦은 나이에 전문 서예가로 전향한 이유는 무엇인가?
A.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어울렸던 대구 유지 층의 ‘한묵 문화’는 본래 서예에 취미가 있던 나를 전문 서예가로 이끈 큰 동기가 됐다. 경제인으로 활동하면서도 서예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고 대구의 서예 모임인 ‘교남 시서화 연구회’가 창립될 때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서예가의 길로 들어서는 것에 결정적 영향을 준 교남 시서화 연구회 회장 서병오는 대구의 서예 애호 분위기를 만든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사돈지간이기도 했던 그와는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뜻을 같이했다. 특히 연구회 활동을 같이 하면서 전국의 서예가와 교류했고 1923년 연구회가 개최한 ‘대구 미술 전람회’에 내 작품을 출품시키면서 서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33년 61세부터 더욱 활발한 서예 활동을 펼쳤다.

Q. 본인의 서풍이 갖고 있는 특징은 무엇인가?
A. 글씨를 구하는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요청한 사람이 원하는 대로 글을 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나는 높은 숙련도에서 나오는 경쾌하고 기교적인 필치를 선호했다. 필획의 성격이 무겁지 않고 경쾌한 점, 미세한 떨림이 있으면서도 선질(線質)이 섬세한 점, 붓끝이 예리하게 드러나는 점, 글자의 크기나 필획의 굵기에 변화가 크면서도 조화를 이룬다는 점 등이 내 서풍의 특징으로 꼽혔다. 제당(사찰의 식당), 누각과 정자의 편액을 많이 썼고, 특히 좋아한 글감은 정몽주의 시였다. <차영주판상운> 등 여러 작품에 정몽주의 시를 담았다.

Q. 팔만대장경 편액을 썼는데, 작업에 어려움은 없었는지?
A. 평소 스님들과 많은 교류를 했고 자연스럽게 사찰의 현판 제작을 많이 했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편액도 그중 하나다. 틀을 제외한 나무판의 크기가 48×190㎝에 달하는 큰 글씨였다. 팔만대장경이 지닌 종교적 의미와 역사성의 무게에 걸맞은 글씨를 써야한다는 것이 많은 부담이 됐다. 눈에 쉽게 띄어야 하는 편액서의 조건을 살려 굵고 뚜렷한 필획을 구사하면서, 경직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내 개성을 내려놓고 안진경체의 중후함을 살린 중량감 있는 필치를 구사해봤다. 해인사의 암자 삼선암의 <삼선암> 편액도 내가 쓴 글씨다.

참고 : 「근대기 대구의 서예가 회산晦山 박기돈(1873~1947) 서예 연구」, 이인숙


▲팔만대장경 편액 (출처 : 해인사 대장경 연구원)





시인 이장희

Q. 부유한 집안에서 물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다른 어려움은 없었나?
A. 어린 시절 물적으로는 어려움이 없었다. 일례를 들면 내 생가는 대구부 서성정 1목 103번지와 105번지가 혼용되곤 하는데, 두 번지수가 다 옳다. 아버지가 여러 채의 집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일찍이 사업에 큰 성공을 한 아버지 덕에 집안은 항상 부유했다.

Q.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다.
A. 아버지는 서울의 중인 집안 출신으로 조선 말 궁내부주사를 지냈다. 궁내부주사는 왕실에 관련된 일을 하던 관직이다. 관직을 내려놓은 후 대구로 내려와 소금 도매업으로 재산을 모았다. 전기 회사와 은행 창설에도 참여했다. 상업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조선총독부의 중추원에서 관직을 맡는 등 대표적인 친일 부호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이런 점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Q.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어떤가?
A. 어머니는 내가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를 잘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항상 결핍으로 느껴졌던 어머니의 존재에 대한 그리움은 나의 시에도 잘 드러나 있다.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청천의 유방’이 그렇다.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계모가 내 호적상 생모로 등록돼 있었다. 이는 후에 내 둘째 형과 함께 바로 잡았다.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계속된 재혼으로 가정이 화목하지는 못했다.

Q. 어린 시절은 어땠나?
A. 어렸을 때에는 총명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대구공립보통학교 재학 시절엔 급장도 몇 차례 맡았고, 서예와 그림에 관해서는 전교에서 제일이라는 평을 받았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많지는 않았다. 동급생들이 부호의 아들인 나를 많이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정작 나는 그런 부유함이 전혀 자랑스럽지 않았다.

Q. 보통학교 졸업 이후엔 일본으로 건너갔다. 어떤 경험을 했나?
A. 집안에 구애받지 않고 나만의 세계를 펼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1913년 일본에서 경도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때에도 꾸준히 글을 써 교지에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에이꼬’를 만났다. 내가 연모하던 소녀였다. 그러나 소극적인 성격 탓에 하고픈 말을 마음에만 담아 둔 채 귀국해버렸다. 후에도 그녀를 잊지 못해 그녀에 대한 기억을 ‘동경’ 등의 시에 담곤 했다. 경도중학교를 졸업한 이후엔 다시 귀향했다.

Q. 귀국 이후의 삶은 어땠나?
A. 명문대학 진학이 어려웠다. 그러자 아버지는 내가 총독부 직원이라도 되기를 원했다. 나는 그 뜻에 따르지 않았다. 이후 동경으로 유학을 가고 싶은 나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아버지 사이에 마찰이 잦았다.

Q. 본격적인 시 창작 활동은 언제부터였나?
A. 24살이 되던 1924년, 문우였던 백기만의 권유로 ‘금성’에 작품을 발표했다. 그렇게 문단에 나왔다. 내 대표작으로 꼽히는 ‘봄은 고양이로다’도 이때 발표한 5편 중 하나다. 금성은 마음이 맞는 문우였던 양주동, 백기만 등과 함께 발행하던 동인지(사상, 취미, 경향 따위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편집·발행하는 잡지)다. 이후 금성에 40여 편의 시를 발표했다.

Q. 시 창작 이외의 활동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나?
A. 톨스토이 원작 소설 ‘영구한 귀향’을 번역해 발표하고 ‘학대받는 사람’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나 단명해 작품 수가 많은 편은 아니다.

Q. 본인에 대한 평가는 어땠나?
A. 생존에는 상반된 평을 받았다. ‘청천의 유방’과 ‘비오는 날’에 대해서는 ‘상징을 위한 상징’이나 ‘한 때에 마취된 감흥에 씌인 붓장난’과 같은 혹평을 받았다. 내 특유의 감각적인 표현법에 기인한 듯하다. ‘고양이의 꿈’과 ‘겨울밤’에 대해서는 ‘이채 있는 시’와 ‘조용히 관찰할 줄 아는(靜觀) 시인’이라는 평을 받았다. 후대에는 당대 많이 사용되던 ‘꽃’, ‘바람’, ‘새’ 등 직관적이고 단순한 비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심층적인 은유를 사용했다는 평도 받았다. 그 외에도 ‘비속한 현실에 맞서 절대 자유, 절대 자아의 순전함을 추구했던 시인’, ‘당대 문단을 대표하는 감각적인 낭만주의자’ 등이 나를 따라다니는 문장이다.

Q. 본인의 작품에 대해 말한다면?
A. 여타 시인들이 그러하듯 작품에 대해서 정리하기는 어렵다. 나의 작품에는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유년 시절에 대한 사모와 동경의 향수’와 아버지와의 관계가 악화된 후 궁핍한 삶에서 비롯된 ‘절망과 우울의 폐쇄적 자아’가 공존한다. 그럼에도 가장 뚜렷한 특성은 나만의 감각적 측면과 순수문학적 성격이다. 예를 들자면 당시 시적 대상으로 주목받지 못하던 ‘고양이’에 대해 나만의 섬세한 관찰을 통해 묘사한 점이 그렇다. 권태와 생동이 공존하는 봄의 정취를 고양이의 관능에 빗대 독창적 알레고리를 형성해 내고자 했다. ‘광채 없고, 탄력성 없고, 자극성 없는 굵다란 철사선은 시가 아니다’라는 나의 시관도, 알기 쉬운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시적 긴장감을 유지하는 나의 문체와 맥이 닿는다.

참고 : 「특집1/ 이장희 문학의 재조명 요절의 시인 고월 이장희론」 , 윤장근
「대구의 문화인물 제2권」  


▲「금성」 3호 ‘봄은 고양이로다’ (출처 : 대구문화재단)




영화감독 이규환


Q. 영화계에 입문하기까지의 준비과정은 어땠나?
A. 중학교 시절부터 학교 공부보다 예술, 특히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때 대구에는 예술에 취미를 갖고 있는 청소년 예술 그룹이 있었다. 이 그룹에 가입해서 음악과 연극을 공부했다. 그 후 영화공부를 위해서 서울로 갔다. 영화를 하려면 이론부터 습득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매일 도서관에 가서 영화 관련 서적을 읽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문득 대구에서 홀로 삯바느질을 하면서 송금해 준 어머니를 생각하니, 영화 공부한다고 국내에서 빈둥거릴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살에 일본으로 가 촬영소에서 영화 공부를 하려고 했으나 조선인이라고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6개월간 ‘도쿄 일본영화예술연구소’에서 영화에 대한 기초를 다잡았다. 그 후 자신감을 얻어 영화의 본고장인 할리우드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1927년 상하이에 영어 공부를 하러 갔지만, 영어 습득도 영화 공부도 진전이 없어 할리후드행을 포기하고 다시 일본으로 갔다. ‘신흥키네마촬영소’에 들어가 기초과정에 합격한 후에는 몇 달 동안 수련한 뒤 조감독으로 임명됐다. 그렇게 3년간 연출 수업을 받으면서 영화계로 진출하게 됐다. 

Q. 데뷔작이 ‘임자 없는 나룻배’인데 이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의 우여곡절은 없었나?
A. 연출 수업을 받는 3년 동안 틈나는 대로 ‘임자 없는 나룻배’의 시나리오를 썼다. 그 후 ‘임자 없는 나룻배’의 배역을 선정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이 작품의 남자 주인공인 춘삼이 역할은 성격의 변화가 많은 역할이었기 때문에 당대 제일의 연기자였던 ‘나운규’ 감독(‘아리랑’의 감독과 주연)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나는 일본에서 갓 돌아온 신임 감독이었기 때문에 나 감독을 만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연히 다방에서 나 감독을 만났고, 작품 시나리오를 보여주며 주인공 역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놀랍게도 나 감독이 그 다음날 바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의 도움으로 1932년 ‘임자 없는 나룻배’로 데뷔할 수 있었다. 

Q. ‘임자 없는 나룻배’ 개봉 아후 사회적으로 탄압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었나?
A. 총독부 검열관실에서 ‘임자 없는 나룻배’란 나라 잃은 조선민족을 빗대어 한 말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나는 순수한 애정영화라고 주장해 제목을 통과시켰다. 사실 이 영화의 주제는 일제에 대한 반항인데,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으니 간접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작품 도입부는 당시 핍박받던 농촌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으나, 나루터의 뱃사공이 철도 부설과 철교 건설에 대립하다 패배하고 죽어가는 숙명적인 설정은 일제의 침략 및 새로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굴복해가는 우리 민족의 숙명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준다. 하지만 검열관의 가위질로 마지막 장면의 필름이 잘려나가는 수난을 겪었다. 동아일보에서는 작품의 영화평을 실었다는 이유로 그날치 신문을 모두 압수당했다고 한다. 또 내 영화를 설명해주는 변사는 걸핏하면 경찰에 끌려가기도 했다. 

Q. 어떻게 ‘무지개’와 ‘나그네’ 같은 한일 합작 영화를 만들게 됐나?
A. 영화 감독을 계속하며 ‘바다여 말하라’와 ‘밝아가는 인생’을 제작했지만 데뷔작에 비해 흥행실적이 좋지 않았다. 실패의 경험을 토대로 영화 제작에 대한 새로운 방식을 추구하게 됐다. 감독을 넘어서 나 스스로 제작자가 되어 한일 합작으로 영화를 만든 것이다. 일본 흥행권은 일본 영화사에 주고 한국 흥행권은 내가 갖는 것이 조건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든 작품이 ‘무지개’와 ‘나그네’다. 두 작품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실패 후의 경험이 토대로 성공의 토대가 되었던 것 같다.


Q. 영화계를 잠시 떠난 적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A. 대동아 전쟁 말기가 되자 일제의 탄압은 더 심해졌다. 조선영화통제회사를 만들어 총독부 안에 모든 영화사와 영화인을 흡수했다. 이 영화통제회사는 국책 영화라고 해서 대동아 전쟁을 위한 어용 친일 영화만 제작했다. 나는 조선인으로서 조선 영화를 만들지, 어용 영화는 만들지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계를 떠나 만주로 향했다. 만주에서 토목사업을 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고생만 하고 6개월 만에 돌아왔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건설무대’라는 극단의 연출을 맡았고 전국 순회공연을 돌다가 부산에서 징용돼 1년 5개월의 징용 생활을 보냈다.

Q.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회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인가?
A. 내가 영화를 제작할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 나는 한국영화계의 불황과 일본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으로 인한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일제를 비판하는 주제를 지닌 ‘임자 없는 나룻배’를 흥행시켰다. 또 6·25 전쟁 후 ‘춘향전’의 감독을 맡아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한국영화에 회생 기회를 제공했고 한국영화산업의 부흥을 이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모든 예술, 특히 영화에서는 고통을 밑바닥까지 제대로 느껴보고 그것의 정체성을 깨달은 후에야 장인정신이 빛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참고 : 「이야기 한국 영화사」 ,김화

▲‘임자 없는 나룻배’의 한 장면 (출처 : 한국영상자료원)







음악가 하대응


Q.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A. 1927년 입학한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의 악대부에서 이상준 선생에게 음악을 배웠다. 졸업하고는 가족에 반대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배우고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1934년 동양음악학교(현 도쿄음악대학)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동양음악학교 예과에서 바이올린을 배웠으나, 목소리가 좋다는 평을 받고 교수의 권유로 성악으로 전환했다. 1934년 동양음악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했고, 재학 중이던 1936년에 ‘제5회 전 일본 음악콩쿠르’ 성악부에서 가극 「아프리카의 처녀」 중 ‘오! 파라다이스’와 ‘나의 아름다운 정열이여’를 불러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2위에 입상했다. 콩쿠르 입상을 계기로 리릭테너(목소리가 서정적인 노래를 부르기에 적합한 테너)로의 능력을 인정받았고, 졸업 직후인 1937년에는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의 주역을 맡아 데뷔하기도 했다.

Q. 대구에는 어떻게 자리 잡았나?
A. 1941년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는 국내를 비롯해 만주 일대까지 순회공연을 가졌다. 성남중학교, 동성고등보통학교, 계성여중·고등학교(가톨릭 교육재단) 등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수도원을 방문하게 된 것을 계기로 종교음악에 심취해 1939년부터 서울가톨릭합창단을 지휘했다. 합창단을 맡으면서 단순한 성악가를 넘어 음악가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했다.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와 합창지휘를 겸했을 뿐 아니라 편곡 작업까지 하면서 전방위적으로 활동했다.  
6·25전쟁 중인 1951년, 서울가톨릭합창단을 이끌고 대구로 피난을 오게 됐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대구 남산여고 음악교사로 일했고, 1954년에는 대구에서 처음으로 4년제 음악과가 개설된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음악대학)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대구에 정착하게 됐다.

Q. 6·25 전쟁 당시 대구 음악계의 상황은 어땠는가?
A.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나를 비롯해 김동진, 변훈 등 수많은 서울 음악인들이 대구로 피난을 왔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이 대구의 능인중학교에 자리 잡아 운영되고 백조다방, 녹향 등에서 음악인들의 교류가 이뤄지는 등 당시 대구가 우리나라 음악계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전쟁 중의 음악활동은 대부분 군대와 관련됐다. 군악대 활동, 군가의 창작과 보급, 군인 및 시민들을 위한 음악활동 등이 주축을 이뤘다. 음악을 전공한 많은 청년들이 군악대원으로 징집됐는데, 군악대의 수준 높은 관악연주를 일반인에게 보여줌으로써 대구의 관악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나도 전쟁 당시 군과 관련된 활동을 많이 했다. 서울가톨릭합창단을 이끌고 문화극장(전 한일극장)에서 ‘필승기원음악회’를 가지기도 하고, 군부대를 돌면서 군가보급에 힘쓰기도 했다. 효성여대 교수직을 맡은 것도 군가보급과 병사위문을 위한 종군활동을 대구 등지에서 한 것이 인연이 됐기 때문이었다. 

Q. 6·25 전쟁 이후에는 어떤 활동을 했나?
A. 나는 휴전 이후에도 대구에 남아 음악활동을 계속했다. 효성여대에서는 1980년까지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향토 음악 발전을 꾀했다. 효성여대 정기연주회를 주관했는데, 제4회 정기연주회에서는 직접 학생들의 노래반주를 하기도 했다. 또한 대구?경북 최초의 공식 음악단체 결성을 위해 일하기도 했다. 1955년에는 대구음악가협회 초대회장을 지냈고, 1959년에는 경북예술단체 총연합회를 발족하면서 대구 음악계 형성을 위해 노력했다.

Q. 본인의 음악에는 어떤 특징이 있나?
A. 효성여대에 교수로 재직하면서 성악활동을 접고 작곡활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내 음악의 특징은 한국적 5음계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소재를 사용한 것이다. 안정적인 서구 전통화성의 진행을 가지면서도 한국의 정서인 한(恨)과, 환희가 풍기는 곡을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작곡법은 한국 음악의 세계적인 보편성을 보여주면서 한국의 고유한 정서를 표현한다는 평을 받았다. 형식으로는 시에다 곡을 붙인 가곡을 많이 작곡했다. 성악을 전공했던 경험을 살려 성악적인 선율로 부르기 좋게 곡을 만들었다. 1963년에는 나의 첫 작곡집인 『하대응가곡집』을 출간했고, 이듬해인 1964년에는 효성여대 강당에서 첫 작곡발표회를 가지며 작곡가로서의 경력도 쌓았다.

Q. 작곡한 대표곡을 꼽는다면?
A. 「그리움」, 「산」, 「봉화」 등의 곡들이 있는데, 특별한 사연을 지닌 곡은 김소월의 시를 가곡으로 만든 「못잊어」이다. 효성여대 교수직을 맡은 이후, 캠퍼스가 위치한 대봉동 가까이 있는 수성못에 자주 산책을 나갔다. 1954년 초겨울이던 어느 날 저녁 휴전 이후 뵙지 못한 어머니 생각이 나서 조용히 방을 나와 수성못으로 향했다. 초겨울의 차가운 바람에 흔들리는 수성못 물결과, 달무리가 져있는 밤의 정취를 느끼다 보니 잊을 수 없는 사랑을 다룬 김소월의 시 「못잊어」가 떠올랐다. 이 시에 그려진 시골의 풍정(風情)과 애수(哀愁)가 나의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이 날의 감정을 담아낸 곡이 바로 「못잊어」다. 이 곡에 대해 내가 바이올린과 성악을 전공했기에 가락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며, 정감 어린 멜로디에 시구와 잘 맞으면서 절박한 상념을 분출시킨다는 평을 내린 이도 있다.

참고 : 「예술담론계간지 대문」 , 대구문화재단


▲가곡 「못잊어」의 악보 (출처 : 대구문화재단)

특별취재팀/knun@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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