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의 ‘최애’ 가수는 이소라다. 나의 플레이리스트에는 그의 곡이 백 개가 훌쩍 넘어가고, 많이 재생한 곡 목록에는 그의 노래가 줄 세워져 있다. 그에게 빠져든 것은 ‘비긴 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당시에 그는 촬영에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태도 논란에 휩싸였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의 목소리, 예술과 삶에 대한 태도, 예민한 성격마저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렇다. ‘덕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곡을 스스로 작사하는 그의 가사는 인생의 순간순간을 떼내어 보게 만들었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 불렸네’ - track9태어난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어느 순간 세상에 던져진 나를 ‘만나는’ 것이다. 만나보니 나에게는 이미 이름이 붙어 있었다.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은 ‘민첩할 민(敏)’ 자에 ‘넓을 호(浩)’ 자였다. 그러나 이름처럼 사는 일은 힘겨웠다. 먼저, 운동신경이 뛰어나지 않고 성격도 느긋해 재빠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넓은 마음을 가지라는 뜻인 ‘호’는 더욱 실천하기 어려웠다. 스스로 관대해지려 하지만 이해와 용서에는 어려움이 따랐고, 그것이 정답인지도 확신하기 쉽지 않았다.

‘말없이 눈치주면 힘겨워, 죽어서 지내? 그러길 바래?’ - 피해의식이름처럼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느끼면서, 학창시절의 나는 새로운 고통에 봉착했다.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난관이었다. 특히 ‘잘 나가는’ 아이들과 반목하면서 무시당하기도 했다. ‘눈치’를 보면서 튀지 않는 일은 내 적성이 아니었다. 주류에 속하고 싶었지만 마음 먹는다고 되는 일도 아니었다. 그럼 쥐죽은 듯이 있어야 하나, 힘들었다. 그땐 그랬었다.

‘누가 내게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지, 내 갈 길은 내 마음대로 갈 수도 있지’ - 쉼눈치를 보는 것은 고등학생이 되면서 벗어나려 했다. 고3 시절 모든 수시 원서를 가장 가고 싶었던 사회학과로 넣었다. 그래서 바로 이곳, 경북대 사회학과로 입학했다. 나의 전공을 얘기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거긴 뭐 배워요?”와 “거기 졸업하면 어디에 취업해요?”였다. 여전히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지만 과에 대한 나름의 확신으로 지내왔다. 그리고 학보사에 들어갔다. 그 순간 ‘평범한’ 대학생활과는 안녕을 고했지만 날 특별하게 만들어줄 활동으로 여겼다.

‘나의 욕망을 나의 절망을 다 잊기로 해 나를 믿기로 해 아멘’ - Amen내 갈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 대학생활에도 고민은 생겨났다. 대학생 3년차에 접어들면서, 성인이 되기 전엔 상상도 못할 경험을 접하게 됐다. 그 길을 걷기에 나의 능력이 되는지, 진짜 옳은 길인지 고심했다. 한 살씩 먹어가는 나에게 그만큼의 짐을 얹는 듯 했다. 그러면서 욕심을 버리는 법, 좌절을 이겨내는 법을 익혔다. 결국 나를 다그치고 나를 신뢰하는 것이 살아가는 법이라 느껴졌다. 그래, 나를 한 번 믿어보려 한다. 아멘.

김민호 탐구팀장

저작권자 © 경북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