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7일 판문점선언, 지난달 20일 제21차 이산가족상봉 등을 거친 후 남북관계는 지난 10여 년에 비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는 추세다. 이런 흐름을 타고 지난 6월 14일과 7월 31일에 열린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6월 25일에 열린 남북군사실무회담 등 남북 간 군사회담의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문성묵 통일전략센터장(문리대 사학 77)은 지난 1992년부터 2009년 육군준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남북군사회담에 40여 회 참여한 베테랑 협상가이자 전문가다. 문 센터장은 1992년 본교 박사과정(정치학) 졸업 이후 국방부 군비통제실에서 대북 협상 업무를 맡았고,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남북군사실무회담 수석대표를 역임하는 등 남북군사회담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그는 어떻게 20여 년 간 북한을 연구하고 실제 북한군과 만나 협상까지 할 수 있었을까? 그의 인생 이야기부터 남북군사회담, 그리고 현 남북관계에 대한 생각까지 들어봤다●

Q. 군인의 꿈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A. 작은아버지가 직업군인이어서 어릴 때부터 군인에 관심이 많았다. 국민학교 시절 국군 장교에게 위문편지를 보냈는데, 그분께서 답장을 꼬박꼬박 써 주셨다. 거기에 국민학교 학생인 내 경제적 여건까지 생각해 우표와 학용품도 같이 보내주셨고, 심지어 학교로 직접 찾아오시기도 했다. 그분을 보며 군인이 정말 멋진 직업이라는 것을 느꼈고, 자연스레 국군 장교를 꿈꾸게 됐다.

Q. 본교에는 어떻게 입학하게 됐나?

A. 장교가 되기 위해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공업고등학교를 나온 탓에 입학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고졸도 입학할 수 있었던 육군3사관학교(이하 3사)에 지원했다. 이후 3사 사학과 교수요원으로 선발됐고, 3사가 있던 영천과 가장 가까운 본교의 사학과 2학년으로 편입해 3년 동안 공부했다.

원래 내 나이대로라면 74학번으로 진학했어야 했는데, 77학번으로 편입하다보니 나와 나이대가 비슷한 74학번 복학생들과 가깝게 지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다른 재학생들과도 잘 지냈지만, 복학생들과 공감대 형성이 잘 됐었다.

졸업 후 3사에서 1년간 강의를 했는데, 도중에 제도가 바뀌어 교수직을 이어나가지 못하게 됐다. 그래도 공부를 계속 해야겠다는 마음에 소령으로 진급한 후 육군대학에서 공부했다. 그곳에서 국방대학원 석사과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국방대학원 전공 중 내 학부 전공인 사학과 가장 관련 있는 국제관계 전공을 선택했다.

석사과정을 마친 후에는 박사과정 진학을 위해 육군에서 실시한 정책부서 요원 선발에 지원했다. 경쟁을 뚫고 합격한 후 어느 대학에 갈지 고민하다 ‘모교로 가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학부생 시절 부전공으로 정치외교학과를 선택했던 경험을 살려 본교 정치학 박사과정을 택했다.

Q. 대북업무에는 어떻게 종사하게 됐나?

A. 박사졸업 때까지는 중국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 박사논문도 중국과 관련된 논문이었다. 하지만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방부 군비통제관실에 발령을 받으며 대북업무를 맡게 됐다. 군비통제는 전쟁을 예방하려는 노력으로, 국가 간 과도한 군비 경쟁을 막기 위해 적대 국가들끼리 신뢰를 구축하고 무기 개발을 줄이는 것이다. 안보를 튼튼히 하는 데에는 군사력을 강화해 전쟁을 억제하는 방법과 군사력을 줄여 전쟁을 예방하는 방법이 있다. 군비통제는 후자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당시 나는 북한과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신뢰를 형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중국 관련 공부만 하다 보니 북한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이때부터 북한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1992년이었다. 이후 준장 시절까지 20여 년 동안 북한군과의 회담 등 대북 협상 업무를 수행했다. 군에 협상 관련 교육과정이 따로 있지는 않아서 남북고위급회담, 군사분과위원회 등 직접 업무를 수행하고 활동하며 경험을 쌓았다.

Q. 본인이 맡은 첫 군사회담은 무엇이었 나?

A. 처음 참여한 회담은 2000년 9월 제주도에서 열린 남북국방장관회담이다. 당시 나는 전략수행원이자 회담을 개최하는 담당자로 참여했다. 수석대표로 처음 참여한 회담은 2002년 10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군사실무회담이었다. 당시 회담의 의제는 두 번째 남북국방장관회담을 언제, 어떤 의제로 개최할지 의논하는 것이었다.

수석대표는 굉장히 부담되는 직책이었다. 다른 회담과 달리 군사회담은 안보를 다루기 때문에 한 번의 실수가 회담 과정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당시 나는 수석대표를 처음 맡았지만, 북한측 단장(수석대표) 유영철 대좌는 오랫동안 단장으로서 여러 회담에 참여한 베테랑이었다. 회담은 23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는데, 밤새 합의 문건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긴장하고 걱정한 것에 비해 합의(경의선·동해선 개통 등)가 무사히 이뤄졌었다.

Q. 실제 회담은 어떤 과정을 통해 진행되는가?

A. 회담하기 전 대략적인 의제는 정해지지만, 남북 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사전 접촉은 어렵다. 또 서로의 생각을 알고 실무 차원에서부터 계속 소통하는 타 회담과 달리 남북회담은 그렇지 않다. 2000년 2월 당시 합의에 따라 실무차원의 직통선을 만들고 소통하긴 하지만, 고위급 간 직통전화는 없기 때문에 밀접한 소통은 어렵다.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보통 남쪽에서 회담이 한 번 열리면 다음에는 북쪽에서 열리는 등 개회 위치를 번갈아가며 회담을 진행한다.

회담이 시작되면 기자들 앞에서 악수 및 환담 등 오프닝 세레머니를 한다. 기본적으로 군사회담은 비공개회담이라 오프닝 세레머니가 끝나면 기자들은 퇴장한다. 본격적인 회담이 시작되면 먼저 각 측의 입장 및 요구를 담은 기조발언을 한다. 기조발언 후 바로 협상을 진행할 때도 있고, 휴회 후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검토하는 과정을 거쳐 다음 회담의 방향을 조율하기도 한다. 이후 공동 보도문 혹은 합의문을 작성할지 의논한 뒤, 작성하기로 결정되면 서로의 보도문(합의문)을 교환하며 그 안에 담을 내용을 논의한다. 합의가 되지 않으면 보통 다음 회담 일정을 잡지만, 아예 일정도 잡지 않고 서로 얼굴 붉히며 헤어지는 경우도 많이 있다.

Q. 북한 측에서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을 할 때는 어떻게 대처하나?

A. 북한은 감정적으로 흥분하게 만들어 실수를 유발하는 것을 협상 전략으로 많이 악용한다. 한미연합연습을 중단해라, 주한미군을 철수해라, NLL(Northern Limit Line)을 인정할 수 없다 등 비논리적이고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럴 때는 우리의 기본 입장을 확고히 한다. 가령 한미연합연습 중단을 요구할 경우 “한미연합연습은 한미동맹차원에서 이뤄지는 연례적이고 방어적 연습이지, 군사회담과는 무관하다”, 또 “우리는 이에 대해 매년 통보를 하고 있고, 정말 궁금하다면 직접 와서 북침 연습인지 아닌지 확인해 봐라”는 식으로 우리 입장을 확실하게 전달한다.

2007년 국방장관회담에서 북측 대표 김영철과 만난 적이 있었다. 우리야 사실에 입각해서 대처를 하지만, 당시 북한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거짓말도 하고 상대방에게 모욕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는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거짓말을 지적해가며 대처했다. 그래서 김영철이 나를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며 싫어했었다.

Q. 판문점선언 이후 현재까지의 군사회담에는 어떤 의의가 있나?

A. 군사회담은 판문점선언을 이행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합의만 하고 이행되지 않은 전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합의 중에서도 군통신선 복구, 천안함 폭침으로 파기된 2004년 남북 장성급 회담 합의(서해충돌 방지, 심리전 중단)의 복원 등 서로 간 긴장을 완화하고 신뢰를 구축하는 데 기여한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군사회담이 완전히 복원됐다’, ‘긴장이 완화됐다’라고 하기에는 이르다. 아직 국방장관회담이 남았고, 거기에서 제대로 된 합의들이 나와야 한다. 군사회담 자체도 정례적으로 열려야 하고, 합의 내용 이행을 위해 군사공동위원회 등 제도화가 이뤄져야 한다. 또 필요하다면 실무급을 넘어 고위급 인사들 간의 직통선을 설치해 서로 통화하며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발적으로 일어나더라도 확전되지 않도록 하는 실질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NLL 역시 북한이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군사 분야의 협상은 아직은 출발에 불과하다. 무엇보다도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남북군사회담만으로는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건 핵문제다.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남북한 사이의 평화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Q. 북미정상회담 및 6.12 성명 이후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는 지지부진하다는 평이 많다. 비핵화는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져야 할까?

A. 6.12 성명의 문제점은 구체적인 내용 없이 너무 포괄적인 합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최대한 빨리 후속 협상을 이어나가야 하는데, 후속협상에서도 구체적인 합의가 나오지 않았다. 비핵화를 언제까지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일정표가 나오고 어떻게 시작을 하겠다는 초기조치가 나와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검증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검증을 하려면 북한이 얼마나 핵개발을 진행했는지, 핵은 어디에 보관하는지 등의 목록을 신고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은 종전선언이 우선이라며 이것을 거부하고 있다. 아직까지 북한의 비핵화 조치 중 검증된 것은 없다.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는 터트리는 장면만 보도되고 정확한 검증이 이뤄지지 않았다. 동창리 미사일발사장도 해체했지만 언제든 다시 복원할 수 있다.

Q. 1992년부터 2009년 육군준장 예편까지 남북관계의 개선과 악화를 최전선에서 겪어왔고, 현재도 국방부 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북한 전문가로서 감회가 어떤가?

A. 나는 이산가족 2세다. 아버지의 고향이 평안북도 철산군이다. 예전에 단동이라는 중국 도시에 간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압록강 철교와 그 너머 신의주가 보였다. 분단 전에는 서울에서 열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유럽까지 갈 수 있었을 텐데, 분단으로 인해 유럽은 커녕 아버지의 고향으로 가는 길마저 끊긴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서 남북군사회담의 대표로서 군사적 신뢰구축, 긴장완화, 교류협력지원 등을 통해 통일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는 데에 사명감과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우리가 햇볕정책, 개성공단 개방, 금강산 관광 등으로써 통일에 다가가려 해도 북한은 변하지 않는다는 게 안타깝다. 겉으로는 바뀌는 척하면서 뒤로는 도발, 핵개발, 협상파기 등을 일삼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절망감도 들지만 절대 절망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결국 우리는 북한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비핵화 등으로 진정한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란 사실을 일깨워주는 일을 해야 한다.

Q. 베테랑 협상가로서 ‘협상’을 어려워하는 본교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A.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신뢰다. 상대방을 믿지 않고서는 거래를 할 수 없다. 물건을 살 때 가장 중요한 게 ‘이게 믿을 수 있는 제품인가?’ 하는 것이듯, 서로가 추구하는 목표나 전략은 달라도 ‘나에 대한 신뢰감’은 있어야 한다. 실제 북한 군인들도 나에 대해 “저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있다”며 신뢰성을 인정했다.

신뢰는 곧 정직에서 비롯된다. 상대방의 입장도 같이 고민해야지, 내 이익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 기술과 노하우는 그 뒤에 공부하고 경험을 축적하면 된다. 결국 협상의 원리는 비즈니스든, 외교든, 군사회담이든 그 영역이 다르더라도 거의 비슷하다.

▲2003년 1월 27일 통일각에서 열린 제15차 남북군사실무회담에서 북측 대표 유영철 대좌와 임시통행합의서를 교환하고 있는 문성묵 센터장(당시 남측 수석대표), 임시통행합의서는 그동안 끊어졌던 남북 육로 통행을 재개시켜 남북교류의 통로를 여는 의미를 가졌다. 문성묵 센터장은 ‘당시의 합의가 나에게 가장 보람된 회담 결과’라고 말했다.

▲2007년 5월 11일 통일각에서 열린 제5차 남북장성급군사실무회담 개시 전 북측 대표인 박림수 대좌와 악수를 나누고 있는 문성묵 센터장(당시 남측 수석대표)

유동현 기자/ydh17@knu.ac.kr

김민호 기자/kmh16@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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