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8일부터 12일까지 진행된 본교 학생대표자 보궐선거 후보자 등록 결과 총학생회(이하 총학)의 후보자 등록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2018년 한 해 동안 본교의 총학은 33년간 이어온 총학생회의 대를 잇지 못하게 됐다. 당해 총학이 출범조차 하지 못한 것은 1985년 총학이 부활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해마다 투표율이 50% 언저리를 맴도는 등 학생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학생들의 참여 저하가 계속되는 지금, 지난 50대 동안 명맥을 이어왔던 본교 학생회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그 의미를 생각해본다●

1952. 학도호국단의 설치

본교 초기의 학생자치단체는 지금과 형태·역할이 달랐다. 1952년 5월 28일 종합대학으로서의 출범 이후 본교에는 ‘학도호국단’이 설치됐다. 학도호국단은 대통령령 제186호로 공포된 ‘대한민국 학도호국단 규정’에 따라 발족한 학생자치단체였다. 조국해방과 6·25전쟁을 겪으며 혼란했던 시대상황에서, 학생의 사상통일과 단체 훈련을 통해 애국심을 함양시키고 국가에 헌신함을 목적으로 하는 기구였다. 학도호국단은 일부 학생을 중심으로 운영돼 전체 학생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고, 관제 단체의 특성을 지녀 간부들의 특권의식과 폭력 등 폐단을 낳기도 했다. 본교 학생회장단 동문회 ‘복현회’의 위현복 회장(사회대 사회 80)은 “해방과 전쟁을 겪은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했을 때 학도호국단의 목적은 특수했다”며 “현재 총학과 같은 학생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위 회장은 “그러나 4·19혁명의 주역 상당수가 학도호국단 소속이었다”며 “반독재 투쟁의 중심에 서기도 했던 그들의 업적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1961. 본교 총학의 출범

이승만 전 대통령 하야 이후 꾸려진 허정 과도내각은 국무회의에서 학도호국단의 해체를 결정했다. 4·19혁명을 거치며 본교에는 학원민주화의 바람이 불었고 자치에 대한 학생들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1961년 4월 26일 본교 학생회가 발족했다. 학생들의 적극적인 사회참여가 두드러졌던 시기였다. 대표적인 것은 민족의 염원이었던 통일운동, 2대 악법 반대 투쟁 등이었다. 2대 악법은 학생들의 통일운동이 고조됨에 위기감을 느낀 장면 내각이 국가보안법을 보강해서 발표한 ‘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생들의 투쟁은 5·16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이 들어서며 제동이 걸렸다. 총학 지도부 및 학생운동 참여자에게 구속과 수배가 내려졌고 학생운동에 가담했던 대다수의 학생들은 학업으로 복귀하게 된다. 본교 석원호 강의교수(인문대 철학 78)는 “군사정권 수립 이후에도 총학은 한·일 협정, 6·8부정선거, 3선개헌 등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다”며 “어려운 시대에서도 꾸준히 사회참여를 이어나갔다”고 말했다.

1975. 본교 학도호국단의 재설치

1972년 유신헌법 제정 이후 이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이 전개됐다. 1975년 본교 총학은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선언문을 채택했고, 이후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면서 전국의 대학들에 휴교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학생운동을 억제하기 위해 당해 국무회의에서는 ‘학도호국단 설치령’을 의결하고 대통령령 제7645호로 이를 공포했다. 이에 따라 본교 총학은 해체되고 학도호국단 편제로 개편됐다. 위 회장은 “기존 학생대표자는 직·간·호선 등 그 선출 방식이 다를지라도 학생들의 선거를 통해 뽑혔다”며 “1975~9년 사이의 학생대표자는 총장의 임명을 통해 선발돼서 대표성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이 시기 학생사회에 대한 군사정권의 탄압은 극에 달했다. 1978년 11월 8일에 있었던 본교 학생들의 반 유신 시위에서는 총 67명의 본교생이 징계 처분을 받기도 했다.

1985. 본교 총학 부활

1980년 ‘서울의 봄’ 때 본교의 총학이 재출범했으나 그 수명은 짧았다. 위 회장은 “한 달여의 짧은 총학이었고 곧 바로 학도호국단으로 대체됐다”고 말했다. 이후 5·18민주화운동을 거치고 학생운동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실시되며 학도호국단체제가 계속 유지됐다. 1985년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대정부건의안을 통해 대학 내 학생자치기구 신설을 허용하도록 요청함에 따라 총학의 부활을 위한 움직임이 전개됐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학도호국단 설치령이 폐지되고, 본교 제17대 총학이 출범해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왔다. 군사정부가 이어지던 시기였기에 총학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학생운동의 구심점 확보를 위해 여러 투쟁위원회가 발족됐다. 석 교수는 “대학본부, 교육부, 국가안전기획부 등이 총학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시절이었다”며 “총학을 도와 여러 투쟁위원회가 학생운동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투쟁위원회는 주된 투쟁 내용에 따라 그 명칭을 바꿔가며 이어졌다. 다음 해 제18대 총학의 출범과 함께 제1대 총여학생회(이하 총여)도 출범했다. 이 시기 대학 내에서 소수에 불과했던 여학생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단체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총여가 그 역할을 맡게 됐다. 총여는 제14대까지 이어지며 대학 내 여학생들의 복지 증진과 권리 향상을 위해 활동했다.

2004. 민주화의 확산과 비운동권 총학의 탄생

군사정부 시절 총학은 본교의, 더 나아가 국가전체의 민주화를 외치며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운동권의 색채를 띠었다. 그러나 군사정부가 지나가고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는 등 사회의 변화가 찾아오자 총학의 ‘성향’을 바라보는 본교 내부의 시선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변화된 사회 상황에 대한 만족감, 다양한 계파로 나눠져 선 굵은 학생운동을 전개한 운동권에 대한 피로감이 더해져 제36대 총학 선거(2003년 실시)에서는 총학 부활 이후 처음으로 비운동권이 당선되기에 이른다. 본교 제36대 ‘희망복지’ 총학 문화국장 여원동(경상대 경제통상 98) 씨는 “새로운 대안세력인 비운동권이 취업, 학생복지 등을 내세워 당선됐다”며 “기존 운동권과는 다르게 학생 복지 중심의 공약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고 말했다. 민족의 경제적 주권 회복, 통일 지향 등 학생들이 체감하기 어려운 내용을 외치던 운동권 학생회와는 달리, 복지를 외친 비운동권 학생회가 학생들의 공감을 산 것이다. 이처럼 복지에 대한 학생들의 호응이 높아지자 운동권 역시 복지 공약을 채택하면서 본래와는 다른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총학에 출마한 선본들은 정치적 성향을 선본명으로 내세우던 이전과 달리 학생들의 공감을 살 수 있는 선본명을 내세우는 것으로 변화했다. 여정남기념사업회 사무처장 오택진(공대 전전컴 91) 씨는 “기존 선본은 정치적 성향에 따라 NL(민족해방파)계열은 자주총학, PD(민중민주파)계열은 민중총학 등의 이름을 내걸었다”며 “그러나 비운동권 선본이 등장하며 명칭에 변화를 가졌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관심에서 밀려난 학생사회

사회의 변화는 총학의 색채만을 바꾼 것이 아니었다. 학생사회의 오랜 숙원이었던 민주화가 이뤄지자 목표를 잃은 듯 학생사회는 구성원들의 급격한 참여 감소 문제에 직면했다. 제26대 총학 선거(1993년 실시) 당시 67.8%에 달했던 투표율은 제32대 총학 선거(1999년 실시) 때에는 51.7%까지 하락했고 현재까지 50%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아래의 그래프 참조). 선거에 출마한 선본의 수도 감소해 제34대 총학 선거(2001년 실시) 때에는 역대 처음으로 단독 후보에 대한 찬반 투표 형식으로 선거가 치러졌다. 또한 이 시기 외환위기를 겪으며 경제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학생들은 학생사회에 참여하기보다 개인의 취업·진학에 몰두하게 된다. 오 사무처장은 “권력의 탄압이 약해졌기에 학생들이 목소리를 더 높일 수 있는 여건임에도 그러지 못하고 있다”며 “이전보다 사회가 나아져 불만은 줄어들었으나 학생의 삶은 전보다 힘들어졌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더욱 심화됐다. 지난 2012년 제44대 ‘청춘’ 총학의 사퇴에 따른 보궐선거가 무산돼 중앙운영위원회 체제로 운영됐고, 올해 역시 보궐선거 무산으로 1985년 부활 이후 33년 만에 처음으로 총학이 출범조차 하지 못했다.

학생사회 내부에서도 반성이 필요해

학생사회에 대한 참여 저하는 올해 극에 달했다. 그 결과 총학의 대가 끊기게 됐다. 사회상황의 변화를 그 이유로 꼽을 수는 있지만 총학 내부의 문제점도 분명하다는 의견이 있다. 최병욱(IT대 컴퓨터 15) 씨는 “총학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현재 학생들의 참여 저하는 당연한 결과”라고 말했다. 오 사무처장은 “비슷한 계파의 총학이 들어섰던 과거 운동권 시절과 달리 현재 총학은 매번 새로운 회장이 나오는 형태”라며 “새로운 총학의 서투른 운영이 학생들의 신뢰를 저하시켰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석 교수는 “총학의 의미 중 하나는 학생들의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한 창구 역할”이라며 “오래도록 이어온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참고자료 :

『청춘, 시대를 깨우다』(여정남기념사업회 경북대학교학생운동사편찬위원회)

『경북대학교 60년사』(경북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장은철 기자/jec16@knu.ac.kr

저작권자 © 경북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