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요일이 사라졌다’의 포스터

지금까지 국가와 제도에 의해서 자행된 폭력과 살인은 수도 없이 많았다. 

우리나라에는 1980년 5월 무고한 시민들이 죽거나 다친 일이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 상처는 온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다. 또한 그 당시 사회악 척결이란 명분으로 삼청교육대라는 기관을 설치해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시민들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죄 없는 사람들을 소위 ‘빨갱이’로 몰아 목숨을 빼앗은 경우도 있었다. 또한 국가 권력이 불의에 맞서 시위하는 학생들의 목숨을  앗아가 버린 일도 있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 역사로 본다면 이와 같은 경우는 훨씬 많을 것이다. 현재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불과 몇십 년 전에 존재했던 이 끔찍한 사건들이 잘 와닿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경찰의 물대포 사용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백남기 농민 사건 등 국민들을 향한 국가의 폭력행사는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신체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국가에 의한 인권 침해, 부당한 통제 또한 하나의 폭력이라고 한다면 이처럼 폭력적인 일들이 현재에도 계속 진행 중인 것이다.

영화 ‘월요일이 사라졌다’에서도 국가에 의한 통제가 주된 내용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는 21세기 중후반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이상기후 현상으로 인해 자원이 감소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유전자 조작 식품을 개발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듯싶었으나 오히려 부작용으로 출생률이 더 증가하게 된다. 국가는 출생률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되자 강제적인 인구 조절을 시도한다. 한 가정에 둘 이상의 아이를 출산했을 경우 아이를 냉동 보관시키는 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영화 속 거리 곳곳에는 1가정 1자녀를 선전하는 문구들이 흔하게 보인다. 이는 마치 과거 우리나라의 ‘아들딸 구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영화의 주인공 ‘카렌 셋맨’은 무려 일곱 쌍둥이로 태어난 사람이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생김새와 목소리까지 똑같은 일곱 아이들로 하여금 모두 번갈아 ‘카렌 셋맨’이라는 하나의 가공인물로 생활하게 한다. 여기서 조금 재밌는 점은 첫째는 월요일, 둘째는 화요일과 같이 아이들의 이름을 요일로 지었다는 것이다. 일주일 각각의 하루가 매일 다르듯 아이들은 얼굴은 같지만, 성격도 다르고 추구하는 삶과 패션 스타일 또한 제각각이다. 우리에겐 그 어떤 타인의 것도 아닌 자신의 삶을 살 권리가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그녀들은 자신만의 삶을 살 수 없고 마음대로 외출조차 할 수 없다. 국가 권력에 의해 개인의 삶이 억압당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여기서 볼 수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장면은 영화 후반부에서 나타나는, 대대적으로 선전한 정책의 내용과 달리 아이들을 냉동 보관하지 않고 마취시킨 후 죽여없애는 것이었었다. 이것은 명백히 국가가 개인의 목숨을 임의로 빼앗은 살인행위다. ‘아동제한국’에서 데려오는 아이들 대부분이 저소득층 출신이라는 점에서 경제 계층에 따른 불평등이 극단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식량난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정책의 실상이 알려져 결국 산아제한정책은 폐지된다. 인권을 침해하는 극단적인 정책은 용납될 수 없지만 수많은 신생아들이 울고 있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막막한 마음이 들었다.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운 긴급 상황에서 국가가 과연 어디까지 개인의 삶을 제한할 수 있는지는 계속 생각해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송재경

(인문대 독어독문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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