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파일을 띄운 채 여섯 시간. 기자무변(記者無辯)이 되어버린 빈 문서를 바라본다.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하얀 종이 위를 떠다닌다. 아무 의미 없는 글을 쓰고 지우기를 수십 번, 무슨 말을 해야 ‘기자’의 변(辯)스러울까. 그럴 듯한 말을 쓰기 위해 포털 사이트 뉴스 면을 들락날락거린다. 별 소득이 없다. 선배들의 앞선 변(辯)들을 뒤적거린다. 비슷한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있어 보이는 수식어구들을 갖다 붙인다. 그들의 글과 폼은 제법 비슷해졌지만 어딘가 엉성하다. 나의 생각이 아니다. 반절 정도 채운 글을 모조리 지우고 다시 고뇌한다. 나는 언제부터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잊었는가.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주관식 서술형 문제가 등장할 때면 나는 고민하지 않고 학습지 뒷면의 ‘모범답안’을 펼쳤다. 그리고 답안과 비슷한 말을 그럴듯하게 베껴 적었다. 그것을 나의 생각인양 둔갑시켰다.조금 더 자랐을 때를 떠올린다. “뭐 먹을래?” 나는 내 입으로 들어갈 음식을 정하는 일 조차 스스로 생각하기를 어려워했다. “아무거나” 나의 대답은 늘 아무거나에 그쳤다.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친구의 눈치가 보일 때면 “너 먹고 싶은 거” 따위의 시원치 않은 대답을 내놓았다. 비슷한 질문들에 대해 나는 늘 두 가지 답을 했다. ‘아무거나’ 혹은 ‘네 마음대로’. 나는 나의 생각을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뤘다.대학생이 된 나를 떠올린다. 전공 수업시간. “화자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 같아요?” 교수님의 질문에 나는 난처함을 느꼈다. 책을 뒤적이는 척 옆자리의 친구를 닦달했다. 이윽고 친구가 끼적여둔 답안을 내 답인 것마냥 말하곤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또 스스로 생각하기를 미뤘다. “정우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수습기자 교육기간 동안 내가 받은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나의 생각을 묻는 질문에 답을 하는 것. 나의 생각이 곧 정답인 질문임에도 나는 남의 생각에서 정답을 찾으려 애썼다. 아주 보편적인 답을 꺼내 대충 정적을 메꿨다. 나의 생각을 정의내리는 것이 어려웠다. 학보사의 기자가 됐다. 첫 기사를 썼다. 이미 오래전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잊은 나는 선배들을, 동기들을 붙잡고 물었다. 어디에 취재를 해야 할까. 개요를 이렇게 짜도 괜찮을까. 기사를 이렇게 배치해도 될까. 표제는 무엇으로 정할까. 이 모든 것들을 스스로 생각하기 전에 나는 남들의 생각을 묻고 또 물었다. 정신없이 마감을 끝내고, 나의 바이라인이 새겨진 첫 기사를 손에 쥐고서야 비로소 회의에 빠졌다. 이렇게 쓰인 기사는 나의 기사인가.  두 번째 마감을 앞두고 채워지는 빈 문서 앞에서 나는 스스로 생각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생각으로 쓰인 이 글을 바라본다. 투박하고 볼품없다. 두서도 없다. 의식의 흐름대로 쓰인 가독성도 떨어지는 못난 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름을 걺에 있어 부끄러움이 없는 글이다. 비로소 나의 글이라 명명(命名)할 수 있는 글이다.  

손정우

탐사팀 사회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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