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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기획

국가기념일 2.28 - 동방의 빛을 바라보다


1960년 2월 28일 일요 등교를 지시받은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2.28 민주운동(이하 2.28)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운동이라는 의의를 인정받아 2018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됐지만 다른 민주운동들에 비해 아직 시민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달 28일에는 2.28 국가기념일 지정을 축하하기 위해 대구 곳곳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2.28 국가기념일 지정을 맞아 2.28의 의의를 돌아보고 기념사업의 방향을 점검해보자●



2.28 민주운동 국가기념일 지정 기념
행사 현장


지난달 28일 오전 9시, 2.28 기념공원에서 2.28 찬가 노래비(이하 노래비) 제막식이 열렸다. 이른 아침부터 노래비 주위로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행사가 시작되고, 국민의례와 축사 후 일렬로 서있던 행사 참여진이 노래비에 묶인 리본을 잡았다. 리본을 당기는 순간 흰 천이 떨어지며 노래비의 모습이 드러났다. 노래비에 달린 버튼을 누르자 2.28 찬가가 흘러나온다. 이 노래에 맞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합창을 시작했다. 노래하는 학생들의 얼굴에 쑥스러움이 묻어났다.
이후 2.28 민주운동 기념탑(이하 기념탑) 참배가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여러 정치인, 2.28 주역 등과 함께 2.28 기념탑에 짧게 참배했다. 문 대통령이 떠난 후 조용해진 2.28 기념탑 앞에 정치인과 시민들이 찾아와 향을 피웠다.
점심 즈음이 되자 ‘2.28 민주운동 거리행진 재현행사’가 시작됐다. 대구콘서트하우스 앞, 1960년 2월 28일 당시 현장에 참여했던 8개 고교 학생들이 그때 당시의 교복을 입고 모였다. 각 학교의 기수들이 깃발을 들고 일렬종대로 서 있었다. 대표 학생들이 2.28의 주역들에게 횃불을 이어받고 행진을 시작했다.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라고 적힌 현수막을 든 학생들이 앞장섰다. 뒤이어 커다란 태극기를 든 학생들이 지나가고, 횃불을 든 학생들과 2.28의 주역들, 각 학교의 기수들이 그 뒤를 따라갔다. 피켓과 현수막을 든 각 학교의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이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1960년 2월 28일, 그날의 학생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2.28 민주운동 ‘기념의 수난사’

지난달 6일 2.28이 국가기념일로 공포됐다. 이로서 2.28은 우리나라의 48번째, 민주운동으로는 5번째 국가기념일이 됐다.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최초다. 2.28의 주역인 본교 홍종흠(사회대 사회 63) 동문은 “2.2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됨으로써 대구의 역사가 한국의 역사, 민주 본류의 역사가 됐다”고 말했다.
2.2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면 어떤 점이 달라질까? 가장 큰 변화는 기념행사의 주체가 대구광역시에서 국가보훈처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올해부터 2.28 기념식 행사는 모두 국가보훈처가 주관한다. 대구시 또한 2.28을 알리기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지난달 6일 열린 국가기념일 지정 기자회견에서 “헌법전문과 역사교과서에 2.28을 반영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2.28이 처음부터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2.28 대구민주운동 기념사업회 2대 공동의장이었던 본교 최용호 명예교수(경상대 경제통상)는 “1962년 명덕로타리에 기념탑을 세운 이후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기념식은 진행되었다”며 “그러나 1972년 유신헌법 이후부터 긴급명령 9호가 내려져 옥외 집회가 전부 금지됐고, 1980년대 후반까지 기념식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후 1990년 ‘2.28 대구민주운동 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가 결성됐다. 홍 동문은 “대구는 민주운동이 최초로 일어난 곳임에도 사람들 사이에 ‘수구꼴통’인 지역으로 알려졌다”며 “우리 대구가 대한민국 민주운동의 첫 시작을 했다는 걸 바로 알리자는 취지에서 기념사업회를 결성했다”고 말했다.
2000년부터 기념사업회는 정치권에도 2.28을 알리기 시작했다. 가장 우선적으로 ‘2.28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듣길 원했다. 최 교수는 “2000년 2월 28일에 문화예술회관에 故김대중 전 대통령을 초대했다”며 “당시 김 대통령이 ‘2.28은 건국 이래 최초의 민주운동이다’라고 발언했다”고 회상했다. 이 무렵 기념사업회는 40주년 민주운동사와 2.28 찬가를 만들고, 국제학술회의·회원배가운동 등 2.28 홍보 활동을 진행해왔다.
2009년에는 2.28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에 정식으로 등록됐다. 홍 동문은 “법적으로 2.28이 민주운동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기념사업회는 이후 국가기념일 지정을 위한 100만인 서명 등의 활동을 이어왔다.
이런 활동에도 불구하고 2.28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아직까지 낮은 편이다. 노동일 기념사업회 공동의장은 “기념사업회 자체 인식조사 결과 시민들이 2.28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며 “2.28이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고 언론에서도 일시적으로만 다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기념사업회가 대구시민 59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31.6%가 2.28에 대해 이름만 들어봤거나 처음 들어봤다고 대답했다.


'기념사업' 2.28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

기념사업회는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2.28의 법적·정치적 지위 구축에 많은 힘을 써왔다. 그 덕분에 2.28은 국가기념일 지정 이전에도 ‘최초의 민주운동’이라는 법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2.28 기념사업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시간과 공간 연구소’ 권상구 이사는 “2.28에서 4.19까지 당시 시위 참가자들만 부각되고 대구 시민들의 참여는 축소됐다”며 “기념사업회가 대구시장과 공동의장 체제를 시작하며 특정 학교 중심으로 2.28 기념사업을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기록물 구축과 시민들의 공감에 대한 문제도 지적됐다. 권 이사는 “2.28은 생존자가 비교적 많은 편임에도 시민이 접근 가능한 기록 아카이브가 구축되지 않았고, 시민과의 행사도 단편적이다”며 “아카이브를 구축해 시민들의 접근을 쉽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2.28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운동이지만, 58년만에야 비로소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최 교수는 “2.28은 희생자가 별로 없다는 이유로 평가절하 당해왔다”며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간 사람들에게 대우를 해줘야한다”고 말했다. 2.28은 단순한 운동을 넘어서 한국 민주주의의 성장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홍 동문은 “2.28은 변방국가에 불과했던 한국이 민주적으로 성숙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날의 기억, 증인에게 듣다. 

2.28 대구민주운동은 다른 민주화운동과 달리 희생자의 수가 적은 운동으로 회자되곤 한다. 이때문에 당시에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생존해 기념사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본교에서도 1960년 2월 28일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여럿 만날 수 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최용호 명예교수(경상대 경제통상)와 홍종흠(사회대 사회 63) 동문의 목소리를 빌려 그날 일어난 일들을 재현해봤다●




최용호 명예교수(경상대 경제통상)
1960년 2월 28일이면 3.15선거 보름 전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들로부터 자유당 유세는 많이, 민주당 유세는 적게 듣길 원했던 것 같다. 당시 여당인 자유당 유세일에는 동네직장별로 사람들을 동원해서 많이 가도록 독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선거 직전이었고, 대구만큼 큰 도시에서 유세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2월 28일은 야당인 민주당의 유세일이었다. 당시 2월 25일 경북고를 시작으로 대구 시내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일에 학교에 오라’는 통보가 떨어졌다. 어디는 ‘청소하고 놀자’고 하기도 하고 혹은 ‘임시 시험을 친다’고 하기도 했다. 그래도 어떤 분위기에서 그런 결정이 내려졌는지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알고 있었다. 사대부고는 2월 27일에 선배들의 졸업식이 있었는데, 당일 종례 시간에 ’일요일에 나와 청소하자‘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당시 사대부고 2학년 부회장이었다. 종례 후 학교를 나오는 길에 당시 대구고등학교 학생회장이었던 손진흥 씨가 나를 찾아왔다. 손진흥 씨는 나에게 “대구고도 일요일에 학교를 나오라고 하던데 어쩌면 좋을까”물으며 나와 상의하려 했다. 
저녁 무렵 당시 경북고등학교 학생부위원장이었던 이대우 선생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 집에는 경북고, 대구고 학생들 몇 명이 모여있었다. 자연스럽게 다음 날 어떤 행동을 할지 논의했다. 경북고는 이미 2월 25일부터 독재에 항거하는 선언문을 만들고 있었다. 27일 밤에는 대구고와 사대부고도 선언문을 만들었다. 새벽 4시쯤 선언문 제작을 맡겼다. 그러나 그때 붓글씨로 선언문을 쓰던 친구 댁 어르신이 이를 발견하고 모두 불태워버렸다. 
2월 28일이 되자 각 학교의 학생들은 저마다 행동을 시작했다. 경북고가 12시 50분쯤 가장 먼저 밖으로 나갔다. 바로 이어서 대구고가 반월당으로 나갔다. 사대부고는 학생들의 행동을 눈치챈 선생님들이 막아서는 바람에 교문을 박차고 나가진 못했다. 그래서 학교 안에서 단식 투쟁을 했다. 그러다가 저녁쯤에 야간 시위를 시작했다. 사대부고의 경우 팀을 두 개로 나눠 한 팀은 학교 가까이 있었던 매일신문사 건물로 들어가 나름의 결의문을 낭독했다. 또 다른 한 팀은 동인로터리에서 시내로 들어갔다. 물론 두 팀 다 경찰에 체포됐다.
밤 11시 쯤 되자 체포됐던 학생들이 하나 둘 씩 풀려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중앙정부로부터‘그날 학생들의 행위는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라는 식의 음모론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고등학생이 뭘 알겠느냐’는 인식이 있었던 건지, 참가자들을 크게 처벌하진 않았다. 





홍종흠 동문(사회대 사회 63) 
그 당시의 사회에서는 국민들이 절망을 많이 했다. 6.25 전쟁 이후 사회는 복구되지 않고, 국민들은 극도로 어려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골목마다 걸인들이 우글거리고, 장터에는 좀도둑과 서리꾼들이 아주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 정권은 장기집권과 독재를 통한 이권 확보에 눈이 멀어 있었다. 
1960년 2월 28일에 대구 시내 공립고등학교 학생들은 모두 학교를 나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토끼 사냥, 단체 영화 관람 등을 이유로 들었다. 경북고의 경우 1960년 2월 25일 종례시간에 ‘일요일에 등교하라’는 말을 듣고 선생님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25일 저녁부터 27일까지 교실 안은 말 그대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경북고는 학생회 주도로 28일에 의사 표현을 하기로 했다. 27일까지 학생회 간부들은 서로 선언문을 작성하고, 구호를 만드는 등 시위를 준비했다. 당일 12시가 되자 경북고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집결했다. 당시 학교에서는 단체로 영화를 관람하자고 학생들을 모은 것이었다. 그러나 학생 몇 명이 단상 위에 올라가 선언문을 낭독하고, 선생님들을 뿌리친 채 시위를 하러 나갔다. 
당시 시민들이 굉장히 많은 호응을 해준 것으로 기억한다. 경찰이 제재를 시작하자 일부는 골목에 숨었는데, 인근 주민들이 학생들을 숨겨주거나 옷과 밥을 주기도 했다. 대구 시민들이 자유당 독재 항거 시위를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위가 끝난 후 저녁에 경북경찰청으로 많은 학생들이 붙잡혀왔다. 경찰은 학생들이  ‘공산주의자의 사주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시민들의 항의가 심해지자 ‘야당의 사주’라고 말을 바꿨다. 이후 항의가 더 거세지자 학생들을 모두 풀어줬다. 





▲장난끼 넘치는 ‘투쟁’. 행징을 진행하던 중 남학생들이 장난을 치며 웃고 있다. 결의에 찬 모습보다는 소풍을 나온 모습이다. 58년전 2.28 당시 학생들이 빼앗긴 휴일을 오늘 이들이 학교에 빠져서 보상받기라도 하는걸까. 


▲어색하기만 한 ‘2.28’ 지난 달 28일 찬가노래비 제헌식에 참가한 학생들이 찬가를 부르고 있다. 학생들은 2.28 찬가를 부를 때 어색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꺼지지 않는 횃불. 일기예보에서 강한 비바람이 예고됐던 이날, 행진 중에 학생들이 들고있는 횃불이 꺼지기도 했다. 이들은 얼마 안가 인솔교사를 중심으로 불씨를 옮겨 서로의 횃불을 켜주기도 했다.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행진을 마친 학생들과 교육 관계자들이 최종 횃불을 점화하고 있다.


▲열정적인 행진. 지난 달 28일 열린 '2.28민주운동 재현행사'에 참여한 경북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조선희 기자/jsh17@knu.ac.kr
이광희 기자/lkh16@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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