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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기획

혼자만의 병이 아닌 우울증, 환자와 그 주변인

“여기 올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냥… 조금 불안하고… 화가 좀 납니다….” 


진료실 창 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거의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끊어질 듯 천천히 말을 내뱉는다. 귀 기울여 들어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다. 물어도 더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다. 할 수 없이 옆에 있는 환자의 여자친구에게 질문을 이어간다. 7년을 사귀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 달 전 난데없이 화를 내면서 헤어지자고 해 울기도 엄청 울었다고 한다.


“작년 봄, 억울하게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어요. 여러 군데 취직을 하려고 무척 애를 쓰기는 했는데 잘 안 되자, 지난해 겨울부터는 기가 많이 죽어 있어 보기가 좀 딱했어요. 술을 자주 마시고, 술을 마시면 화를 엄청 내요. 전에 다니던 직장에 대한 욕도 많이 하고, 너무 화를 내고 하니 저도 무서워서 만나기가 솔직히 싫었어요. 타지에 사는 가족들한테 연락도 잘 안 하고 친구도 만나지 않고, 집에 가보면 그냥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만 하고 있어요. 기업에 원서를 낸다고는 하는데 이제는 그것도 안 하는 것 같아요. 집에만 그냥 있어요. 저는 그래도 이 사람을 걱정하고 있는데, 하루는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서로 다퉜어요. 그만 보자고 하더라고요. 저도 마음이 상해서 연락을 끊고 지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아 자꾸 걱정되고… 그러면 제가 엄청 후회할 것 같아서요. 의대에 다니는 친구한테 이야기하니 병원에 가보는 게 낫겠다 해서, 지난주에 만나 겨우 설득해 오늘 병원에 데려온 거예요.”


이 남자 분은 우울증을 앓고 있다. 우울증은 우울한 기분이 주 증상이다. 그런데 우울한 기분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많아 일반인들은 우울증인지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별일도 아닌데 예민하게 반응한다거나 짜증과 신경질을 자주 부리는 경우가 있고, 게임에만 매달리거나 술을 자주 마시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난폭해지거나 공격적인 행동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전과 행동이나 생각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대개 그럴만한 충격적인 일이 있고 난 뒤에 서서히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충격을 받아서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거란 생각으로 놔두는 경우가 많다. 우울감 이외에 무감동, 즐거움의 상실과 같은 기분의 변화도 동반된다. 이전에는 무척 좋아하고 관심을 가졌던 것에 흥미가 확 떨어진다. 의욕 저하가 특징적이다. 만사가 귀찮다. 무언가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냥 하루를 보낸다. 원래 열정적이었던 사람이라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다. 주로 혼자 지내려 한다. 사람들과 만나려 하지 않 는다. 잠수를 타듯이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에너지 수준이 떨어져서 힘이 없고 쉽게 피곤해진다. 아무리 자도 계속 잠이 온다. 머릿속은 텅 빈 느낌이다. 검사를 해보면 이상은 없다고 하는데 몸이 여기저기 아프고 기력이 예전 같지가 않다. 신체적 통증만 보이는 우울증도 많고, 정반대의 우울증도 있다. 무엇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안정이 안 되며 불안하고 초조해서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잠자리에 들기가 어렵고 자더 라도 자주 깨게 된다. 머릿속은 안 좋은 생각으로 가득 차서 어떻게라도 비워내 버리고 싶다. 밥맛이 없어져 체중이 빠지기도 하고 반대로 체중이 늘기도 한다. 우울증은 뇌에 생긴 병이기 때문에 뇌가 수행하는 인지 기능 저하를 초래한다. 주의 집중력, 기억력, 작업기억, 실행기능, 언어기능 등이 떨어져서 치매가 온 것 같다. 하지 않으려 해도 모든 것들이 부정적으로만 생각돼, 마치 회색 선글라스를 쓴 것처럼 만물이 회색으로만 가득 차 보인다. 우울증은 일상생 활을 영위하기 힘들게 하고 직장생활을 그 만두게 하는 가장 흔한 질병이다. 우울증의 가장 심각한 결과는 죽음에 대한 생각과 자살 시도다. 자살 환자의 70-90% 이상이 정신장애를 앓고 있었고 그중 70%는 우울증 이다. 우울증은 환자의 상당수가 자살 사고 를 겪고 15%는 자살로 사망하게 되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우울증의 원인은 스트레스다. 그래서 스 트레스가 뇌에 부가될 때 나타나는 증상인 불면증, 식욕저하, 가슴 두근거림, 식은 땀, 불안과 같은 신체 변화가 우울증의 초기 증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러한 신체의 변화가 오랜 기간 지속된다면 우울증이 온 것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우울증은 재발이 잦은 병이므로 한 번 발병한 사람에게 불면증이나 불안감이 2주 이상 지속된다면 우울증이 재발하려는 것은 아닌 지 살펴봐야 한다. 우울증의 원인이 되는 스트레스 중에 가장 흔한 것은 상실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의 상실은 결국 자존감을 낮추게 되고 자존심의 손상을 유발한다. 자존심의 손상은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스트레스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래야 해’, ‘나는 남들에게 이 정도는 대접을 받아야 해’라는, 자기를 지켜주는 자존심의 붕괴는 계속해서 자신의 뇌를 괴롭힌다. 어떻게 해서든 지금 괴로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거나 감당할 수 없게 되면 결국 뇌는 자신을 망가뜨려 버린다. 


결국, 우울증은 자존심을 형성하고 평생 이것을 지키면서 살아가려는 고등한 생물에게만 주어진 형벌인 셈이다. 그래서 혹자는 인간이 진화를 통해 만물의 영장이 됐지만 그 대가로 우울증을 받아들이게 됐다고도 한다. 우울증이 심하면 심할수록 자신이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상황이 좋아질 수 없는 것이라 단정 짓게 되므로 치료나 중재도 거부한다. 그래서 심한 우울증 환자의 치료 첫 단계는 자신이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되기도 한 다. 경증의 증상은 상황이 호전되거나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회복되기도 한다. 하지만 경증이라도 수개월 지속하거나 앞에서 설명한 4~5가지 이상의 우울 증상이 동시에 2~3주 이상 지속된다면 반드시 진단이 필요하다. 우울증은 극도의 스트레스이므로 오래 지속되면 뇌 세포에 변화를 유발해 자신의 힘으로는 회복하지 못하고 자살의 가능성이 커지므로 변화된 뇌세포와 신경전달물질을 빨리 회복시키는 약물치료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울증은 뇌에 생기는 흔한 질병이다. 5명 중 1명이 걸리고 남성보다 여성에게 2배 가량 많이 발생한다. 세계보건기구(WHO) 발표에 따르면 2016년 기준 한국의 우울증 환자는 214만 5,000여 명에 달한다. 어느 연령에서나, 지위고하를 망라하고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 주면 되나요”


“우선 남자친구가 싫다고 해도 자주 만나세요. 혼자 두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다음번에는 남자친구가 가족분과 같이 올 수 있도록 가족분에게 알려주세요. 남자친구가 안 좋은 이야기를 하거나 화를 내도 본심이 아니니 그리 마음에 두지 마세요. 지금은 병이 남자친구를 지배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만 해도 좋습니다. 남자친구가 이야기를 한다면 그냥 들어 주세요. 무언가 좋은 얘기를 해 줄려고 노력하거나 근사한 말로 설득시킬려고 애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우울증이 부정적인 생각을 가득 채웠고 본인이 어쩔 수 없도록 기분이 처져 있어 말로 설득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나친 거예요. 본인의 의지로 기분을 호전할 수가 없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마치 당뇨병 환자의 마음을 바로 잡아 고치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상태로서는 약물치료로 대화가 가능 한 수준까지 호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상담치료도 효과를 볼 수가 있어요. 혹시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거나 무언가 인생을 정리하는 듯한 행동을 하면 위험 신호이니 언제든지 병원에 데려오고, 필요하다면 입원도 고려하는 게 좋습 니다. 또 너무 불안·초조해 하면 병원으로 빨리 데려오세요.”


우울증은 가벼운 정도에서 심각한 정도까지 그 정도가 다양하다. 우울한 기분이 나타나지 않는 우울증도 있어 일반인들이 잘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흔하다. 또 우울증에는 전염성이 있어서 가까운 사람이 우울증을 앓게 되면 자신의 기분도 같이 우울해지고 관계가 악화되며 일상생활과 직장생활에도 영향을 줘 경제적 피해 또한 커진다. 만약 가까운 사람이 우울증으로 자해나 자살을 시도한다면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으로 평생을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만약 옆의 누군가가 이전과 확연히 다른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어느 정도 이상 지속적으로 보이고, 연락을 단절한 채 혼자 있고 싶어 한다면 우울증이 아닐지 생각 해 보자.

3월이다. 만물이 재생하는 봄이다. 지금처럼 온도나 일조량이 바뀌는 시절에는 뇌가 약해져서 스트레스에 취약하고 우울증이 발병하기 쉽다. 새 학기는 스트레스가 엄청 증가하는 시기이다. 이래저래 필자 같이 우울증을 치료하는 의사가 많이 바빠지는 계절이 됐다.


원승희 교수

(의학전문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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