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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현메아리

열린글터 작가모집 - 소설 부문 '시뮬라크르 (3)'

>>지난 호에 이어

 입사한 지 며칠 안 되어 모든 게 낯설던 날 중 생일이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던 야근이 야속하게도 없던 날이었고, 갑자기 비어버린 시간과 뭐라도 해야 한다고 재촉하는 듯한 기념일로 불편한 저녁이었다. 괜히 SNS 친구 목록만 기웃거리다가 걸려온 전화를 덜컥 받았다. 뭐야, 바로 받네. 회사 앞에서 잠깐 보자던 은미 대리의 팔짱은 나를 네일샵으로 이끌었다. 혼자 가기 적적하더라야. 뿌리치고 달아나던 마음과는 달리 두 눈은 처음 본 다채로운 색과 반짝이는 파츠들에 푹 빠져있었다. 예약을 했는지 바로 우리 차례였고, 맞은편의 직원을 꼬박 바라보았다. 원하시는 디자인 있냐고 묻는 사무적인 말투. 새끼손가락으로 해달라고 내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만들어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쟤 아마 처음 온 거일 테니깐 케어부터 해주세요. 겹겹이 칠해지는 자신의 손톱을 보며 말하는 은미 대리였다. 잠시 뒤, 마무리된 왼손을 부여잡고 가만히 나를 쳐다보는 직원의 눈빛에 오른손을 마저 내밀었다. 네 손가락을 꼭 맞잡은 다섯 손가락이 부재를 알기까지는 금방이었고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스스로의 탄식에 놀란 직원은 죄송하다며 연신 머리를 굽혔다. 나는 괜찮다고 그 쪽 잘못이 아니라고 조용히 좀 해달라고 말도 못 한 채,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절망과도 같던 소란이 잦아들고 아직 고개를 숙인 나에게 직원은 살며시 얘기했다. 특별히 원래 가격의 90%만 받을게요.
 

 -여기 복사 요청 하신 것 가져왔습니다.
 
 -네? 아, 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실수가 아니라 다른 말은 잃어버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열리는 출입구 자동문의 약한 소음에 소리를 묻어 내본다. 싫어요.
 

 -요샌 말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어.
 
 -그런가.
 
 -네. 괜찮아요. 여기 복사 요청 하신 것 가져왔습니다. 이 세 말 말고는 소리 내어 본적이 없어.

  -잃어버린 기분을 간직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닐까. 잃어버린 건 찾으면 되잖아.
 
 -잃어버린 기분마저 잃어버리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세 말 만 녹음해 저장해 놓은 인형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그 있잖아. 배를 누르면 사랑해요 라고 말하는 인형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사람이 누르는 그런 인형. 원하는 대답을 들으려고 존재하는 인형. 그게 내가 되지 않을까.
 

 이윽고 배를 꾹 누르는 손길이 느껴진다. 인형은 그렇게 세게 누르지 않아. 하려던 말은 끓어오르는 무언가에 막혀 몸 속 곳곳을 헤매다 투명해진다. 간신히 붙잡은 손은 아무런 촉감도 없었고 검지의 갈색 점이 뚜렷했다. 손가락을 타고 오르는 손등과 손목에 두드러진 볼록하고도 둥그런 뼈. 꼭 한번하고도 반을 더 접은 파란 소매 끝. 이미 이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의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기다려온 사람처럼. 이미 예견한 일인 양 여유로운 웃음을 띄어주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파란 소매 끝은 한 치의 무늬 없이 그 색 그대로의 상의였고 콤플렉스이었던 살짝 나온 목젖을 지나면 여유로운 웃음을 짓는 내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자신인 스스로를 마주했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이 까마득히 길게 다가올 무렵 조금 멀어졌다. 여전히 마주한 얼굴은 검은 눈동자의 굴림도 눈꺼풀의 깜박임도 없이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눈동자는 갈색에 가까웠고 그 갈색이 무한한 늪처럼 다가와 나는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괜찮으세요?
 

 새로운 손길이 내 어깨를 흔든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다. 이 손길의 손도 아무런 촉감이 없을 것이라고 검지에는 갈색의 점이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돌아본다. 눈에는 여전히 웃음 짓는 내가 맺혔다. 그런 나는 그 옆에도. 그 옆 옆에도. 어느새 나를 둘러싼 수많은 나 속에 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검지의 갈색 점을 뽐내며 손을 뻗는 그 무리들 속에 내가 존재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에 스스로를 대견해 하며 그대로 쓰러졌다. 검은 아스팔트 도로위에 하얀 차선을 지키는 흰 차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갔고, 그 사이로 꽃집이 보였다. 항상 위에서만 바라보던 꽃집은 이제 그 바닥이 내 시선과 같은 높이이다. 연보란 수국을 먼저 내놓는 아주머니는 파란 상의를 입고 있었고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무당벌레의 무늬들 모두 파란 상의를 입고 약간 튀어나온 목젖을 가지고 있었다.
 



장종원
(농생대 농업토목공학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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