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7일 트럼프 대통령 방한 관련 청와대 만찬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초대된 데 대해 일본 정부가 항의했다. 10월 26일에는 한국 등 8개국의 15개 시민단체가 공동으로 추진한 ‘위안부’ 관련 기록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업에 관해 한국 외교부가 “등재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밝힌 데 대해서도 항의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지난해 말에는 부산의 일본 총영사관 부근에 시민들이 소녀상을 세운 데 대해 항의한다며 대사와 총영사를 85일이나 ‘일시귀국’시키는 초강수까지 감행했다. 요컨대 ‘위안부’ 문제에 관해 ‘한국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도를 넘은 무례한 행동을 거듭하는 근거는 2015년 12월 28일에 한일 외교장관이 발표한 ‘합의’이다. 일본 정부가 ‘책임을 통감’하고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 ‘사죄와 반성’을 표명한다고 밝히고, 한국 정부가 설립하는 재단에 일본 정부가 10억엔을 출연하는 대신,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불가역적 해결’과 ‘국제사회에서의 비난·비판 자제’를 보증하고, ‘서울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한 일본 정부의 우려가 해결되도록 노력한다’고 약속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합의’는 무대의 풍경을 돌연 바꾸어버렸다. 피해자들과 시민들로부터 책임 추궁을 당하던 일본 정부는 슬그머니 무대에서 내려와 객석 맨 앞자리에서 마치 무대감독인 양 이런저런 주문을 했다. 무대 위의 가장 끝자락에서 책임 추궁에 동참하고 있던 한국 정부는 돌연 무대의 반대편으로 뛰어가 일본 정부를 대신하여 피해자들과 시민들에 맞서는 역할을 자임했다. 1990년대 이래 30년 가까운 오랜 세월동안 피해자들이 전 세계를 돌며 절실하게 호소하고 국제 인권기구들이 응답한 결과 만들어진 ‘역사’, ‘위안부’ 문제를 보편적 여성인권 문제의 대명사로 끌어올린 그 ‘역사’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박근혜 전 정부가 초래한 ‘참사’의 하나이다.

유엔 인권기구들의 평가는 준엄하다. ‘합의’ 이후 유엔의 여성차별철폐위원회, 고문방지위원회, 자유권규약위원회 등은 ‘합의’가 “피해자 중심의 접근”을 하지 않은 것을 질타하고, 일본 정부는 공식 사죄·배상·진상규명·역사교육·책임자 처벌을 해야 하며, 한국 정부는 ‘합의’를 개정해야 한다고 거듭 짚었다. 아베 정부는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에 매달리고 있지만, 국제 인권기구들은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은 없다, 지금도 일본 정부는 ‘법적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이래 ‘위안부’ 문제를 다루어 온, 그래서 ‘법적 책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국제 인권기구들에 의해서 ‘합의’는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새 정부 출범 다음 날인 5월 11일 아베 총리와 전화회담을 하면서 “우리 국민들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그 합의를 수용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6월 20일에 보도된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는 “일본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은 그 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밝혔다. 8월 15일의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국민적 합의에 의한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보상, 진실규명과 재발방지 약속이라는 국제사회의 원칙을 반드시 지킬 것”이라고 다짐했다.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문제의 본질과 역사에 관한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고 국제무대에서 그 입장을 지속적으로 확인해야 하고, 진상규명과 역사교육을 위한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피해자 지원과 위령에 관한 사업을 한국 정부의 예산으로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러한 조치들은 애당초 ‘합의’와 관련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즉각적으로 실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문재인 정부는 일본 정부에 대해 ‘법적 책임’을 적극적으로 추궁해야 한다. 당연히 일본 정부의 반발이 따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제 인권기구들이 가리키는 방향이고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것이다. 게다가 피해자들이 ‘합의’에 관한 한국 정부의 책임을 묻기 위해 헌법소원과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이미 제기해 놓은 상태이기에 피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되돌려 생각하면 국제 인권기구들과 피해자들의 강력한 목소리는 문재인 정부가 또 하나의 ‘적폐청산’을 치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든든한 디딤돌이기도 하다.

김창록 교수

(법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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