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놀이인가? 우리는 놀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놀이가 심심풀이, 오락 등의 유치한 것 혹은 노동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휴식과 관계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놀이에 대한 이러한 통념은 놀이를 학문, 특히 철학의 주제가 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런데 우리가 철학사를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오랜 세월 놀이가 철학의 주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생각하고 노동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놀이하는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놀이가 삶의 근본 조건이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다. 

놀이가 언제부터, 그리고 어느 정도로 인간 삶과 관계했는지는 각 문명권마다 놀이에 대한 고대어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또한 고대어의 의미 분석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놀이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듯이 소극적이고, 부정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 자연 철학에서도 이미 놀이는 철학의 주제로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헤라클레이토스이다. 그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것은 ‘장기놀이하는 아이이다’라고 대답한다. 놀이를 비본질적인 것, 비도덕적인 것, 비생산적인 것 등 유동적이며, 현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철학의 주제에서 배제하려는 것은 엄밀히 말해 놀이자체에서 기원하기보다 놀이에 대한 해석주체의 가치평가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철학사에서 놀이에 대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평가는 플라톤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은 놀이가 가진 우연성, 불연속성, 그리고 맥락 의존성 등의 속성이 실재(idea)에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놀이는 참과 거짓, 선과 악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인간의 정신을 실재가 아닌 그림자 혹은 가상으로 유혹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플라톤이 화가나 시인 등의 창작행위를 이데아의 모상인 사물을 다시 모방하거나 뮤즈에 홀린 헛된 짓으로 보고 그러한 행위를 놀이(paidia)로 칭한 것에서 놀이에 대한 그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실천적 차원에서도 놀이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데, 플라톤은 놀이를 유아의 속성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유아의 사회성 획득을 위해 놀이가 수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유아단계 이후의 교육에서 놀이는 엄격히 규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놀이는 근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다. 근대에서 놀이에 관심은 미학(Asthetik)의 탄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움가르텐, 칸트 그리고 실러 등의 철학자들은 이성의 영역에 과학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 이외에 미적 판단의 능력을 덧붙인다. 즉 인간은 진리와 선 이외에도 미를 추구하는 존재인 것이다. 칸트는 미적 판단, 즉 ‘이것은 아름답다’라는 판단은 지성과 상상력의 우연적 놀이에서 가능함을 『판단력 비판』에서 상세히 설명한다. 또한 실러는 자신의 시대에 만연한 인간성 상실을 ‘형식 충동’에 기초한 기계적이고 과학적 세계관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그는 인간성 상실의 극복은 형식충동과 감성충동의 조화에서 가능하다고 보는데, 두 충동의 조화에서 제 3의 충동이 등장한다. 이것이 바로 ‘놀이충동’이다. 실러는 인간은 오직 “놀이할 경우에만 온전한 인간”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놀이에 대해 근대가 보여주는 태도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칸트에서 놀이는 지성과 상상력이라는 이성의 이질적인 능력을 매개하기 위한 장치이고, 실러에서도 놀이는 그 자체 독립적 지위를 가지기 보다는 형식충동과 감성충동의 종속 변수에 머문다. 고대와 마찬가지로 놀이는 교육학에서 유아 교육과 관련하여 매우 제한적으로 수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양인은 놀이를 멀리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놀이는 특히 인간의 본질을 실현하는 노동과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비생산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놀이는 이전 시대와 전혀 다른 평가를 받게 된다. 놀이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을 뿌리부터 흔든 것은, 문화사를 비롯한 사회과학이 이룬 실증적 연구가 출발점이 되었다. ‘계몽의 기획’과 그 약속의 실현을 믿었던 근대의 후예들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역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인간성의 타락과 문명의 야만성을 목격하게 된다. 그들은 계몽의 역습의 근원이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고, 문화의 원동력으로 확신했던 노동이라는 사실에서 경악했다. 컨베이어벨트에 붙박이처럼 붙어 나사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조립하는 <모던 타임즈>의 찰리와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집단수용소에서 노동은 유적 존재의 자기실현으로서 노동과는 거리가 너무 먼 것이다. 

현대철학에서 놀이는 인간과 세계 이해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중심개념으로 자리 잡는다. 그 이유는 20세기, 형이상학과 보편적 규범이 권위를 상실한 시대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보편적 진리나 규범 보다 개인의 자유와 개성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놀이의 속성인 우연성과 유동성, 불구속성 등과 일치한다. 니체를 필두로 한 놀이에 대한 백가쟁명식의 철학적 성찰은 바로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놀이 철학에서 니체가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위대한 과제를 대하는 방법으로 놀이보다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한다 : 이것이 바로 위대함의 징표이자, 본질적인 전제 조건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니체 사상이 놀이의 정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의 ‘예술철학’, ‘관점주의’, ‘비도덕주의’, ‘힘의 의지’, ‘영원회귀’, ‘위버멘쉬’, ‘운명애’등은 모두 놀이의 정신을 통해 해명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니체 이후 놀이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접근이 시도되었다. 가장 급진적인 사유실험은 20세기 후반 탈구조주의, 혹은 해체주의의 이름으로 진행된 프랑스 현대철학이 보여주고 있다. 데리다의 ‘차이’의 철학, 들뢰즈의 생성의 철학, 그리고 료타르의 포스트모던적 조건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모두 놀이와 직간접적 관계가 있다. 또한 미국의 신실용주의자인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역시 놀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에 앞서 언어의 쓰임과 의미의 맥락성 차원에서 언어놀이(Sprachspiel)’, ‘말놀이(Wortspiel)’를  철학의 핵심개념으로 받아들인 비트겐슈타인에게서도 놀이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주체철학의 극복을 위해 존재론적 전회를 시도한 하이데거, 가다머 그리고 핑크의 놀이에 대한 철학적 사유도 주목할 만하다. 

현대철학에서 놀이에 대한 관심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근대성의 극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근대철학은 주체, 이성, 정신, 양심 등을 통해 사유와 행위의 최종 근거를 확보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다. 근대철학이 찾은 최종근거는 인식과 도덕의 출발점이자 평가의 기준이 된다. 이러한 최종근거는 근대 계몽주의에서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지배 이념으로 작동했음을 말해준다. 철학에서 놀이에 대한 관심은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과 직접적으로 관계한다. 니체는 근대의 가치체계를 ‘낡은 서판’으로 비판하고 그것을 부숴버리기를 명령한다. 그 대신 새로운 가치들로 ‘새로운 서판’을 채워야한다고 본다. 새로운 서판에서 가장 먼저 새겨질 가치는 놀이이다. 

그렇다면 철학자들은 놀이에서 어떤 가치들을 발견하고, 그것이 왜 근대성 극복과 관계하는가? 첫째, 놀이에서 중요한 것은 주체나 중심이 아니라 놀이의 과정 자체이다. 놀이의 의미는 놀이하는 자의 의도에서 비롯되기보다는 놀이 활동의 산물이다. 놀이하는 자는 오히려 놀이에 참여함으로써 의미를 획득한다. 놀이와 놀이자의 관계에서 주체와 객체는 완전히 전도된다. 가다머의 ‘놀이가 놀이한다’는 언명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다머는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관계를 전도시켜, 예술작품에 예술가가 참여하는 것으로 보고 이것을 놀이로 설명한다.  이렇게 놀이는 근대의 주체철학을 극복할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둘째, 놀이는 존재와 생성에 관한 전통 형이상학의 좌표를 전도시킨다.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이래, 존재는 이데아, 형상, 실체 등의 현상의 배후에 있는 실재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 동일적이고, 불변하며, 완전하다. 따라서 그것은 생성 변화하는 현상계를 초월한다. 존재의 측면에서 놀이는 우연적이고, 불연속적이며, 맥락 의존적이고 불완전한 것이다. 따라서 놀이는 불안을 초래한다. 그런데 20세기의 사회문화적 환경은 선형적 질서로 도저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고, 더욱이 자연과학적 탐구는 우리를 둘러싼 우주는 질서가 아니라 카오스 상태에 놓여있고, 우연이 필연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따라서 변화와 생성을 속성으로 하는 놀이가 존재를 기초로 한 전통적 형이상학보다 삶과 세계를 설명하는 데 훨씬 더 유효하다.

셋째, 놀이가 가진 생성과 우연, 순간의 속성은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의 뿌리가 된다. 전통 형이상학에서는 놀이의 이러한 속성이 현상적인 것으로 진리에서 거리가 먼 것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그것은 진리를 인식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전통 형이상학의 권위가 허상임이 폭로되고, 인간 개별자의 개성이 강조되면서 놀이가 가진 속성은 오히려 개별자의 인식과 가치 실현에 본질적인 것으로 수용되었다. 특히 예술철학에서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니체, 가다머, 아도르노,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자와 로티 등 신실용주의자의 철학에서 우연과, 순간은 중요한 철학적 주제가 된다.

넷째, 놀이가 가진 모호한 지위, 가다머의 개념으로 보면 중동태의 속성은 주체와 객체, 선과 악, 본질과 현상 등의 이분법에 기초한 형이상학을 극복하는데 중요한 단초가 된다. 놀이의 비-주관성, 비-목적성 혹은 무-목적성, 무-의미성의 접두어 ‘비’(非) 혹은 ‘무’(無)는 단순히 실재(實在)와 모순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세계의 고유한 존재방식을 의미한다. 세계 혹은 하이데거의 개념을 빌자면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또 인간, 혹은 주체로 인식될 수 없는 일체 존재자들을 개방시키는 지평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 가다머 그리고 핑크는 놀이의 존재론을 통해 놀이가 가진 무의 속성에 주목하고 주체 중심의 전통 형이상학을 극복하려고 했다.   

정낙림 교수

(인문대 철학)

저작권자 © 경북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