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 하나가 창가에 긴 사선을 그린다. 곧 부분 부분이 끊기며 새로운 방울이 진다. 방울진 빗물은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다가 새로운 빗방울과 부딪혀 다시 사선을 그린다. 창가에는 방울마다 투명한 길이 있는지 타고 내리는 모양이 저마다 제각각이다.그렇게 옹골진 방울들로 그득한 창가는 기우는 해와 가로등 그리고 차의 헤드라이트를 담고 있다. 원인 모를 불빛들이 하나둘 켜질 무렵, 창틀은 액자가 되어 수채화를 이룬다. 시시각각 변하는 수채화에는 파란 우산 속 여인이 보인다. 그녀의 검은 구두 굽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가 이내 경계 저편으로 넘어가고, 고동색 수레를 끄는 할아버지가 지나간다. 그득 쌓인 폐지들은 더욱 진해진 회색빛으로 곱절은 무거워졌음을 얘기하고 있는 듯하다. 변하는 것들의 이름은 봄날 저녁. 봄이라는 계절도 저녁이라는 시간도 희미하지만, 경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배경인 아스팔트의 주차장에 어느새 물웅덩이가 군데군데 고인다. 마냥 평평해 보였던 검기만한 땅 위에 이런저런 음영이 생긴다. 주차된 자동차나 큰 가로수가 담겨있는 웅덩이에 떨어지는 비들로 울렁거림이 담긴다. 꼭 퍼즐 조각과도 같은 그것들을 피해 조심히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우습다.이윽고, 큰 창을 통해 자연광으로 내부를 밝히는 카페에 전등이 하나둘 켜진다. 부스스하게 내가 비치며 수채화는 정물화가 된다. 어색하다. 괜히 다리를 꼬아보고 마우스도 한 번 휘적거려 본다.은영 씨 이거 복사 부탁해요. 이 말이 보통 회사에서의 나의 시작을 알리는 알람과도 같은 말이다. 이 말을 머리로 시작하여 허리춤의 높이인 복사기 앞에 서면. 앞뒤 잘라 먹힌 꼬리들이 줄을 잇는다. 은영 씨 이것 좀, 은영 씨 이거, 은영 씨, 복사. 점점 짧아지는 말들. 입 밖으로 채 나오지 못한 말들은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말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을 땐 뒷모습을 볼 때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하얀 배설물 같은 종이들이 한가득. 꼭 몸속의 말들이 소화되지 못해 배설된 모양 같다. 덮개를 열고 원본을 넣고 덮개를 닫고 매수를 선택하고 실행을 누르고 덜컹거리는 복사기 위에 손을 얹고 잠시 넋 놓다 토해내는 복사본들을 가져다주면 그만. 가져다줄 때는 항상 공손하게. 여기 복사 요청하신 것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오전 내내 같은 행동과 말을 반복하다 점심을 먹고 퇴근 전까지 반복한다.

-오늘도 복사할 것 많네요.-네.-그럼 수고하세요.

 요새는 지나가는 사원들의 앵무새 역할이 되기도 한다. 네 아니면 괜찮아요. 이 두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앵무새. 통유리 새장에 갇힌 나는 창가에 위치한 복사기 덕에 모니터만 들여다보는 사원들과는 달리 종일 바깥을 구경할 수 있다. 복사기의 왼쪽에 위치한 투명한 유리문에 비치는 회사 복도와 그 위를 오가는 하얗고 검기만 한 사원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오른쪽 통유리의 바깥을 바라보면 시야의 한계가 넓어지는 기분이 든다. 요 며칠은 거대한 톱니바퀴의 반복 속에 갇힌 존재가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어 시간을 확인하며 사람들을 바라보곤 한다. 하지만 회사 맞은편 꽃집 아주머니가 프리지아와 안개꽃을 밖에 내놓는 순서는 항상 달랐다. 오늘은 노란 프리지아 먼저, 어제는 하얀 안개꽃. 그저께는 또 하얀 안개꽃 먼저 엊그제는 프리지아 먼저. 꽃에 물주는 시간도 늘 일정하지 않았다. 어제는 복사를 막 시작하던 오전 아홉 시 즈음 주더니 오늘은 점심 먹기 전 주기 시작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장종원(농생대 농업토목공학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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