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월 3일은 ‘학생의 날’이다. 기자는 ‘학생의 날’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어린이날’처럼 학생 복지를 위한 날을 떠올렸다. 이름이 주는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학생의 날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날이다. 그런데, 광주에서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날 동안 대구·경북의 학생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경북, 특히 안동 출신 학생들은 610 만세 운동을 주도했고, 대구·경북 내에서도 학생이 주도한 항일 운동이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그들의 행동에는 ‘무엇이 옳은가’라는 고민이 들어 있었다. 본지는 경북독립운동기념관 관장이자 오래도록 독립운동 연구를 해 온 안동대 김희곤 교수(인문대 사학)와의 인터뷰를 통해 학생의 날과 대구 경북의 독립운동, 특히 경북 학생들의 독립운동에 깃든 정신을 조명해 봤다●

Q. 역사학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중학교 때 한 선생님이 백범일지를 읽어보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이승만 정권 시절이었다보니 백범일지를 의도적으로 없앴던 것인지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학교 주변의 헌책방들을 찾아다닌 결과, 백범일지를 구할 수 있었다. 어렵게 구해서 책을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국가’와 ‘민족’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다. 그게 하나의 인연이었던 것 같다. 나중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전집을 낼 때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김희곤 교수는 본교 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김 교수는 지금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왔다. 1988년부터는 안동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데에도 힘쓰고 있다. 

Q. 구 안동독립운동기념관(현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설립 계기는 무엇인가?

우리나라 독립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이 안동이고, 독립유공자로 국가의 포상을 받은 사람 역시 가장 많다. 독립운동 51년 역사를 한 지역의 사람들로만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이 정도면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할 만하지 않나. 안동 독립운동사를 쓰면서 ‘이걸 배울 수 있는 기념관을 짓자'라는 생각을 했다. 2003년에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예산을 확보해 기념관을 건립했다. 안동독립운동관은 2014년 경상북도가 출연기관이 되면서 경북독립운동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Q. 대구·경북 독립운동 특징을 꼽자면?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각 진영의 통합을 이뤄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우리 독립 운동사는 1894년에서 1945까지 51년 동안의 역사다. 전반기 25년에 존재했던 세력은 보수와 진보 세력으로 나눠진다. 바로 의병과 계몽 세력이다. 

1894년부터 시작된 의병은 전반기 항일운동 중에서도 가장 먼저 일어난 운동이다. 유림들이 주도한 의병은 즉각적인 투쟁을 통해 군주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반면 계몽 세력은 과학문명과 물질문명으로 국가 시스템 자체를 바꾸고자 했다. 계몽세력이 생각하기에 의병 항쟁은 민중에게 너무 큰 피해를 끼쳤던 것이다. 재밌는 건 이 당시 둘은 서로를 진보·보수로 구분하며 싸웠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대한매일신보 등의 신문에서 유림을 비판하는 글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유림 역시 계몽 세력을 비판한다. 두 세력은 1910년 국권이 뺏길 때까지도 서로 등을 돌렸다. 

이들이 최초로 손을 잡게 된 사건이 대구에서 일어났다. 바로 대한광복회의 결성이다. 대한광복회는 계몽운동 세력인 조선국권회복단과 의병 세력인 *광복단이 합작해 만든 독립운동 단체다. 조선국권회복단의 중심에는  *박상진이 있었는데, 그는 *이상용, *김동삼 등 안동 사람들이 중심이 돼 만든 독립기지를 보고 ‘자금을 모아 만주 독립운동기지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자본을 모아보려고 약전골목에 무역회사도 세우고 여기저기 쌀가게도 만들어봤는데 잘 안 됐다. 

결국 이들이 생각해낸 것이 ‘친일 부호를 무력으로 압박해 자금을 얻자’는 것이었다. 계몽 세력이 군대나 무기가 있겠나. 그래서 의병을 찾아간 것이다. 경북이 보수적인 곳이라고 많이 생각하지만, 소위 말하는 좌우합작이 처음 이뤄진 곳이다. 독립운동을 연구할 때 ‘어떻게 하면 각 진영의 통합을 일궈낼 수 있는가?’에 가장 관심을 두는데, 바로 거기에 경북, 안동 사람의 기여도가 높다. 

Q. 독립운동가는 대부분 여러 지역을 옮겨다니며 운동을 했다. ‘지역 독립운동가’를 연구하는 의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대구 태생의 독립운동가라고 대구에서만 활동하는 건 아닐 거다. 그러나 사람들은 태생지의 규범 속에서도 자라나면서 그 규범을 잘 벗어나지 않는다. 어떤 환경 속에서 성장했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 안동에는 전통적으로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최고 가치로 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했다고 생각한다. 

지역 태생 독립운동가의 삶을 보는 것은 이러한 성장환경을 돌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지역 자체를 분석하는 일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 그 사람들의 삶 자체가 가치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찾아내야 할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남았는지 물어보자 그는 망설임 없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요?”라고 반문했다. 

Q. 전체 독립운동에서 학생운동의 비율은 어느 정도인가? 

학생 독립운동에서 말하는 학생은 신교육을 받는 이들을 의미한다. 사실 당시 학생은 신사회를 열어가는 인물이자, 조직을 갖고 있었다. 평균 연령대도 지금의 학생보다는 조금 높은 편이었다. 실질적인 국내 투쟁은 학생이 중심이 됐다고 보면 된다. 이들이 각 지역에 선언서를 나르고 학교에서 운동을 하고 고향에 돌아가면 또 거기에서 운동을 기획하면서 전국적으로 운동을 전파시켰다. 

예를 들면 서문박시장(현 섬유회관 앞쪽, 서문시장과 같은 장소이나 현재와는 위치가 약간 다름)에서 있었던 대구 31운동에 신명여고나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대거 참여했다. 또 이들이 고향에 가서 독립운동을 확산시켰다. 

Q. 당시 학생은 독립운동에서 어떤 존재였나?

예를 들면 3·1 운동에서 학생의 참여가 굉장히 중요했다. 3·1운동 당시 우리나라의 실질적 독립운동가들은 망명하거나 지하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표면에 노출된 조직은 종교조직과 학교밖에 없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였던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 이후 경찰에 전화를 걸어 스스로 잡혀갔다. 결국 서울 시내에서 시위가 일어나도록 길을 열고, 전국에 선언문을 확산시키고, 전달했던 것이 학생들이었다. 2차 3·1운동을 위해서도 학생들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또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는 사람, 이상을 내걸고 투쟁할 수 있는 사람도 학생이었다. 거기다 대다수가 학교를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학생이라는 것 자체가 그 시대에서는 상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던 특수 신분이었다. 시대 인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학생운동이 자신의 투쟁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장이었다. 

Q. 대구·경북은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파생된 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지 못한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지? 

사실 광주를 빼면 당시 타 지역의 학생운동은 비슷비슷했다. 대구가 대단히 저항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항일학생운동이라는 것은 학생이라는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충분한 중산층이 있어야 되고, 결과적으로 물산이 풍부한 지역에 학생층이 형성되는 것이다. 

군산 등의 지역에는 대농장들이 가득 차, 일본 학생들이 많았다. 이러면서 갈등이 심해졌다. 그 와중에 민족 감정을 자극하니까 더 크게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광주의 경우 호남 지역이기에 다른 지역보다 침탈 수준이 더 심했다. 

그렇다고 경북 사람들의 활동이 뜸했던 것은 아니다. 610 만세운동(1925년 순종 장례일에 일어난 만세 운동) 주도한 권오설, 그리고 그가 체포된 뒤 순종 장례 행렬 앞에서 당당하게 만세 외쳤던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 이선호 역시 안동 출신의 학생이었다. 

Q. 3.1 운동 이후 학교 단위의 비밀결사가 많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3.1 운동 이후 주력(종교지도자 등) 세력은 감옥에 투옥됐고, 1920년대부터 학생들이 사회주의 도서를 읽는 독서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 생각에 인도주의, 만국공법 같은 언어도 제국주의 국가에서 만든 말이었다. 결국 독립을 하려면 계급해방 투쟁을 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타도해야 할 독점자본과 타도의 주체인 무산자 계급을 놓고 본다면. 타도해야 하는 계급 일제로 두고, 무산자를 우리 민족으로 간주해, 계급 타도와 독립을 함께 이루려는 생각을 했다. 이런 것을 공부하는 독서회가 웬만한 중등학교에서는 다 있었다.

1930년대는 전시체제로 들어간 시기였는데, 전문학교처럼 높은 학교에서는 학병 반대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중등학교에는 결사대와 같은 독립군의 성격을 가진 조직이 나타난다. 대구·경북 지역에도 대구사범학교, 안동농림학교 등지에 태극단과 같은 투쟁적인 비밀결사 단체들이 생긴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투쟁은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보다 투쟁적인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안동농림학교는 경찰서에서 무기고를 탈취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Q. 그때의 학생독립운동이 현 대학생에게 시사할 수 있는 바는?  

지금의 학생들은 취업에 많이 몰두하는 듯하다. 물론 그게 학교에 가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독립운동가인 이육사처럼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고민을 한 번쯤 해봤으면 한다. 그런 고민이 없다면 직장에 들어가서도 성과주의에 매몰돼 자기 삶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 않겠나.

*(풍기)광복단: 1910년대에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이 결성한 항일운동단체. 1913∼1915년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과 관련하여 독립군 군자금 모집과 국내외 연락활동을 전개하였음.

*박상진: 해외의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안둥 삼달양행과 창춘 상원양행, 지린에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했다. 계몽 운동가 중심의 조선광복회를 설립 후 채기중 등이 결성한 구 의병 운동가 중심의 풍기광복단과 연합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했으며, 박상진은 이 광복회의 총사령을 맡았다.

*이상용: 경북 안동 출신. 만주로 망명한 이후 최초의 해외 독립운동단체인 경학사를 세웠다. 후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독립운동자금을 구하기 위해 생가인 임청각을 팔았던 일화가 있다. 

*김동삼: 경북 안동 출신. 1907년 협동학교를 설립함으로서 민족운동에 나섰다. 1911년에는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세우기 위해 가족이 함께 망명했다. 이후에는 신민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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