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법학과, 조지워싱턴대학 법과대학원, 육군법무실장, 국방부 법무관리관,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와 UN 국제형사재판기구까지. 현재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UN 국제형사재판기구에서 활동 중인 박선기(법대 법학 73) 재판관은 40여 년을 ‘법길’만 걸어왔다. “국제재판관으로 활동하며 국제사법정의의 교훈을 국제사회와 나누는 데 기여한 것이 참 소중하다”는 박 재판관. 법조계에서 국내·외로 다양한 경험을 쌓아온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들어봤다●

<사진제공: 박선기 재판관>

Q. 법정대학 재학 시절은 어땠는가?

1970년대 초 당시 법정대학에서는 법학과 30여 명과 행정학과 20여 명, 정치외교학과 20여 명 총 70여 명의 동기들이 함께 공부했다. 특히 본교 법학과 학생들은 1974년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학생 데모 등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2학년 봄에는 동기 4명이 투옥에 따른 제적 등으로 대학을 떠났다. 30여 명이 입학했던 초반과 달리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20여 명만이 졸업을 했다.

법정대학 73학번들은 형제와 같은 우정을 지금까지도 나누고 있다. 서울에서 매주 화요일마다 모임을 갖고, SNS를 통해 교류하면서 1년에 두 차례 전국 동기들의 부부동반 모임도 20년째 해오고 있다.

Q. 군법무 분야는 어떤 일을 하는 분야인가?

대학원을 졸업하던 1978년, 군 입대를 앞두고 당시 5년마다 실시한 군법무관 임용시험에 합격했다. 그때부터 군법무관으로 법조인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84년부터 2년 동안 미국의 Geroge Washington Law School로 유학을 가서 군법무관직을 수행하는 데 부지런히 노력했고, 2000년에는 육군소장으로 국방부 법무관리관직을 마친 후 전역했다. 그 후 서울에서 친구들과 법무법인 ‘대동’을 창립해 변호사로 일을 시작했다.

군법무 분야는 단순 형사사건에 대한 검찰권 행사 및 군사재판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방부와 각 군에서의 다양한 법률적 사안들을 다루는 분야다. 민간인과 군 사이의 여러 쟁송에 대해 국가를 대표해서 소송을 수행하기도 하고, 군내 인사 작전과 군수 조달 행정, 국제관계 조약 협정 검토 및 군내 인권보호 등 다양한 법적 이슈들을 다룬다.

본교 출신 후배들도 다수 군법무관으로 봉직하고 있고, 그들 또한 퇴임 후 경향 각지에서 법조인으로서 활약하고 있다. 내가 국방부과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선발한 이은수 동문은 여성으로서 장군까지 진급해 육군법무실장과 국방부고등군사법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본지 1593호 12면 기획 ‘여성 군법무관의 별, 이은수 변호사(법대 법학 84)’ 참조)

Q. UN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는?

UN 산하기구인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United Nations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Rwanda, 이하 ICTR)’는 1990년 초에 발생한 르완다 제노사이드(Genocide : 특정 집단 혹은 종족 구성원의 인종, 종교, 이념 등을 이유로 그들을 파괴하기 위해 대량으로 학살하거나 고문하는 행위)를 다루는 국제형사재판소다. 르완다 제노사이드는 1994년 르완다의 후투·투치 두 부족 간 내전 당시 발생한 투치 부족 대량학살 사건을 말한다. 인구가 800만여 명인 작은 나라 르완다에서 3개월 동안 약 80만 명의 무고한 투치 부족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대량학살 당하고, 수십만 명의 여성들이 강간을 당하는 등 20세기 인류 역사상 최단기간에 가장 참혹하게 자행된 대량학살 사건이다. UN 안전보장이사회가 이를 반인도적 범죄로 보고, 인류의 양심과 국제평화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간주해, 이들 범죄에 책임이 있는 국가수반과 최고책임자들에 대한 국제사법정의를 구현하고자 1997년 설립했다.

2003년 대한민국 UN 재판관 후보로 추천받아 각국에서 추천된 후보자들과 함께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자격심사를 거쳤다. 이어 당해 유엔총회에서 200여 개 회원국의 투표에 의거해 ICTR 재판관으로 선출됐다. ICTR은 아프리카 탄자니아 킬리만자로산 인근의 Arusha라는 도시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에 2004년 8월 부임해 2012년 6월까지 8년 동안 세계 각국에서 선출된 17명의 동료 재판관들과 함께 봉직했다. (유럽 재판관 4명, 아시아권 4명, 북남미 태평양 지역 4명, 아프리카 6명 등 총 18명의 재판관이 봉직) 내가 8년 동안 재판을 담당하고 판결을 내린 사안들은 내전 당시 르완다 군참모총장, 경찰청장, 군지휘관, 카톨릭신부, 고위관리 등에 관한 사건이었다.

Q. ICTR에서 활동하며 가장 의미 있었던 일은 무엇인가?

국제형사법에서 가장 무거운 범죄는 제노사이드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상 ‘대량학살’이라고 불리지만, 대량학살은 제노사이드 범죄의 결과적 형태 중 하나다. 따라서 대량학살이 있어도 법률상 제노사이드가 아닌 반인도적 범죄(Crime Against Humanity)로 의율(법원이 법규를 구체적인 사건에 적용하는 것)되는 경우도 있다. UN은 최근 북한 김정은 정권의 북한 주민에 대한 체계적이고도 광범위한 인권유린 살상 고문을 제노사이드가 아닌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과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ICTR에서 활동하며 가장 의미 있었던 일은 무력충돌 시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강간 등 성폭력을 단순한 전쟁범죄의 범주에서 가장 엄중한 제노사이드로 의율해 처벌한 것이다. 나아가 종족·인종·국적 그리고 종교적 기준에 따라 상대를 파괴할 목적으로 자행되는 모든 형태의 선동행위를 제노사이드로 처벌하기도 했다. 증오연설이 담긴 방송·노래·글·연극·연설 등도 제노사이드로 처벌됐다. 제노사이드에 의율돼 유죄 판결이 내려지면, 그 형량은 경중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징역 25년 이상의 중형이 선고된다.

국적·종교·종족·인종·이념 및 애국심·종교적 신조 등과 같이 순수한 개념을 절대 정의와 절대가치로 내세워 민중을 선동하고, 상대방에게 살상과 강간 폭력 등을 저지르는 것을 정당화 시키는 공인들의 증오연설이 사실상의 살상행위보다 더 엄중하게 처벌받아야 한다는 국제형사법적 원칙이 확립되었다. 증오연설과 같은 선동행위는 그로 인한 살상 등이 발생했는지와 무관하게 선동행위 그 자체(Direct and public incite to commit genocide)만으로도 제노사이드 범죄가 된다.

이런 ICTR의 판결은 언론의 자유와 관련하여 많은 토의와 검토를 거처 이뤄졌고, 9.11 테러이후 유럽 각국에서 종교·인종·종족·국적 등에 기초해 자행된 증오연설과 이를 사이버공간에 유포하는 등의 행위를 처벌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데에 형사법적 토대가 됐다.

Q. 전범, 일본의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에 대한 본인의 생각은?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우리나라의 어린 여성들을 종군위안부로 강제동원한 것, 또한 많은 사람들을 강제징용해 처참한 노역에 동원한 것은 역사적 사실로 국제사회에 공인되고 있고, 이에 대한 UN 인권위원회의 권고도 수차례 있었다.

유럽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유럽과 그리스 등지에서 독일 나치,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에 의해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되고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학살 피해를 입은 그리스 주민들이 이탈리아군과 정부를 상대로 국가의 책임을 추궁하기 위한 제소를 했지만, 국제법상 국가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판결이 내려진 것으로 알고 있다. 독일의 경우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강제노역을 시킨 기업 등이 기금을 조성해 지불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과 일본에서 진행된 전범재판에서도 강제노역이나 일본의 종군위안부 만행은 다뤄지지 않았다. 종전 후 72년이 지난 현재 일제 식민치하에서 발생한 종군위안부와 강제징용에 대한 책임자 처벌을 다룰 법적방안·기구설립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 문제들에 관해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조치를 강력히 요구하는 것도 좋지만, 유네스코에 역사적 자료로 등재하거나 국제 세미나 등을 통해 일본의 불법적 행위를 국제사회에 공인시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임을 부인하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마음에도 없는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기보다는 우리 정부와 국민들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강제징용 및 종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와 보상을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Q. 현재 활동하고 있는 UN 국제형사재판기구는 어떤 곳인가?

UN 국제형사재판기구(Mechanism of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s, 이하 MICT)는 20년 이상 운영돼 온 ICTR(1997.01~2015.12)과 ICTY(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 구유고슬로비아국제형사재판소, 1993.05~2017.12)의 업무를 이어받아 두 재판기구의 잔조업무를 수행하는 UN 기구다. 현재 UN에서 선출된 25명의 재판관들이 자국에서 주로 문서를 통해 특정사안과 이슈에 관한 사안별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MICT의 주 임무는 내가 담당하고 있는 1심 재판, ICTY에서 2심 최종심을 마치지 못한 사건들의 항소사건들 등이다. 항소심은 우리나라 대법원같이 1심 재판의 법적 오류가 있는지를 주로 다루는 법률심으로, 1심의 사실심 재판처럼 매일 재판이 열리는 게 아닌, 주로 재판서류에 따라 최종적 판단과 판결을 내린다. 내 경우 2015년 12월 ICTY의 항소심에서 1심 재판이 잘못돼 MICT에서 새 재판부를 구성해 처음부터 다시 재판하도록 판결된 사건을 맡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붕괴 후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크로아티아와의 내전에서 인종 청소 등에 깊게 관여한 혐의로 기소된 당시 세르비아 Secret Service 책임자(우리나라 국정원장에 해당)였던 피고인 Stanisic과 부원장 격인 Simatovic를 재판하는 중이다. 지난 1년 동안 동료 재판관들과 재판준비절차를 진행했고, 올해 2월부터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MICT 재판소에서 상주하며 재판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그 외에 MICT의 규정을 검토하고 개선하는 Rules Committee 위원으로도 임무를 수행 중이다.

Q. 오랫동안 해외에서 생활하며 느낀 바가 있다면?

인류의 고향인 아프리카 탄자니아·케냐 지역에서의 8년은 아프리카의 자연·사람·풍습 그리고 삶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문명과 자연이 공존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은 아름답고 순수하면서도 자신의 나라와 대륙에 대한 자긍심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아프리카의 청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기죽지 않았으며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갔다. 매년 말 옛 친구들을 찾아 케냐와 탄자니아에 갈 때면, 가난할지언정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들에게서 또 다른 삶의 지혜와 힘을 얻는다.

올해 1월부터 네덜란드에서 생활하면서 우리나라의 교육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됐다. 네덜란드는 작지만 강한, 경제규모 세계 18위의 유럽 소강국이다.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사교육도 없고, 4년제 대학 진학률이 30%도 안 된다. 대학에 들어가도 공부가 너무 어렵고 학점이수를 못하면 퇴교당해서 해당 전공에 재입학이 거의 불가능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쯤 자신의 능력을 평가해 다양한 분야로 진로를 정한다. 직업에도 귀천이 없으며 관용과 직업정신이 투철하다. 가족 활동과 마을 단위 활동 프로그램이 생활화돼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명문대학 입학을 위해 유치원 때부터 사교육을 시작하고, 가족 및 사회 전반의 공동체 인식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아프리카와 네덜란드에서 생활하며, 우리나라 전반의 교육시스템을 개혁해야 개인의 삶을 굳건히 함과 동시에 미래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느꼈다.

조현영 기자/jhy16@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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