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주’를 처음 접했던 것은 군복무 중이었을 때였다. 알고 있는 윤동주의 시는 한두 편 남짓이었고, 윤동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저 동주 역을 맡은 강하늘의 출연작 쎄시봉을 재미있게 보았고, 어머니와 같이 볼 만한 영화가 몇 없었기에 복귀 전 생색내기 효도로 영화관을 찾아 본 것이 ‘동주’였다. 영화를 본 후 감탄사를 연발하며 극장을 나섰다. 어머니를 포함한 몇몇 관객들은 눈물을 훔치기도 하였다. 마치 동주와 몽규 이외의 군더더기들을 떨쳐낸 듯한 흑백화면과 간결한 구성이 나를 천천히 적시는 듯했다. 또 윤동주의 맹우 송몽규가 윤동주에 대해 일자무식인 나의 머리를 세게 후려치는 듯했다. 어떻게 저렇게 굳건할 수 있을까, 자신의 신념을 위해 저리 서슴없이 약속된 고행에 몸을 던질 수 있을까. 평생 몽규의 그림자로 살아왔다고 말하던 윤동주의 말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그렇게 극장을 나왔다.

꽤 시간이 지나 나의 군생활도 끝이 보일 때였다. 뉴스에 간간이 ‘우병우’ 등 높으신 분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까지 불거졌다. 매일 저녁점호 전 뉴스시청을 하라는 지시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대신 ‘대통령은 국군통수권자이자 상관임을 인지한다’같은 내용이 아침저녁으로 방송됐다. 의경들은 연일 광화문과 주요 시위 장소로 불려나갔으며, 수도방위사령부 소속이었던 나의 복무 사단 소속 어느 연대의 외박, 휴가가 통제되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군인은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선 안 된다.”, “시위가 있는 곳은 얼씬도 마라.” 이는 생활관 최고참이었던 내가 휴가를 나가는 후임병들에게 거듭해서 건넨 말이다. 광화문에 수 만명이 촛불을 들고 운집하던 때였다. 정당에 몸을 담고 직접 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를 하던 대학생이 있었고, 촛불집회참가자들을 위해 손수 수백 개의 도시락을 나르는 나의 또래가 있었다. 주말마다 대통령 하야 촉구 집회에 참가하던 친구의 전화를 받은 날 저녁에, ‘박근혜가 부끄럽고 박근혜를 뽑은 자신이 부끄럽다.’라는 선배의 인터뷰가 실린 뉴스를 보았던 저녁에도 나는 후임병과 담배를 피우며 ‘어쩔 수 없지’라는 말만 되풀이했던 것 같다. 

전역 후 다시 ‘동주’를 보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시와, 동주, 그리고 여전히 불꽃 같은 몽규가 있었지만. 내가 다시 보았던 것은 동주의 부끄러움이었다. 몽규와 같이 동지를 모으지 못 하고, 몽규와 같이 한 몸 다 던져 싸울 수 없었고, 총ㆍ칼 대신 펜을 잡았던 동주의 고뇌가 영화를 보는 내내 밀려왔다.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달리 나도 펑펑 울었다. 감정이 복받쳤던 것인지 꽤나 추하게 울었던 것 같다. 나의 친구, 선·후배들이 부패한 권력에 맞설 때 그들과 멀리 떨어져있던 내 모습이 생각나 한참이나 멍하니 있었던 것도 기억난다.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내게 다가왔던 고귀한 시인은 이제 내 등 뒤에서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나 따위와는 차원부터가 다를 것 같았던 시인은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위대한 친구의 등 뒤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저주하였을 것이다. 그저 시를 사랑한 시인의 이름으로 아름답지 않은 세상에서 시를 쓰는 자신에게 끝없는 환멸을 느끼던 동주는 오늘날 끝없이 나열되는 사사로운 이유로 어둠과 맞서 싸우지 못했던 나를 무섭게 바라보는 듯했다. 시리도록 어두웠던 그 시대에 당신이 토해내듯이 노트에 옮겨 적었던 <서시>는 6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각자의 이유로 현장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 있었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크게 때리는 것 같았다.

홍태양

(과학대 자동차공학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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