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 베른이 쓴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처음 출간된 19세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인기 있는 소설이다. 철마를 이용해 80일 만에 지구를 한 바퀴 돈다는 발상, 그리고 세계일주 중에 벌어지는 필리어스 포그와 파스파르투의 짜릿한 모험담은 단연 사람들의 눈을 반짝이게 하는 이야깃거리다.

소설 속 파스파르투가 활약하던 19세기는 글깨나 읽었다는 유럽인들이 입을 모아 인류의 진보를 찬미하던 시절이었다. 방직기는 화수분마냥 끝없이 천을 뽑아내고, 철마는 선로만 깔려있다면 그 어디라도 우렁찬 소리로 달려간다. 그 모습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천지개벽의 격양된 감정을 불러 일으켰으리라. 17세기에 촉발된 과학혁명에 힘입어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등장한 산업혁명은 우리의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뒤바뀐 세상을 온몸으로 경험한 이들은 한 가닥 선로를 끝없이 달리는 철마의 위풍당당함이 인류의 현재이자 미래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낙관적 전망은 그 속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을 애써 외면한 것이었다. 쏜살같이 달리는 철마의 힘과 끊임없이 나오는 방직기의 천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쏜살같이 소모되는 자원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노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냉정한 진실과 마주한 이들은 이미 내달리기 시작한 철마를 멈추는 대신, 식민지의 막대한 자원과 수많은 노동자를 쥐어짜 철마가 언제까지나 움직이기를 재촉했다. 철마의 경쾌한 속도감에 매료된 사람들은 더 이상 철마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었다. 설령 그것이 희생양을 필요로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의 현재이자 미래가 되었다.

문득 2년 전, 막 개통한 도시철도 3호선을 탔을 때가 떠오른다. 지상 3층 높이의 모노레일 위를 달리는 무인 전철은 현대문명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나에게도 신선한 경외감을 주었다. 함께 탑승한 이들도 연신 창밖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아마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리라. 무인 지상철 따위 타 본 적 없는 대구 촌놈이라 불러도 좋다. 21세기의 철마를 처음 대하던 그때 나의 감상은, 19세기의 철마를 대하던 이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으리라. 세월을 뛰어넘어 그들과 공감한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이 엄습한다. 철마를 비롯한 문명의 풍요를 지속시키기 위해 우리는 또 무엇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는가. 녹아내리는 빙하 위에 위태로이 선 북극곰? 맛있는 치느님이 되기 위해 더럽고 비좁은 양계장에서 최후를 맞는 닭? 의문의 백혈병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반도체 노동자들? 꺼지지 않는 도시의 불빛 속 퇴근을 잊은 사람들?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우리를 찬란한 내일로 데려다 주리라 믿었던 철마가, 실은 우리의 미래를 땔감삼아 낭떠러지를 향해 달음박질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철마의 경쾌한 속도감에 취해 언제고 우리의 어두운 미래를 외면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이윽고 열차가 서서히 멈추었다. 1호선 환승역인 명덕이다. 흥미롭던 지상철의 기억을 간직한 채로 우리는 모두 환승장소로 내려갔다. 천천히, 그러나 늦지 않게 내려갔다. 막차가 머지않았으니 조금은 서두르는 편이 좋겠지.

오성현

(사범대 역사교육 11)

저작권자 © 경북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