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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현메아리

열린글터 작가모집 사업 - 소설 부문 '살인'

#1.  “오늘따라 유난히 춥군.”
정진은 인조 모피 코트의 깃을 한껏 여민다. 겨울바람은 예리하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정상인의 범주를 넘어서 미친 듯이 쿵쾅거렸으며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정당방위다. 그는 생각한다. 정신 나간 미친놈을 죽인 것뿐이다. 그놈을 살려뒀으면 자신도 <그 꼴>을 당했을 것이다. 아직도 생생하다. 오만상에 피칠갑을 한 그놈이 나에게 달려들던 모습은 공포스럽다 못해 기괴했다. 검붉은 피가 흥건한 구두를 벗고 양말을 확인한다. 다행히 양말은 멀쩡하다. 다시 한 번 그놈의 뒤통수를 본다. 파마를 한 지 얼마 안 된 머리가 꼭 자기와 닮았다는 오싹한 생각에 몸이 떨린다. 계획에 없던 살인치고는 너무나도 완벽하다. 그놈은 마치 살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낡은 마룻바닥 위에는 피가 어느 정도 튀어도 상관없을 정도의 두툼한 신문지가 깔려 있고, 피를 덜 튀기면서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쇠망치도 놓여있었다. 심지어 쇠망치는 투명한 비닐로 겹겹이 씌워져 있었다. 조금 묻은 피조차도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데 온몸의 힘이 빠지는 느낌이다. 바람 때문인가?
 
#2. 정진은 한때 천재로 불리었다. 대학에서부터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기존의 난제들을 척척 풀어서 학계를 놀라게 했다. 마침내 표준모형의 한계를 깬 신(新) 표준모형을 제시하면서 정진은 세계적인 관심을 받게 된다. 세계 물리학계는 더 이상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준수한 외모에 화려한 언변까지 갖춘 그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대통령은 없는 상까지 만들어가며 불세출의 영웅이 탄생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정진은 자신에게 밀려 들어오는 부와 명예와 관심을 전혀 거르지 않았다. 두 팔 벌려 최대한으로 그것들을 받으려고 애썼다. 사랑도 덤으로 굴러들어왔다.
 
#3. 스스로 평균 이상의 외모를 가졌다고 생각해온 그이지만, 그 정도의 미모를 가진 여성과 사귀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그만큼 아름다운 여성이 접근해왔다. 어떤 남자라도 마다하지 않으리라. 그는 생각했다. 오랜 친구 몇몇은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고 너의 돈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들은 친구도 아니다. 친구의 성공에 배가 아파서 악담이나 늘어놓는 존재들이 무슨 친구란 말인가? 정진은 미친 듯이 사랑했다. 그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주었다. 물리학이 무엇인가? 세상 그 어떤 공식과 이론과 실험도 사랑에 비하면 너무나도 미천하고 무의미하고 하등 쓸모없는 것이리라. 사랑만이 오직 가장 위대한 것이다… 정진에게 그녀는 인생의 전부였다. 그의 인생은 그가 아닌 그녀 중심으로 돌아갔다.

#4. 5년 후 정진은 <빛과 광자에 관한 이론>으로 물리학계를 다시 한 번 뒤집는다. 빛은 파동의 성질과 입자의 성질을 모두 가진다는 아인슈타인의 광자론에서 한발 더 나아간 그의 이론은 ‘광자’를 입자처럼 다룰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절대다수는 그가 돌아버렸다고 비웃었다. 신(新) 표준모형도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주장들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괴감에 빠졌다. 밀물처럼 끝없이 밀려 들어오던 부와 명예와 관심이 썰물처럼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그는 또다시 두 팔을 벌려 최대한으로 그것들을 막으려고 애썼다. 그녀도 떠난 지 오래였다. 가장 늦게 정진의 인생에 들어온 그녀는 가장 빠르게 정진의 인생에서 사라져 버렸다.
 
#5.  “다 됐다!”
정진은 소리쳤다. 아이처럼 두 팔을 벌리고 콩콩거리며 좁은 연구실을 뛰어다녔다. 한동안 빛을 받지 못한 피부는 힘없이 처지고 등은 굽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히 빛났다. 그의 눈동자는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폭포수같이 쏟아져 흐를 것만 같았다. 불현듯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는 머리카락에 뭐라도 묻은 사람처럼 강하게 머리를 좌우로 몇 번 흔들고는 다시 미소 지었다. 지금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였으리라. 그가 만든 것은 타임머신이다. 빛, 즉 광자를 입자처럼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자 그것들을 조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가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항상 ‘정답은 가까운 곳에 있다’고 말했던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을 떠올리며 정진은 다시 한 번 호탕하게 웃는다.
‘역시 선생님 말은 틀린 게 없어. 어디 보자, 그럼 10년 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보자’
세상에서 가장 조잡한 다이얼이지만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이얼이었다. 10년 전으로 다이얼을 맞추고 기계를 가동시킨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보던 굉음이나 빛은 없었다. 그저 조용했다. 정진은 한동안 질끈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실패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살며시 눈을 떴다. 자신의 허무맹랑한 아이디어를 생각하며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유리창 너머로 자신의 연구실이 보였다. 그의 아이디어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었다. 기계가 고장난 것도 아니었다. 그는 10년 전 자신의 연구실에 와 있었다. 10년 전 연구실의 모습은 타임머신 때문에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들을 일부 상기시켜준다. 너무나 큰 충격에 그 기억은 아직도 완전하지 않다. 그 날.


#6. 그날 밤 약속된 잡지사와의 인터뷰가 갑자기 취소됐다. 보통 때라면 짜증이 날 법했으나, 그날의 정진은 싱글벙글이었다. 연구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녀에게 서프라이즈를 해 줄 요량이었다. 그녀는 약속 시간보다 세 시간이나 먼저 꽃과 반지를 양손에 들고 온 자신을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 정진의 입이 귀에 걸렸다. 마침내 연구실 문 앞에 선 그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마른침을 삼키며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의자에 던져진 회색 코트였다. 그녀의 것이 분명했다. 다시금 입꼬리가 올라간다. 연구실의 불을 켜자 눈부심 이후에 내부가 서서히 보인다. 낡은 마룻바닥 위에 널브러진 분홍색 꽃무늬 브래지어가 눈에 들어온다. 이 또한 그녀의 것이 분명했다. 차마 무엇을 떠올리기도 전에 비명소리가 들린다. 아니다. 비명이 아니라 희열에 찬 신음소리다. 이 또한 그녀의 것이 분명했다. 소리의 근원은 연구실 안쪽 침실이다. 침실 앞에는 멋들어진 축구화가 바닥을 하늘로 쳐들고 한 짝만 널브러져 있다. 축구선수의 허벅지가 좋다던 그녀의 장난 섞인 농담이 떠오른다. 장난 섞인 농담이 아니었다. 정진은 마치 누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리고 곧이어 눈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배신감은 분노로 온전히 바뀌었다. 에너지의 상태가 변하면서 그 양은 반드시 감소한다는 엔트로피 법칙은 이번만큼은 적용되지 않는다. 배신감보다 더욱더 큰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정진에게 살기를 불러일으킨다. 온 세상이 빙빙 돌았다. 빨갛다. 수십 차례 그들을 벌했다. 그들은 사죄의 핏물을 흘려댔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살을 발라내고 뼈까지 자르고 나서야 정진은 이성을 찾았다. ‘끝이다!’
 
#7. 정진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죽어야 한다. 그러나 누구에게 어떻게 죽는단 말인가? 이 와중에도 자살할 용기가 없는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길을 묻듯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죽여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찰이 들이닥치면 더욱 문제다. 빌어먹을 이 나라에는 사형도 없다. 평생을 감옥에서 썩을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나으리라. 나를 죽여줄 사람이 필요하다.
바로 그때, 연구실 책상 앞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진은 몸을 숨기면서 그것을 보았다. 유선형의 매끄러운 캡슐. 360도로 둘러싸인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는 통유리 디자인. 그리고 아버지의 차에서 가져온 번호판. 상상했던 재질은 아니지만 분명하다. 어릴 때부터 항상 꿈꿔오던 그것이다.
  ‘저것은 ‘내’ 타임머신이다.’
성공했구나!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은 잠시였다. 정진의 두뇌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회전한다. 완전범죄가 필요하다. 책상 한편에 쌓아두었던 <한겨레>를 펼쳐 바닥에 두 겹, 세 겹씩 깔기 시작했다. 쇠망치도 준비했다. 피가 묻으면 곤란하므로 랩을 씌운다. 그러나 마지막이 문제다. 어떻게 해야 ‘그’가 ‘나’를 죽일 수 있게 한단 말인가? 한참을 고민한 정진은 미친놈이 되기로 했다. 자신이 방금 짓이겨놓은 살덩어리들을 가져와 먹는 시늉을 한다. 정진은 생각한다.
‘하필 추운 날에 이게 뭐람.’

겨울바람은 예리하다.



옥동진

(인문대 노어노문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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