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지금, 낮밤을 가리지 않고 붐비는 장소 중 하나인 일청담. 오늘도 이곳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연인, 친구, 가족들로 가득 찼습니다. 저쪽 편 의자에 홀로 앉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도 보입니다.

그러나 홀로 앉은 저 사람은 사실, 사복 경찰입니다. 당신을 주시하고 있네요. 그 옆에는 새내기를 가장한 *프락치(fraktsiya, 첩자)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당신에 대한 정보를 수집 중인 듯합니다. 이처럼 지난 1970, 80, 90년대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에는 교내에서 흔히 목격됐던 풍경이라 합니다. 그때 그 시절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싸운 학생들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본교 비정규교수노조 주최로 지난 25일 열린 ‘경북대학교 민주로드 탐방’에서 그 시절 선배들에게 들어봤습니다●

이한솔 기자/lhs15@knu.ac.kr

[발제자]

대구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대표 김찬수(사회대 문헌정보 79)

-이하 ‘김’

‘청춘, 시대를 깨우다’

(본교 학생운동사) 공동집필자

이경숙(사범대 교육 88)

-이하 ‘이’

여정남기념사업회 사무처장

오택진(공대 전자공학 91)

-이하 ‘오’

본관

본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인 본관은 그 시간만큼이나 무수히 많은 사건을 겪어왔다. 80년대 초반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김찬수 씨에게 본관이란 ‘독재정권시절 학생운동을 박제하는 사령탑’ 같은 곳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김: 지역 국립대학은 태생 자체가 정부에서 실시한 체제에 순응적인 교육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때문에 419혁명때까지도 본교에서는 학생운동이 활발하지 않았다. 6.25한국전쟁으로 학생운동의 맥이 끊어지고, 해방 직후 의과대학이나 사범대학의 맥들이 이어지지 않은 상황 속에서 국립대학이 만들어졌다. 때문에 1960년대는 4.19혁명에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와 어용교수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 학내 민주화를 위해 후속 투쟁들을 한 시기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의과대학 학생들이 학생운동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학생운동가들도 많았다.

전두환정권 시절에는 학교가 계속 탄압받았고 학생들도 시위를 계속했다. 제적구속되는 학생들이 정말 많았다. 결국 1983년 말에 일부 학생들을 학교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학원자율화 조치가 발표됐다. 그 뒤 1984년에 제가 복학해서 ‘경북대학생민주화추진위원회’를 만들었고, 위원장을 맡았다. 그때 학교 교직원과 보직교수들이 우리들을 집중적으로 주시했다. 학생들끼리 자유롭게 모여 토론하고 학내에서 집회를 할 수 있어야 되는데, 그 자체를 원천봉쇄한 격이었다.

한번은 집회를 기획하고 신학생회관 2층 사무실에서 시위물품을 만들어서 일청담으로 내려오려는데, 교직원들이 우리가 못 나오도록 건물을 봉쇄시켰다. 밤중에 학생회관에서 자고 있는데 쫓겨나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불문과 84학번, 철학과 82학번 후배가 총장실을 점거해서 불을 질렀다. ‘총장실 방화사건’이라고 KBS 9시 뉴스 탑으로 보도된 사건이었다. 후배들 얘기로는 추워서 종이를 조금 찢어 불을 지폈던 것뿐인데 카펫에 불이 옮겨 붙었다고 하더라.

불은 조그마한데, 교직원들이 문을 뚫고 들어와서 소화기를 뿜고 카메라를 들이대니까 정말 총장실이 불에 탄 것처럼 알려졌고, 결국 그 후배들은 감옥에 갔다. 당하기는 우리가 당했는데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포화를 맞으니까 다른 집회를 할 수 없었던 시기였다.

이: 본관에서 유명한 투쟁으로는 1975년과 1978년에 있었던 경북대신문 기자들의 점거 사건이 있는데, 그때 학생기자들이 안에서 문을 걸어잠그고 대학 언론 자유 투쟁을 하다가 결국은 본부 측에 의해 제지당하는 일이 있었다. 나중에는 학생기자들이 편집국장을 맡는 게 아니라 본부 직원이 맡기도 했다.

김: 1978년에 언론 파동이 일어나서 학보사 기자들이 전원 해직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사진 한 장과 함께 ‘봄이 오면 얼음이 녹듯이 학교에도 꼭 봄이 오겠지’와 같은 의미를 가진 글을 썼는데, 이 자체가 과격농성을 선동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본부에서 검열했다.

오: 1990년대에도 본관에서 농성을 많이 했다. 1994년 학원안정화 대책이라고 해서 학사경고를 3번 받으면 학교에서 퇴학되는 제도가 도입됐다. 그때 학원안정화 대책에 반대해 3월에 일주일정도 본관 앞에서 단식 농성을 했다. 총장실, 교무처장실 등 주요 업무가 이뤄지는 곳을 위주로 점거 농성을 했다. 총장실 쇼파에 누워서 자거나 짜장면 시켜먹는 경험도 많이 했다.

일청담, 박물관

지금의 북문처럼 서문(후문)이 번화가였던 시절 일청담 일대는 집회를 위해 지켜야 할 길목으로 꼽혔다고 한다. 민주로드 참여자들과 함께 일청담 앞 시계탑에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 지금의 박물관 건물은 원래 중앙도서관이었다. 백양로 부근으로 구, 신학생회관이 위치하고 서문이 한창 번화가였을 시기여서 일청담 일대에서 집회를 열었다. 1980년대 본교는 민주적인 학생회를 세우지 못했기에 1970년대 반유신 투쟁과 *민청학련 사건(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약칭 민청학련을 중심으로 180명이 구속·기소된 사건)들로 구속되거나 강제징역 됐던 선배들이 1980년대에 학원으로 돌아와서 만든 ‘복학생협의회’가 초기에 학생자치운동을 끌었다.

4.19혁명 기념일에는 이곳에서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마당극을 했다. 본교 김사열 교수가 썼던 ‘냄새굿’이라는 극본이었다. ‘적폐청산 굿’같이 생각하면 쉬울 듯하다. 유신정권의 각종 썩은 모순들이 냄새로 느껴지는데 어용 귀신, 언론탄압 귀신 등 학내의 이런 냄새를 물리치고 새 봄을 맞는 굿을 하는 것이었다.

백양로 입구 쪽에 있는 돌벽 쪽으로 대자보도 붙였었다. 등나무 밑 의자 같은 곳에는 사복 경찰들이 앉아서 신문을 보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학생들이 자기 친구를 전투경찰로 만나기도 했다. 처음에는 ‘쟤가 왜 여기있지, 놀러왔나’하면서 지나갔는데 알고 보니 전투경찰이었다.

사범대학 박정희 흉상

1971년 본교 사범대학(현 구관)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흉상이 세워졌다. 당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권력의 최고점에 달해 있을 시기였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어떤 과정을 거쳐 흉상이 세워지게 됐는지 들어봤다.

김: 학교에 독재의 잔재 박정희 흉상이 있다는 소식에 깨부순다고 해서 따라갔었다. 지금 흉상을 보면 귀퉁이 부분이 금이 가 있다. 한 학생이 책상을 밟고 올라가 무거운 것들로 콧잔등을 내려쳤다. 이를 교대해서 계속한 끝에 금이 갔다.

이: 박정희 흉상은 대구 사범학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창들이 기금을 모아 세웠다. 한창 권력이 최고점에 있을 때 사범대학 구관을 지으면서 이 흉상을 여기에다 박은 것이다. 1980년대에도 부수는 사건이 있었다. 그 뒤로 바로 학장회의가 열려서 이 흉상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냐가 화두가 됐다. 사범대학 동창들이 세웠기때문에 동창들에게 결정권한이 있다고 결론이 났다.

김: (흉상 밑 글귀) 위대한 혁명가가 아니라 약력을 정확하게 적어서 보시는 분들이 제대로 역사적 평가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흉상 자체가 우리 현대사의 굴곡을 보여주기 때문에 철거보다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또 얼마나 당시에 학교가 정치권력에 아첨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지 않나 한다.

대구캠퍼스 중앙도서관

1990년대만 하더라도 지금의 중앙도서관 주변으로 회랑이 있었다고 한다. 1991년 위안부 문제가 김학순 할머니에 의해 증언된 후, 대구에서는 처음으로 그 회랑에서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이 이뤄졌다.

이: 19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 학생들이 민주광장에 모여 집회를 했다. 글로벌플라자가 있는 곳에서 대강당 맞은편, 인문대 사이 에 있었던 민주광장은 인문대학, 대강당, 중앙도서관 등이 위치하면서 북문이 번화가가 이어졌다. 여기가 주요한 통로가 되면서 민주광장이 중요한 장소가 됐다. 중앙도서관 위쪽에서 보면 민주광장이 저 아래로 다 보였다. 1990년도 초반, 처음으로 민주광장에 대규모의 학생들이 모였던 것이 지금 학생총회의 기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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